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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98
루트비히 포이에르 바흐 외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08년 5월
평점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이다.
내가 포이어바흐를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와 관련된 책을 읽었을 때였다.
과거 마르크스는 젊었을 때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는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포이어바흐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여기까지였고, 실제로 그의 저작을 읽지는 못했다. 솔직히 나는 우리나라에 포이어바흐의 책이 출판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는 포이어바흐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 철학이나 유물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 사이에서일 뿐, 포이어바흐가 누구인지,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책을 썼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 또한 그러한 일반인 중 한 명이었기에 포이어바흐에 대해 알고자 하는 바람도 식어갈 뻔했다.
하지만 한길사에서 출판한 '기독교의 본질'과 '종교의 본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마음도 잠시 나는 이번에야말로 포이어바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먼저 사서 읽어보았다.
그렇게 읽어 본 '기독교의 본질'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사실은 예수와 같은 신의 존재를 위한 종교라기보다는 자기 자신, 즉 인간의 본질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을 무시하고 오직 신만을 추켜세워 인간을 소외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들을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하나하나 따지며 기독교가 결코 추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이 종교가 아니었음을 간파한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성을 부인하는 모습은 자칫 무신론자처럼 보이지만 포이어바흐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 내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 다른 종교들과 달리 감성적이고 사랑이 있는 기독교의 본모습을 보여주며 진정한 기독교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인간보다 신을 우선시하고 숭배하는 일반 기독교나 신학자들과 달리(모든 기독교나 신학자가 그런 것은 아님) 포이어바흐는 기독교 속에서 인간 사랑을 발견했고, 신보다는 인간을 중요시하는 휴머니즘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 어렸을 적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던 내게 그때 당시 느꼈던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을 어느 정도 속 시원히 알려준 것 같았다.
뭣도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왜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을 보고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왜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라는 것을 하는지, 왜 다른 기타 종교보다 기독교에 열광하는지 등등이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포이어바흐의 책을 읽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결론을 내려보자면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그동안 일반인들 사이에서 신비로운 종교로서 알려진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폭로하는 책이며, 기독교도 결국에는 인간의 종교이며 인간을 위한 종교임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인간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것에서 인간적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포이어바흐의 분석력은 마찬가지로 우리 눈으로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자본'과 '노동력' 속에서 인간적 의미 - 인간 착취를 발견한 마르크스의 분석력과 매우 비슷하다)
비록 일반인들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일 수도 있으나 기독교나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마르크스 철학과 유물론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해 본다!
무엇보다 근대적인 위선자, 거짓시인, 사이비 문학가의 성병과 화류병은 치료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의 가치를 오로지 자신들의 시적 매력에 따라 측정하며 정직하지 못하고 철면피다. 그래서 그들은 환상으로서 드러난 환상조차도 그것이 아름답고 마음에 들면 보호할 정도다. 그들은 주견(자신의 주장)도 없고 진리도 없으므로 ‘환상은 환상으로가 아니라 진리로 간주되는 동안만 아름답다‘는 것을 한 번도 깨닫지 못한다. -당시 유행하던 경향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생각- - P36
‘상류사회‘의 경향, 곧 인습적인 환상이나 비진리의 중립적이고 무감동한 경향이 현대의 주도적, 정상적 경향이다. 말하자면, 현대에서는 단지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종교적 및 학문적 사건도 역시 그런 식으로 취급되고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현대의 불행이다. 가상이 현대의 본질이다. - P39
나는 더 잘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 머리에서 자신의 눈알을 빼내는 철학자들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나는 사유하기 위하여 감관, 특히 눈을 필요로 한다. 나는 사상으로부터 대상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사상을 산출한다. - P43
현대에서 신성한 것은 오직 환상뿐이며 진리는 속된 것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진리가 감소하고 환상이 증대하는 정도에 따라 신성함이 상승한다. 결국 현대에서는 최고도의 환상이 최고도의 신성함이 된다. 종교는 소멸해버렸고 개신교도들 사이에서조차 종교 대신에 종교의 ‘가상‘인 교회가 나타나 무지하고 판단력이 없는 대중에게 신앙을 갖게 하려 한다. - P49
인간은 사유한다. 곧 인간은 대화한다. 인간은 자기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자신인 동시에 ‘나와 너‘가 된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타인의 자리에 놓을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 곧 유한하고 제한된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에 불과하다. 인간만이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하고 지적인 기쁨과 애정을 갖고 있다. 인간만이 눈의 이론적인 즐거움을 찬미하는 것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지상의 욕구나 이해와 무관한 빛을 바라보는 눈은 그 빛 속에서 자기자신의 본질과 자기자신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 P62
신의 사상은 인간적이며 지상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명예, 자신의 자아를 부정한다. 그 대신에 인간에게 신은 모든 것 속에서 오직 자기만을, 오직 자기의 명예만을,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아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신은 다른 모든 것을 싫어하는 아욕의 자기만족이며 이기주의의 자기향락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에게 부여되는 것은 실제로 인간 자신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인간이 신에 과해서 말하는 것은 실제로 자기자신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96
종교적 심장수축에서 인간은 자기자신의 본성을 자신으로부터 몰아내고 자기자신을 밖으로 내던진다. 종교적 심장이완에서 인간은 일단 축출된 본질을 또다시 자기의 심장 속으로 받아들인다. 신만이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다. 이것이 종교적인 척력의 작용이다. 신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나를 ‘통하여‘, 나‘에게‘, 나를 ‘위하여‘ 행위하는 존재다. 신은 ‘나를‘ 구원하는 원리며 나의 선한 심성과 행위의 원리며 결국 나 자신의 선한 원리고 본성이다. - P99
신은 ‘나를‘, ‘인간 일반을 사랑하는‘ 신이다. 여기에 종교의 핵심이 있으며, 여기에 종교의 근본열정이 있다. 신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한다.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근거다. - P134
이교도 철학자들은 활동 특히 지성의 활동을 최고의 신적인 활동으로서 찬미했다. 기독교도들은 고통을 신성화하고 그것을 신 안에 집어넣었다. 순수활동으로서의 신이 추상적인 철학의 신이라면, 기독교도들의 신인 그리스도는 순수열정이며 순수한 고통이다. 기독교도는 결코 초인간적인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는 인간의 허약함을 신성화한다. 이교적인 철학자는 자기아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받았을 때조차도, "나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적어도 성경의 그리스도(성경 이전의 그리스도나 성경에 없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배를 마신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가능하다면 이 잔이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외친다. - P139
기독교는 고통의 종교다. 우리가 오늘날 아직도 모든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상은 우리에게 구원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람, 고통받은 사람을 제시할 뿐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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