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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 유동하는 삶을 헤쳐나간 영혼
이자벨라 바그너 지음, 김정아 옮김 / 북스힐 / 2022년 7월
평점 :
이 책은 한 인간의 일대기이면서 세계사의 흐름에 휩쓸린 거대한 인물에 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200여 편이 넘는 서평을 쓰면서, 600페이지가 넘는 책은 처음이면서 전기라는 장르도 처음이라 책을 받고서 그 기록의 방대함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인물은 유대인으로 폴란드 포즈난이라는 지역, 유대인의 비율이 매우 적었던 지역 출신으로, 부르주아 유대인 집안의 아버지 마우리치 바우만과 비교적 자유로운 무신론자 유대인 어머니 조피아 콘에 사이에 1925년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폴란드 사회는 어떠했을까...
아버지가 자본가였던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것은 전후 폴란드 사회에서 유대인에겐 불리한 사실이었고 점원이나 상인으로 남기를 바랐던 바우만의 할아버지의 직업을 선택하는 당시 전통적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바우만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상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독학가, 애서가 몽상가였으며 사업 감각이 없어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서 집안 경제를 책임지게 했고. 자주 가난에 처하게 했다고 한다. 집안 배경, 종교 생활 방식이 모두 달랐던 부모를 통해 어머니가 추구하던 '동화된 폴란드인'으로 살고자 했던 어린 시절 유대인의 주된 거주지에서 살던 유대인들과 달리, 포즈난에 정착했기에 폴란드 특유의 반유대주의에 어린 바우만은 이념과 민족차별주의에 대해 일찍부터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동화 과정이란 폴란드인은 가톨릭 신자, 적어도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종하지 않은 지그문트네 가족은 개종한다해도 폴란드 언어와 문화, 풍습, 가족 전통에 통달한다고 해도 폴란드인으로 동화되는데 미완으로 남았을 것, 폴란드 사람들의 호의에 따라 동화의 여부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의 시절 유럽에서 중요한 것은 국적보다는 민족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였다. 여러 민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지그문트 가족들이 살았던 곳은 좀 덜했을지라도 폴란드 내에서 바우만은 유대계 폴란드인은 쉽게 허락되는 위치가 아니었다.
폴란드에서 애국이란 반유대주의였고, 어린 지그문트는 반유대주의의 낙인 뿐 아니라 뚱뚱한 몸집 때문에도 차별이 시달렸지만 유대인으로서 낙인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고 한다. 가족 바깥의 세상은 그에게 엄혹했다...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안에서 뛰놀았다. 그 사랑이 차가운 외부 세계에서 나를 보호했다.
책은 오랫동안 그의 유일한 친구였고 치열한 독서 활동이 일생과 함께했다. 아버지가 몸소 보여준 대로, 아들인 그도 쓰라리게 마음을 할퀴는 삶의 탈출구로 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적 위치에 반해 평생 자신을 폴란드인으로 인식했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논란이 많은 국내보안대의 정치장교 겸 공산당원으로서 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하는 데 앞장섰던 것도 공산주의가 ‘민족에 따른 차별이 없는 폴란드’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바우만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썼다. 어른이 된 뒤로 마주한 삶의 여러 국면에서 바우만은 한 번도 팔짱 낀 관찰자로 머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자신의 이상을 좇아 움직였다.
유대인 대다수가 포즈난을 떠나 독일 통치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때껏 포즈난에서 독일을 지지하고 폴란드를 '배신'했던 유대인이 바로 이들이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이 들어서자 러시아 치하 폴란드 지역에서 대개 부르주아 계급으로 살던 '동부유대인'이 포즈난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새로 독립한 폴란드를 지지했다. ..포즈난의 가톨리계 폴란드 주민들은 여러 유대인 집단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같은 유대인으로 보았다. 그는 반유대주의의 차별적 상황에서도 뛰어난 학생이었고, 전쟁으로 러시아 등에서 피난민의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대학 공부를 했으며 끊임없는 유대인에 대한 '밀어냄' 신분의 한계에 부딪혔다. 그의 가족은 폴란드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 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그들의 이주를 막은 것과 같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업에서 뛰어난 능력과 성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라고는 곁을 맴돈 불량배들이었고, 형제자매와 터울이 컸던 바우만은 외로웠으나 반려견 하나 키울 수 없었는데, 유대인이 반려견을 키우면 더 눈에 띄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그랬다고 했다는 부분에서는 더욱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던 그의 삶이 가슴이 아팠다.
공산주의가 ‘민족에 따른 차별이 없는 폴란드’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폴란드 공산 정권은 유대계라는 이유로 바우만을 슬그머니 군대에서 학계로 밀어냈다. 그리고 고무우카 정권은 1968년 학생시위로 위기에 처하자 히틀러 못지않은 야비한 반유대 선동을 통해 상황을 넘기려 들었다. 바우만은 이때 폴란드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했지만, 6일 전쟁 승리 후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사회에 녹아들지 못했다. 결국 바우만은 영국에 정착했다. 1989년 공산 정권 붕괴 후 바우만은 폴란드를 찾았지만, 다시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민주 폴란드’는 끝내 그를 거부했다. 그는 런던에서는마르크스 주의자였으나 고국인 폴란드에서는 수정주의파로 보았고 마르크스 주의 지식인을 보는 샤프의 견해를 비판한 바우만이 여느 사회학자보다 훨씬 유연했고 이는 그가 영국에서 교수 임용이 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학자, 강사, 언론 편집자로서 활발한 활동이 점차 그를 유명하게 했다. 그의 굵직한 저서들을 찾아 읽지는 못했지만 평전을 통해 사상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 책의 후반부에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근현대 사회학과 철학에서 그는 주요 인물이었으며 학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기에 이번 독서느는 역사와 가치있는 지성의 눈을 뜨게 된 경험이었다.
이 리뷰는 북스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