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나무 아래 - 시체가 묻혀 있다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이현욱 외 옮김 / 위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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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클램프'의 <동경 바빌론(도쿄 바빌론)>이라는 만화 때문이다.


작중 '세이시로'라는 악역이 화려하게 핀 벚나무 아래에서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을 주인공 '스바루'에게 들키자 '알고 있나요?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답니다. 벚나무 꽃잎이 붉게 물드는 건 아래에 묻힌 시체에서 흘린 피 때문이죠'라고 말한다. 뭔가 흥미(?)로운 구절이라서 인터넷에 한 번 검색해 보니,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 작가 '가지이 모토지로'가 쓴 <벚꽃나무 아래>라는 소설에서 나온 구절이었다.


20세기 초 일본 소설이라고 한다면 보통 나쓰메 소세키나 다자이 오사무 등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지이 모토지로 역시 이들 못지않게 뛰어난 필력을 자랑한다. 이번에 읽은 <벚꽃나무 아래>는 모토지로 작가의 단편작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과생이었지만 문학에 열정이 있던 모토지로는 당대 작가들과 교류하며 따로 동인지까지 만들어 꾸준히 글을 썼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그때 당시의 여느 일본 소설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자신과 타인 간의 소통 문제(본심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답답함), 병적인 자기 자신과 대조적인 - 생명력 있는 자연에 대한 분노, 신경질적인 에고 등등 격동의 세기(근대화 시기)에서 방황하는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대체로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모토지로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약간 열린 결말이라고 해야 하나,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마지막은 비교적 숨통이 트이는, 건강한 결말을 맞이한다. 마치 세차게 내리던 가을비가 그치고 난 뒤, 젖은 낙옆으로 뒤덮인 거리를 거니는 것 같았다. <벚꽃나무 아래에서>처럼 벚나무의 아름다움에 두려움을 느끼고 밑에 시체가 묻혀있기 때문이라는 둥의 우울한 상상을 하다가도, 이제야 아름다움의 이유를 알겠다며 일반인처럼 벚나무 아래에서 술잔을 즐길 수 있다고 했듯이 말이다(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 있는 이 땅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묻힌 곳이다).


간혹 관종(?) 같고 밉상인 주인공이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예상 외의 감동을 준 책이었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분위기의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면 한 번 쯤 읽어보는 걸 추천드린다. 


눈을 감은 채 ‘참느냐, 부탁하느냐‘ 선택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해결 방안도 없다는 걸 막연히 알면서도, 비록 몸도 마음도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임에도 그 미망을 떨칠 수 없이 발악할 수 없는 고통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더는 괴로움을 참을 수 없게 되어서야 ‘이렇게 괴로워할 마에는 차라리 말해버리자‘라고 결심하였지만, 그때는 이미 손도 발도 쓸 수 없게 된 듯하고, 곁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자못 답답하고 태평해 보여, ‘나와 어머니의 거리가 이렇게 지척인데 왜 알아채지 못할까‘라며 가슴 속 고통을 움켜쥐어 그대로 상대에게 내동댕이치고 싶은 짜응이 일어났다. - P12

몇 살 정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 얼굴이 못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입니다. 또 하나는 집에 빈대가 생겼을 때입니다. 집 전체를 불에 태워버리고 싶었지요. 그리고 또 한 번은 새 필기장을 처음 쓰기 시작했는데 글씨를 잘못 썼을 때입니다. 필기장을 버리고 싶어지거든요. 이런 일을 생각한 끝에 저는 이 어린 친구가 반성할 수 있도록 소중히 다뤄지고 잘 고쳐진 오래된 물건의 깊이에 대해서 기회가 있으면 말해주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 P70

돌이켜보면 어떻게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 난카문고 정원에서 인동덩굴의 깊은 향기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레이난 언덕에서 망초의 향기로 여름을 지나 가을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고 느낀 밤도 있었습니다. 망상으로 스스로를 비굴하게 만들지 않고 싸워야 할 상대와 싸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는 조화에 만족하고 싶다는 제 바람을 전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씁니다. - P71

이 얼마나 괴롭고도 절망적인 풍경인가. 나는 나의 운명 그대로인 길 안을 걷고 있다. 이것은 내 마음 그대로의 모습이고, 여기에서 나는 햇빛 속에서 느끼는 어떤 기만도 느끼지 않는다. 내 신경을 어두운 전방을 향해 뻗어 있고, 지금은 나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형벌 같은 어둠, 살을 에는 듯한 혹한, 그 속에서 내 피로는 즐거운 긴장감과 새로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걸어라, 걸어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걸어라. - P132

말의 사체, 개나 고양이의 사체 그리고 인간의 시체, 시체는 전부 부패하여 구더기가 들끓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심해. 그런데도 수정 같은 액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어. 벚꽃나무 뿌리는 탐욕스러운 낙지처럼 시체를 껴안고, 말미잘의 촉수처럼 털뿌리를 모아 그 액체를 빨아들이고 있어. 무엇이 저런 꽃잎을 만들고 무엇이 저런 꽃술을 만들까? 나는 털뿌리가 빨아올리는 수정 같은 액이 조용히 줄지어 관다발 속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꿈결처럼 보이는 듯 했어. 너는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니? 아름다운 투시력이잖아. 나는 이제야 겨우 벚꽃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어. 어제, 그제 나를 불안하게 했던 신비에서 자유롭게 된 거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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