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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 단편선 - 뿌쉬낀에서 고리끼까지
전혜진 옮김 / 문예림 / 2010년 4월
평점 :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이어서 읽은 러시아 문학 단편집이다. 마침 중고로 싸게 올라와 있었길래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에서는 푸슈킨, 레르몬토프, 투르네게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끼의 대표 단편들을 다루고 있다. 모든 작품이 훌륭했으나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은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먼저 '레르몬토프'의 <운명론자>이다. 주인공이자 군인인 '나'가 어느 날 동료들과 정말 정해진 운명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운명에 대한 것보다는 주인공의 사색과 독백에 있었다. '나'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생각에 빠지는 것 자체가 피곤한지 씁쓸한 말을 남긴다. 솔직히 레르몬토프하면 짧고 비극적인 인생처럼 그 작품 역시 거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저런 섬세한 글을 썼다니 신기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자체보다는 레르몬토프라는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작품이랄까. 언젠가 다시 <우리 시대의 영웅>을 읽어 볼 생각이다.
다음으로 내게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의 <농부 마레이>이다. 책에 수록된 단편집 중에서 제일 짧은 이 소설은, 아직 주인공 or 도스토옙스키가 감옥에 있었을 때의 일을 다루고 있다(<죽음의 집의 기록>의 속편 같았음). 정확히는 감옥에 있던 주인공이 문득 자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아홉 살 즈음에 숲속에서 놀다가 저편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농노 '마레이'를 발견한다. 마레이를 처음 본 주인공은 그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누군가 '늑대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깜짝 놀란 주인공은 놀란 마음에 근처에 있는 마레이에게 달려가 울고 불며 도와달라고 한다. 하지만 늑대가 있다는 소리는 환청이었고, 농부 마레이는 놀란 주인공을 다정하게 대하며 위로해 준다. 이에 마음이 편해진 주인공은 무사히 숲속을 빠져나간다. 이 일을 생각하기 전에 주인공은 같은 감옥의 죄수들이 불평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목격하고 괴로워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레이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금세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두려움에 떨었던 그를 진정시켜 준 마레이, 주인공은 마레이에게서 봤던 따스함이 어쩌면 눈앞에 있는 죄수들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종교적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가난하고 비천했던 농노 마레이에게서 인류를 향한 사랑을 본 주인공이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은 도스토옙스키의 종교적 사랑의 또 다른 변형이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으로 '안톤 체호프'의 <상자 속 사나이>이다. 이 작품은 틀에 박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몰락하는지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체호프는 당시 무료하고 권태로움 그 자체였던 소시민의 삶을 꽤나 정확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상자 속 사나이> 역시 끝까지 스스로에게 매몰되어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한 소시민이 등장하니 말이다. <6호 병동> 다음으로 체호프 작품 중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글자 크기가 조금 작았다. 나는 읽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기존의 다른 단편집들과 달리 촘촘해 보여서(짧다고 해서 글자 크기를 엄청 크게 하는 출판사가 있음)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있거나 눈이 안 좋은 사람들은 읽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있는 러시아 명화가 읽는데 방해되었다. 물론 좋은 그림이긴 하지만 소설과 전혀 연관이 없는 그림들이 대다수라 물음표였다. 마치 공중 화장실 문에 붙어져 있는 명화들을 보는 것 같았달까. 비유가 조금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하는 행위와 정 반대의 모습이라 좀 그랬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러시아문학 단편선 - 뿌쉬낀에서 고리끼까지> 러시아의 대표 문학가들의 작품을 가볍게 찍먹(?)할 수 있는 책이었다. 실력 있는 번역자분들이 여럿이서 번역했기 때문에 글 자체도 깔끔했고 읽기 쉬웠다.
그 밖에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 생각들을 붙잡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추상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아주 젊었을 때는 나도 몽상가였다. 불안하고 강렬한 상상력이 나에게 전해주는 우울한 생각과 무지갯빛 행복감에 번갈아 가면서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깊은 밤 환영과의 싸움 후와 같은 피곤함과 애석함으로 가득 찬 불안한 기억만 남을 뿐이다. 나는 이 무모한 싸움에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영혼의 열정과 불굴의 의지를 모두 소모해버렸다. 머릿속으로 이런 경험을 한 후 비로소 지금의 삶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 P36
나무 침상에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나는 이 불행한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모든 증오와 분노가 갑자기 기적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걸 느꼈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며 밖으로 나갔다. 강제로 삭발 당하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 술에 잔뜩 절어서 쉰 목소리로 고성방가를 하고 있는 이 농부도 어쩌면 마레이와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거짓을 참으면 바보라는 소릴 듣소.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 사람들이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 편이라는 것을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거짓이고, 위선이오. 이 모든 것은 빵 한 조각, 따뜻한 잠자리, 몇 푼 벌지도 못하는 하찮은 일자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오. 안돼. 더 이상 그렇게 살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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