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동서문화사 월드북 76
허먼 멜빌 지음, 이가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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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철학이나 인문학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소설책을 읽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년 8월 1일 ~ 1891년 9월 28일)'<모비 딕>이다. <모비 딕>은 대학 필독서로서도 유명한 책인데 아마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거다. '모비 딕'이라는 흰고래에 의해 한쪽 다리를 잃고 분노와 복수심에 불탄 '에이허브'라는 선장이 포경선을 이끌고 모비 딕을 잡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그런 얘기다.

책도 이렇게 한 줄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본 책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어마 무시한 두께를 자랑한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나는 재밌게 읽었다. 잘 하지 않던 책갈피 표시(?)까지 하면서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고전 문학들이 시대적 차이와 그 깊이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다소 다가가기 어려운 편이긴 하다. 멜빌의 책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평생을 육지에 발붙여 사는 '천생 육지인'인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도, 본 적도 없는 '포경선'을 배경으로 펼쳐치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 읽어 본 결과, 과연 고전 문학의 반열에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던 단점을 제쳐두고, 이야기의 흐름이라든지 소재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면 "Call me Ishmeal(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문구가 나온다. 해당 문구는 문학계의 10대 명문장 중에 하나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명작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 소리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의 주인공은 '이스마엘'이다. 그는 원래 교사였으나 뭔가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최근 몇 년간 선원이 되어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마엘은 성에 차지 않았고, 이번엔 늘 타던 상선(물건을 나르는 배)이 아닌 '포경선'을 타기로 결심한다. 포경선은 말 그대로 '고래를 잡는 배'다. 배에 타서 그냥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직접 노도 젓고 고래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험난한 일이다.

그렇게 큰맘 먹고 이스마엘은 12월의 추운 겨울 날씨에 어떤 여관에 겨우 묵게 된다. 방이 다 찼으나 오늘날로 치면 킹 사이즈 베드가 있는 곳이 있으니까 대충 거기에 묵으라는 주인장. 대신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라고 한다. 그 사람이란 예의 바른(?) '야만인'이라고 하는데 쿨한 이스마엘은 바로 OK 한다. 원래 뱃일을 하면 여러 인종들을 보는지라 대충 그런가 보다 하고 방에 들어가지만..... 이윽고 나타난 야만인은 큰 덩치에 온몸에 문신을 하고 심지어 사람 두개골 파는 등의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퀴퀘그'라고 하는 이 야만인은 솜씨 좋은 작살잡이였다. 처음엔 퀴퀘그도 이스마엘을 보고 놀라지만 이내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트고 찐친이 된다. 이스마엘은 퀴퀘그와 함께 포경선 '피쿼드 호'에 올라탄다. 그곳 선장인 '에이허브'와 항해사 '스타벅', '스텁', '플래스크', '대구' 등등과 함께 이스마엘은 본격적인 포경 작업을 위한 항해에 나선다.


그런데 순조롭게 항해하던 도중에 대뜸 선장인 에이허브가 파격 선언을 한다. 이 배의 항해 목적은 단순한 포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모비 딕'이라고 하는 흰고래를 죽이기 위한 여정이라는 거다! 몇 년 전 에이허브는 모비 딕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잃은 상태다. 그 이후로부터 오직 모비 딕을 죽이기 위해 벼르고 있었고, 지금이야말로 그때라는 게 에이허브의 설명이다. 그리곤 모비 딕을 맨 처음 발견하는 자에겐 비싼 스페인 금화를 주겠다고 선언한다. 한 마디로 에이허브는 선원들을 선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선원들은 포경업자 특유의 사나이다움과 고래 사냥을 위한 열정으로 에이허브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그렇게 포경선 피쿼드 호는 모비 딕을 쫓는 여정을 시작한다.



줄거리만 보면 대충 모비딕을 쫓기 위한 얘기가 주된 내용 같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그렇지 않다. <모비 딕>은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그리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웬만한 작품들보다 '심오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고래잡이를 빙자한 인생 서사시' 같았다. 말이 고래잡이지, 이들이 포경을 하는 과정이라든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은 인간의 삶 그 자체다. 바다와 고래가 인간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자연세계, 즉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원들의 모습은 자연과 삶을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흰고래 모비딕을 죽이고자 하는 에이허브의 모습이 그러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스타벅처럼 이성을 가지고 자연과 삶에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살아가고자 하지만, 에이허브는 미친 듯이 모비딕과의 결투라는 운명에 온몸을 던진다. 설사 이로 인해 파멸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스타벅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나는 에이허브 다음으로 이 스타벅이라는 인간이 참 정감 갔다. 우리가 잘 아는 카페 '스타벅스'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건 그렇다 치고, 불같은 에이허브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스타벅은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포경선의 목적을 에이허브의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선박의 주주들의 이익과 고래를 잡아 이윤을 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살아남아서 육지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때문에 그는 작중 다른 선원들과 달리 에이허브의 말에 반기를 드는 등 충돌을 일으킨다. 에이허브와 스타벅, 이 두 사람의 반목은 책에서 느껴진 '인간의 삶'이라는 심오한 주제에 더 불을 붙이게 했다. 에이허브처럼 운명에 적극적으로 달려들 것인가, 아님 스타벅처럼 인간의 운명이니를 떠나 이성적으로 자기 안위를 생각할 것인가!

참고로 이 두 사람이 완전 상극인 사이인 것 같지만 사실 스타벅도 에이허브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도 에이허브의 열정에 감복한다. 다만 너무 과할 뿐! 에이허브 본인도 이걸 잘 알고 있다. 만약 이대로 가다간 정말 모비딕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 자신뿐만 아니라 나머지 선원들도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마음이 약해진 에이허브가 인간으로 하여금 투쟁하게 만드는 저 자연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울부짖은 모습은 스타벅의 마음을 울린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작품의 명장면, 클라이맥스 같았다. 우리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삶을 살아가는 걸까, 왜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본 책이 심오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구성이다. 보통 소설책 하면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에 따라 흐르기 마련이지만 <모비 딕>은 그렇지 않다. 처음엔 주인공 이스마엘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피쿼드 호를 타면서 전지적인 시점으로 이스마엘이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중간마다 고래의 종류라든지 뼈 구조, 성질 등등 고래와 관련된 각종 TMI와 고래 해체 과정같이 포경일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나온다. 잘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로 상관없고 온갖 지식들이 잡다하기 흩뿌려진 느낌인데 굉장히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또한 작품 자체에서 뿌리는 떡밥이 넘쳐난다. 예를 들어 작중 이스마엘이 묵었던 여관 주인장의 이름이 '관'을 뜻하는 단어였다든지(죽음을 암시), 이스마엘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이름과 배의 명칭이 구약 성경 속 인물이라든지 소위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떡밥들이 엄청났다. 이 같은 걸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만약 아니라면.... 토닥토닥......



이외에도 작품은 1851년에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보적이다. 앞서 이스마엘과 야만인 퀴퀘그와의 일도 그렇고 인종적, 종교적, 사상적인 면에서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한다. 오히려 퀴퀘그를 일반인보다 더 고귀한 인간으로 묘사할 정도다. 퀴퀘그 말고도 본 책에선 흑인, 아시아인, 아랍인 등등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고, 배 안에서 이들은 자신의 역할에 맞게 자유롭게 행동한다. 동시대 때의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나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말은 아시다시피 에이허브의 패배로 배가 침몰하게 되어 이스마엘을 빼고 전원 사망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생과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인가 싶지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건 항해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행동이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의 본성에 맞게 자유롭게, 그리고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과 즐거움을 잃지 않은 선원들의 모습이다. 에이허브처럼 운명에 따라 불같이 살아갈 수도 있고, 스타벅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스텁처럼 낙천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으며, 퀴퀘그처럼 작살잡이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소박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이렇게 서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삶을 향해 두려움 없이 용감히 나아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포경선 얘기임에도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모비 딕>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결국 그게 뭐란 말인가? 외관뿐이지 않나? 어떤 가죽을 뒤집어썼건 정직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야말로 이 고래잡이의 일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느닷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을 혼돈에 빠지게 하여 영원의 세계로 쓸어 넣겠지.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건가? 우리는 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이른바 그림자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나의 진실한 실체인지도 모른다. (중략) 갓난아이 같은 이류가 그 과학과 기술을 아무리 자랑하고 즐거운 미래에 그 과학 기술이 얼마만큼 진보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바다는 인간을 모욕하고 살해하여 파멸의 심연으로 떨어뜨리고, 인간이 만든 장대하고 견고한 군함을 짓밟아 버릴 것이다.

스타벅은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의미는 아마도 가장 신용할 만하고 유용한 용기란 직면한 위험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하는 것 외에도,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이란 겁쟁이보다도 위태롭다는 뜻일 것이다.

에이허브 : 신이여, 신이여, 오오, 신이여! 나의 심장을 박살내고, 나의 머리통을 깨드려 주십시오! 스타벅, 인간의 눈을 내게 보여 주게. 바다나 하늘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아니 신을 우러러보는 것보다도, 그편이 좋지. 오오, 이것은 마법의 거울인가? 푸른 대지여, 밝은 낫롯가여, 나는 그대의 눈동자 속에서 나의 아내와 자식을 본다.



스타벅 : 오오, 선장님, 선장님! 고귀하신 분! 훌륭하신 노인이시여! 결국 무엇 때문에 저 저주받은 고래 따위를 쫓아야 한단 말입니까? 나와 함께 갑시다! 이 지옥의 바다에서 뛰쳐나갑시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에이허브 : 이건 무언가. 이 무슨 이름없고 불가사의 하고 기이한 것인가. 우리를 잘도 속이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군주와 잔인무도한 황제가 내게 명령해서 나를 모든 본인의 사랑과 정을 배반하게 하고, 이 몸을 부단히 틀어막고 밀고 나가고 부딪치게 하고, 올바른 본래의 마음으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일에 무모하게 덤벼들게 하는 것인가. 에이허브는 과연 에이허브 자신인가? 지금 이 팔을 추겨든 건 나인가? 신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만일 웅장한 태양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심부름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별이라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하지 않고는 회전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조그마한 하나의 심장이 고동치고 이 조그마한 하나의 두뇌가 사색한 것은 누구에 의해서인가. 그 고동을 치게 하고 그 사색을 하게 하고 그 생을 영위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신일테지.

선량한 우리 장로교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대해야 하며, 이런 대상물에 반쯤은 미친 듯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교도 같은 사람들에 비해 우리 자신들이 월등하게 우수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이여, 장로교파이건 이교도이건 묻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자애로움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는 모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니, 절실히 고칠 필요가 있나이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일걷는 이 잡다한 일에는 기묘한 때와 기묘한 사건들이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진의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데, 그 농담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실망하지는 않으며 별로 이의를 달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온갖 사건, 주의와 신조와 이론,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그 모든 고난 따위가 아무리 어려워도 받아들이고 만다. 마치 위장이 튼튼한 타조가 총탄이나 부싯돌을 꿀떡 삼키는 것과 같이 사소한 고생이라든가 근심거리, 또는 앞날이 갑자기 암담해진다든가 생명의 위험이 닥친다든가 하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 그 자체도 그에게는 자기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생면부지의 장난꾸러기에게 슬쩍 한 때 얻어맞은 것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대수롭지 않는 농담처럼 여겨질 수가 있다.

이 낙천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철학을 낳는 것으로 고래잡이의 위험에 견줄 만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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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뢰님과 인간의 배꼽 - 히라코 와카 초기 작품집, S코믹스 S코믹스
히라코 와카 지음, 박소현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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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브로큰 마리코‘를 읽고 (좋은 의미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인상깊은 작가라 생각한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번 책도 기대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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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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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모비 딕>이라는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준 책이다. 두께가 어마어마했지만 그럼에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현재 다른 판본으로 재독하고 있는데 불연듯 추억에 휩싸여 평을 남긴다. 좋은 책이니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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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수채화집 지브리 아트북 시리즈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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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시카의 일러스트와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거대한 판형과 구성이 독자를 압도하니 팬이라면 꼭 소장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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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다 PEACE by PEACE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홍규 옮김 / 들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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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 Tolstoy)'는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인물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등의 소설 작품들은 물론 <나의 신앙>, <인생에 대하여>, <죽이지 말라>와 같은 글을 쓰면서 사상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 읽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도 톨스토이의 전반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제목만 보면 종교 서적 같으나 실제로 읽어보면 종교를 곁들인 사상서에 가깝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종교를 기반으로 변화하기를 바랐다. 단순히 종교적 교리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믿으라고 하기보다는 복음서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가르침, 즉 이웃을 사랑하고 폭력을 휘두르지 말며,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행위를 실제 생활 속에 실천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도 쉽게 글의 요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책의 초반부에선 '비폭력 저항운동'에 대한 글을 다루고 있다. 톨스토이는 '퀘이커' 교도들을 비롯해 악에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는 기독교의 소수 종파들의 얘기를 시작으로 기독교인들이라면 마땅히 이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복음서와 예수의 삶을 돌아보며 어째서 우리가 악에 대해 무저항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이런 무저항이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므로 소용없다는 세간 사람들의 비판에 반박하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톨스토이가 생각한 진정한 종교(신앙)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교리와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게 아니라 복음서 속 예수의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에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제 17장 20-21절)

예전에 비슷한 주제의 톨스토이의 책에서도 톨스토이는 이렇게 한탄했었다. "지금까지 사회적 제도를 바꾸자는 말은 무수히 들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바꾸자고 하는 말하는 자는 본 적이 없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는 사상이나 사회적 제도의 변화보다는 삶의 변화, 생활의 변화가 먼저라고 말한다. 책의 제목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인 이유도 여기에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말한 '신의 나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천국의 삶은 하늘 위나 어딘 저 멀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네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정한 삶은 자기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외에도 내가 본 책을 읽으면서 새롭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먼저 톨스토이는 이런 변화의 끝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위에서 말했듯이 실생활 속 변화는 동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처럼 어떤 사회적 제도가 제대로 정립되면 모든 게 끝난다는 - 결국엔 언젠가는 인간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는 사상과 반대로 그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톨스토이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했던 것 같다.


또한 무저항에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다 보니 톨스토이의 사상이 뭔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하는 주장 같지만 실제로 톨스토이는 일반인들이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놀랍도록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악에 대해 저항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홉스가 말했던 것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걱정을 톨스토이는 언급하며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국가'라는 존재 이유를 조목조목 따진다.


국가의 본능적 전공은 복종하는 게 아니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국가는 누군가를 복종하게 만들 때만 국가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언제든 그러한 일을 위해 애를 쓸 것이며, 결코 자발적으로 그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권력이 의존하는 것이 군대인 한, 국가는 절대로 군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에서 군대를 활용하는 것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221p)

(덧붙여, 국가의 폭력 사태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를 비꼬는 말도 은근 정곡을 찌르게 한다)


일부 유식한 학자들이 취하는 태도는 이렇다. 그들에게 이 질문(국가의 폭력)에 대한 해답은, 강연을 듣고 책을 저술하며, 대통령이나 부대통령 및 서기를 선출하고, 처음엔 이 도시에서 다음엔 다른 도시에서 모임을 가지며 연설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국가는 이 모든 연설과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병사 징집을 멈출 것 - 그들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의존하고 있음에도 - 이고, 자신들의 강연을 듣고 군대를 해제할 거라고 한다.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인민에게 어떤 방어조차 취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이는 마치 한 무리의 강도가 무장하지 않은 여행자를 묶고 약탈할 준비가 되었는데도, 여행자가 묶여 있는 오랏줄이 가하는 고통에 대해 불평하자 이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들을 다시 놓아줄 것이라는 형국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국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평화는 동맹과 회의, 책과 팜플릿 덕택에 곧 정착될 것이다. 그동안 너희들은 나가서 제복을 입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고통을 인내할 준비를 하라(222p)

그가 보기엔 국가는 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집합체이자 폭력에 근거를 두고 있는 존재다. 국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가상의 추론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레 국가를 찾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자신이 주장했듯이 개개인이 이런 폭력과 권력의 힘에 저항하게 되면 이러한 추론은 사라지리라는 것이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게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물론 나는 이런 톨스토이의 주장이 무저항이라는 사상 자체만큼이나 다소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현실적 한계를 인지하고 어떻게든 반박하려는 모습이 있었다는 게 의외였다. 


비록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도, 어째서 세상은 늘 폭력과 전쟁에 휩싸여 있는가와 국가의 존재 이유, 그리고 인간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이렇게 진솔하게 얘기하는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으레 이상과 현실의 모순으로 빚어진 갈등으로 괴로워할 때가 있다. 분명 어떤 해결책이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럽다. 어찌 보면 톨스토이도 그러한 안타까움과 절박함으로 글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고민이 있으신 분, 어려운 사상이나 교리적 내용이 아니라 현실 속 고민들을 진솔하게 다룬 책을 읽고 싶으신 분들, 그리고 톨스토이의 전반적인 사상을 알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이 모든 그릇된 사상의 근원이 되는 주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자신의 생활에 대한 어떤 변화가 없어도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이다. - P173

기독교에 대한 1,800년간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동안 문명세계는 가장 진보된 사상가들이 설명하듯 기독교를 도그만의 종교라고 확신했다. 즉, 인생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비합리적이고 터무니없는 과장이며,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실정법적 도덕의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폐지된 즉, 그리스도가 배척한 바로 그 보복의 율법이 우리 인간에게는 보다 더 실용적이며 유익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 P152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생활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규칙이라는 것, 즉 사람들이 1,800년 전에 들어간 새로운 생활에 요구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생 이해의 확립이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활동의 규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결과다. - P153

기독교에게 완성이란 무한한 것이며,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완성이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이며, 절대적이고 무한한 완성을 향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 자체가 행복을 더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어떤 정해진 율법이나 계율이 있을 수 없다. - P158

또 하나의 오해는, 신을 사랑하고, 신에게 봉사하는 것에 대한 기독교의 요구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봉사로 대체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확고하며 명백한 기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에 대한 사랑은 단지 유추에 의한 이론적 추론일 뿐이다. 사랑이란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니고, 나아가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가져야 하는데, 인류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허구일 뿐이라는 점이다. - P167

실증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모든 과학적인 원리에 힙임은 형제애를 강조하는 시도들은, 인간이 자신이나 가족이나 국가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을 전체 인류애로 확장하는 것을 옹호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사랑이 실은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또한 개인적 또는 사회적 인생관에 기초하는 사랑은 국가를 위한 사랑을 초월하여 생길 수 없다. - P169

우리의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총체적인 모순과 고통은 이처럼 새로운 인생관과 실제 생활 사이의 불일치로부터 파생된다. 이는 인류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 P179

대부분의 인간이 사색하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려고 애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은 진리 속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자신이 보내고 있는 쾌적하고 습관이 된 생활이야말로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P205

국가의 본능적 전공은 복종하는 게 아니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국가는 누군가를 복종하게 만들 때만 국가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언제든 그러한 일을 위해 애를 쓸 것이며, 결코 자발적으로 그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권력이 의존하는 것이 군대인 한, 국가는 절대로 군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에서 군대를 활용하는 것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P221

일부 유식한 학자들이 취하는 태도는 이렇다. 그들에게 이 질문(국가의 폭력)에 대한 해답은, 강연을 듣고 책을 저술하며, 대통령이나 부대통령 및 서기를 선출하고, 처음엔 이 도시에서 다음엔 다른 도시에서 모임을 가지며 연설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국가는 이 모든 연설과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병사 징집을 멈출 것 - 그들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의존하고 있음에도 - 이고, 자신들의 강연을 듣고 군대를 해제할 거라고 한다. - P222

모든 시민이 병사가 되는 것이 결국 국가 조직의 받침이 되며, 비록 그가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행하는 모든 일의 책임을, 공유하는 참가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누구든, 강제 복무를 통해 자신의 평화, 안전, 생명을 희생하도록 예정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가라는 것의 의의와 가치를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 P266

우리는 한편에서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며 자유, 평등, 인류애의 원리를 믿고, 그런 것이 준비된 다음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가장 노예같은 타락에 복종하며,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적나라하며 가장 의미 없는 공동체를 외관상으로 더 높고 낮은 계급이나 동맹군과 적국으로 받아들이고,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형제들을 살해할 준비를 하고 있다. - P298

우리는 인민 스스로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모습을 본다. 노에 상태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런 일들이 당연하며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인민의 해방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사방천지에서 노에화가 끊임없이 진행되어도 해방은 어디에선가 어떤 식으로든 준비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 P311

우리의 전체 생활 구조는, 현행 제도 중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즐겨 상상하는 것처럼 어떤 사법적 원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한 폭력인 살인과 고문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 P399

이러한 불합리한 악행에는 너무나도 많은 도발자와 공모자, 묵인자가 개입되어 있고, 이 때문에 어느 한 사람만 도덕적 책임을 느끼게 되지 않는다. 국가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책임을 분담시키려 한다. 국가는 본래 그런 범죄가 끝없이 행해져야만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의 지배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범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범죄 행위에 가급적 많은 시민을, 가능한 한 많이 참가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 P434

국가기구는 어떤 사람이 사회 계층의 어떤 단게에 있든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국가기구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서로 전가한다. - P436

권력과 굴종에 대한 이러한 도취의 영향 아래,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스스로를 더 이상 현실적인 존재로서의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귀족이나 상인, 지사나 재판관, 장교나 황제, 혹은 장관이나 병사라고 하는 특별한 존재, 제약된 어떤 존재로 간주한다. 따라서 보통의 인간의 종으로서 가지는 의무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에게 할당된 의무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를 ‘인간 양심의 영원한 요구‘가 아니라 장교로서 또는 병사로서의 입장에 부과된 일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일 모두가 ‘우연적‘이며 ‘일시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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