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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감는 여자
박경화 지음 / 책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처음이라는 말. 참 가슴 벅찬 단어이다.
처음 시작, 첫걸음마, 첫눈, 첫사랑, 그리고 첫 소설집.
오늘 새로운 작가와 처음 만났다. 그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작가의 책을 만나면 책을 읽기에 앞서 작가의 약력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 작가의 나이를 신경 써서 보게 된다. 그리고 많이 어린 작가의 경우 선듯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꼼꼼하게 책의 내용을 살펴본 뒤 결정하게 된다. 나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어떤 것에 거부감을 느끼며 피하려는 무의식이 작용된 행동인 듯 느껴진다.
[태엽 감는 여자] 표지 안쪽에 나와 있는 박경화 작가의 소개는 너무 간단하고 짧아서 인색하다 느낄 정도이다. 몇 년도 졸업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출신학교와 2000년 무등일보와 2003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다고만 나와 있다. 신춘문예 당선 작품의 제목조차도 언급이 없다.
소설을 공부하는 소설가 지망생도 아니면서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면 무조건 점수를 후하게 주고 보는 나에게는 [태엽 감는 여자] 소설집에 당선작이 실려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점이 퍽 아쉬웠다.
이래저래 원하는 사전 정보는 전무한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면 그 어떠한 것들도 내겐 아무 소용이 없어](87쪽)
총 8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태엽 감는 여자]는 누추하고 삭막한 현실 속에서 자아 찾기에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여성들을 주로 그리고 있다.
녹록치 않은 현실에 그녀들 자신조차 그리 굳건하지 못하다. 작가는 거짓 희망과 만들어 낸 밝음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아프고 힘들어서 짐짓 눈감고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싶은
삶의 누추함을, 부끄러운 상처들을 세세히 눈앞에 그야말로 날것으로 드러낸다.
[완벽히 초라하고 가난하며 귀하지도 않은 여자가 이제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167쪽)
[태엽 감는 여자]의 슬픈 주인공들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또한 현실에 맞서 싸우지도 않는다. 그녀들의 소극적인 투쟁방법은 그저 집을 나오는 것이다. 나를 속박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곳에서 그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내가 다른 세상을 향하기. 당당히 제 발로 걸어 나오기. 그러나 그 다음엔 더 힘들고 더욱 지치게 하는 생활고가 기다리고 있다. [죄악 같은 나약함](172쪽)으로 그녀들은 그녀들 스스로가 선택한 삶마저도 포기한다.
[깊은 상처를 건드리는 그 어떤 암울들일지라도
부디 당신으로 하여금 역설적인 희망을 갖게 하는 아이러니를 선사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하겠습니다.] (239쪽 작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