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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ㅣ 세계단편문학선집 2
니콜라이 고골 외 지음, 최병근 옮김 / 써네스트 / 2013년 10월
평점 :
무료배송 조건을 맞추고자 다른 책을 찾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인상적인 제목 + 러시아 소설을 좋아하던 내게 딱일 것 같아 바로 주문해 읽어봤다. 그렇게 완독한 결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독서였다. ‘푸시킨’이나 ‘고골’같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여러 러시아 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좋았다. 그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몇몇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먼저 러시아 문학하면 빠질 수 없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이라는 작품이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다시 봐도 늘 새로운 이야기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주인공 ’게르만‘은 젊은 공병 장교로, 다른 친구들과 달리 흥청망청 놀거나 도박에 빠지지 않고 나름 착실하게 살아가는 청년이다. 정확히는 실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게르만은 파티에서 친구 ‘톰스키’가 자신의 할머니에 대해 말하는 걸 듣게 된다. 톰스키의 할머니인 ‘늙은 백작 부인’은 과거 젊었을 적에 전설적인 '생제르멩 백작'으로부터 카드 도박에서 무조건 이기는 방법을 전수(?) 받고 엄청난 금액의 돈을 도박판에서 따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백작 부인은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았고, 그 비밀 역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이 말을 들은 게르만은 늙은 백작 부인으로부터 어떻게든 비밀을 알아내고자 결심한다. 겉으로는 도박하는 걸 꺼려 했던 게르만이었으나, 실상은 가능하다면 도박을 통해 한밑천 잡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한편, 늙은 백작부인에게는 가난한 양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늙은 백작 부인에 의해 자기 의지에 상관없는 구속된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하루빨리 자신을 이곳에서 구해 줄 누군가(신랑감)가 오기를 바란다. 그때 호시탐탐 늙은 백작부인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던 게르만은 리자베타를 발견하곤 거짓으로 그녀를 유혹한다. 이를 몰랐던 리자베타는 사랑에 눈이 멀어 게르만에게 집에 몰래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게르만은 기회를 틈타 밤에 몰래 늙은 백작 부인의 방에 잠입한다. 그리고 놀라는 백작 부인에게 제발 도박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어째서인지 백작 부인은 앉은 채 몸을 뻣뻣해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화난 게르만은 총구를 겨누며 위협을 하다가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는 그대로 리자베타에게 달려가 사실을 말하나, 자기 때문에 노파가 죽었다는 것보다 끝내 도박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에 분해한다. 이런 그의 끔찍함에 우는 리자베타를 뒤로하고, 게르만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난 늦은 밤, 깜빡 잠에 든 게르만 앞에 죽었던 백작 부인의 유령이 찾아오는데..
이게 <스페이드 여왕>의 대략적인 스토리이다. 푸시킨의 작품은 대체로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고골만큼은 아니지만 푸시킨의 작품에선 사실과 환상, 그리고 낭만이 느껴진다. <스페이드 여왕>에서도 마냥 현실적인 줄만 알았던 게르만이 백작 부인의 유령에 놀아나면서 결국엔 그 환상에 의해 붕괴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리자베타와의 사랑이 아닌 돈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물신주의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이것도 예전에 <귀여운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주인공 '올렌카'에 대해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냥 어느 여성의 전반적인 삶을 그려낸 작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올렌카의 삶이 다르게 보였다. 올렌카는 작중 여러 번 결혼한다. 결혼했던 남편들이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런데, 올렌카는 그때마다 스스로를 남편과 동일시하며 그와 같이 행동하고, 말한다. 예를 들면 첫째 남편이 극장주였는데 이때는 마치 자기가 극장주가 된 것처럼 똑같이 연극일에 대해 걱정하는 건 물론이고, 연극의 유용성을 주변 사람들에 잔뜩 설파하며 극장일에도 거든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극장주였던 첫째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고, 이후로 토목일을 관장하던 둘째 남편과 결혼한 뒤로는 연극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남편처럼 토목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얘기하고 다닌다. 나중에는 자기는 토목을 관리하고 실용적인 사람이라며 연극 따위엔 신경 쓸 일이 없다고 말을 바꾼다. 놀라운 건 올렌카가 이런 짓을 아주 당당하게 하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들은 이런 그녀에 대해 '사랑스럽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둘째 남편과도 사별하고 혼자 남겨진 올렌카는 남편이 없자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점차 퇴색되어간다. 내가 봤을 때 올렌카가 사랑스러운 여인인 이유는 아마도 어린애처럼 자기 생각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좋아하는 걸 졸졸 쫓아다니는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러시아에선 종종 '유로지비'라며 이상할 정도로 착하거나 어린애 같은 사람들을 '성인'이나 '귀여운 사람'이라며 좋게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올렌카는 사랑스럽다기보다는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생계로 인해 남편 없이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라면 몰라도, 생각이 없어서 의지할 대상으로서 남편이나 제3자를 찾는다는 점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뭔가 체호프는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갑갑함이나 불편한 점을 잘 꼬집는 것 같다.
푸시킨이나 체호프 외에도 본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러시아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로 '이반 부닌'과 '콘스탄친 파우스토프스키'이다. 먼저 이반 부닌의 <추운 가을>이라는 작품이다. 아주 짧은 단편소설인데, 주인공인 '나(여성)'가 젊었을 적 약혼자와의 짧은 작별의 순간 하나만을 간직한 채 살아왔던 나날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게 특징이다. '나'와 약혼자의 서정적인 작별 장면은 물론이고 이후에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나'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파우스토프키의 <눈>이라는 작품이다. 처음엔 사진 속 저자의 무시무시한(?) 인상에 전쟁이나 슬픈 소설일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보다 서정적인 작품은 없었다. <눈>은 전쟁으로 인해 원래 살던 모스크바를 떠나 노인 홀로 사는 시골집에 피난하게 된 주인공 '타치야나'와 그 노인의 아들인 '포타포프 중위(전쟁 때문에 잠시 고향집을 떠나 있었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타치야나가 집에 있는 동안 노인은 곧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우연히 노인의 탁자에서 포타포프 중위가 쓴 편지를 읽게 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하며 집 대문에 달린 종소리 하며 눈길 사이로 난 정자로 가는 길, 오래된 촛불 냄새 등등을 얘기하는 걸 보며 타치야나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포타포프가 잠시 휴가를 온다는 소식에 타치야나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포타포프는 고향 역에 도착하고나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낯선 여자가 자신의 집에 피난해 와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망연자실해한다.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집에는 낯선 사람만 있을 것이고, 가봤자 고향의 느낌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포타포프는 끝내 집 근처에 도착하는데... 옛날처럼 누군가 정자로 가는 길에 눈을 치워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정자에서 집을 바라보던 포타포프를 타치야나가 발견한다. 그녀는 담담하게 포타포프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얼떨결에 집에 들어선 그는 마찬가지로 예전처럼 울리는 대문의 방울들, 오래된 촛불 냄새, 피아노 소리 등등에 놀라워한다. 알고 보니 타치야나가 그를 위해 편지에 나왔던 그대로 고향집을 재현해냈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시종일관 타치야나는 이를 아주 담담하게 행동한다는 거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느껴지는 인간적인 정이 왠지 모르게 흐뭇함을 준다. 포타포프와의 묘한 분위기도 읽는데 한몫하니 꼭 한 번 읽는 걸 추천드린다!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는 잘 알지 못했던 러시아 단편 소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이었다. ‘이반 부닌‘과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콘스탄친 파우스토프스키’ 등등이 그랬다. 다만 앞서 말한 이반 부닌과 파우스토프스키의 작품을 제외한 다른 단편 소설들은 내게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석류석 팔찌>는 오늘날이었으면 스토커로 진작에 체포되었을 이야기가 로맨스적인 이야기로 표현되었고, <심연>은 너무 미사여구가 많았다.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와 <귀향>은 <구덩이>로 유명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최고였으나 <구덩이>나 <체벤구르>만큼의 여운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달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거나 가볍게 읽고 싶은 분이라면 추천드리는 바이다.
그러니까 그 열정적인 편지들, 불꽃처럼 격렬했던 애원, 그 대담하고 끈질긴 구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 그의 영혼이 갈구했던 것이었다. 그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이 가련한 양녀는 자신의 늙은 은인을 살해한 강도의 눈먼 공범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때늦은 고통스러운 참회의 심정으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게르만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도 고통스러웠지만, 불쌍한 처녀의 눈물에도, 슬픔에 잠긴 그녀의 놀랄 만큼 매력적인 모습에도 그의 냉혹한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다. 죽은 노파를 생각하면서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직 하나의 사실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비밀을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만이 그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 P37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쁜 징조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견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며,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의견도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무런 의견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 P94
이렇게 나는, 그 언젠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했던, 그의 죽음을 견디어 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면서 항상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삶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그리고는 스스로 답한다. 단지 그 추웠던 가을 저녁분이었다고. 그런데, 그 가을 저녁이 있기는 했었던가? 그래, 아무튼 있었다. 이것만이 나의 삶에 있었던 전부였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뜨겁게 확신한다. 거기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날 저녁의 사랑하는 마음과 젊음을 간직한 채. ‘당신은 좀 더 살다가, 세상에서 조금 더 즐겁게 지낸 다음, 그리고 내게로 오면 돼’. 나는 좀 더 살았고, 조금 더 기뻐했다. 이제는 곧 그에게 갈 것이다. - P106
그녀는 발을 툭툭 굴러 장화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그러자 출입구에서 대꾸하듯 방울소리가 울렸다. 포타포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어색한 듯 뭔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출입구에서 그는 외투를 벗었다. 자작나무 연기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고양이 아르히프는 소파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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