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옛 도시를 걷다 - 오랜 기억을 간직한 옛 도시에서 마주한 시간과 풍경
여홍기 지음 / 청아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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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행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새로운 장소, 낯선 풍경, 처음 접하는 음식, 특별한 체험 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익숙한 여행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행을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사전적 정의 속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끄집어내며, 고대 문명의 흔적이 살아 있는 도시들을 직접 발로 걸으며 시간과 인간의 삶을 만나는 여정을 안내한다. 이 여정은 단순한 사실의 전달과 정보의 나열에서 삶과 문명,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루시(Lucy)’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인체의 잠재력을 100% 끌어올리며 인류의 기원을 향해 시간을 역행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시간의 본질을 마주한 순간, 그 눈빛과 표정에는 경이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그것은 단지 공상 과학적 상상이 아니라 이 책이 말하는 여행의 본질과도 닮았다. 나 역시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 고대 도시의 골목을 걷는 상상을 하며, 공간을 넘어 시간 속을 걷고, 역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곳에 살아 숨 쉬는 삶의 흔적을 느껴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저자는 시안, 볼루빌리스, 카르카손, 케스키크룸로프와 같이 이름조차 생소한, 그러나 인류 문명의 전환기를 품은 도시들을 직접 걸으며 풍광을 촬영하고 시간을 역사라는 공통분모로 엮었다.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걷는행위를 통해 그는 도시를 보는 방식을 근본부터 바꾼다. 단순히 관광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간직한 기억과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전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멈추고, 바라보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유의 과정임을 저자는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자동차 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더하여 발끝으로 닿는 도시의 디테일은 살아 있는 역사이며 생생한 이야기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도시의 겉모습보다는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이다. 도시 하나하나에 깃든 전쟁, 신화, 종교, 공동체의 흔적들을 발로 밟고 눈으로 담으며, 독자에게는 풍경이 아닌 기억으로서의 도시를 건넨다.

 

문득, 사진으로만 보는 오래된 도시들의 풍광이 아쉽게 다가온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기자기한 골목과 유서 깊은 유적들을 보면 실제로 걸어보지 못한 그곳을 나도 한 번 직접 가 보았으면 하는 가벼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책이 전해주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다. 고대 신전의 기둥 하나, 오래된 돌길 위 마차 바퀴 자국,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 하나조차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머금은 이야기이며 우리가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이다. 저자는 마치 친구처럼 혹은 시인처럼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전해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하나의 실타래를 손끝으로 풀어내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왔던 느림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무엇이든 짧은 시간 내에 재빨리 해치우는 게 미덕이 된 시대에, 저자는 천천히 걷는 여행을 통해 삶의 속도를 재정의하려 한다. 허름한 골목길, 이름 없는 카페 앞의 화분 하나, 색 바랜 표지판몇 군데 되지도 않는 여행지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때로는 웅장한 유적보다도 그러한 사소한 장면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그 울림은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도시를 걷는다는 행위가 단지 과거를 마주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강조한다. 낯선 도시의 오래된 골목에서 마주치는 것은 결국 현재의 나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정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긴 시간의 층위 속에 놓여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연속성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또한 과거를 오늘의 일상으로 불러오는 행위다. 디지털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자주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그러나 도시의 구석구석에선 인간이 쏟은 노력과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그런 도시들은 현대 도시가 잃어버린 인간적인 감성과 여유를 품고 있다. 작은 벽돌 하나에 담긴 일꾼의 손길, 이름 모를 석공의 숨결 등 모두 과거의 삶이 현재와 만나는 가장 따뜻한 흔적이다.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디지털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아날로그적 감성과 아름다움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도시의 표면만을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을 느끼는 여행. 그렇게 천천히, 깊이 걷는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나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공간을 넘어 시간을 걷는 일이자, 그 속에서 나 자신과 조용히 대화하는 시간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큰 수고로움 없이도 세계 각지의 스물한 군데 도시들을 여유롭게 걸어보시길 바란다.

 

#인문 #도시의역사 #문화유적 #세계옛도시를걷다 #청아출판 #도시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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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옛 도시를 걷다 - 오랜 기억을 간직한 옛 도시에서 마주한 시간과 풍경
여홍기 지음 / 청아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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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겉모습만 보고 소비하는 여행을 즐기셨다면, 이번에는 도시에 얽힌 역사를 배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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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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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국기라는 단어에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형상은 국기 자체가 아닌,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주로 식사 시간에 즐겨 사용하던 플라스틱 재질의 튼튼하고 키 낮은 접이식 책상이다. 책상 윗면에는 한글 자모와 구구단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테두리를 돌아가며 세계 각국의 국기가 색색이 그려져 있어 누가 봐도 어린이 조기 학습용 다용도 식탁(?)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어 버린 아이들이 아직도 나라별 국기를 구별할 줄 아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기에 대한 개념이나 배경지식이 없던 취학 전 아이들에게 국기는 마냥 이쁘고 화려한 장식용 문양으로 보였을 거라는 짐작뿐이다. 우리는 간혹 TV에서 세계 각국의 국기를 줄줄 외우는 신동(주로 남자 아이)들을 보는데, 이 책의 저자도 아마 그런 부류였으리라 짐작된다. 이 책은 그 신동이 자라 국기 덕후가 된 저자가 세계 각국의 국기와 그 상징에 담긴 역사와 의미를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기들로부터 출발하여, 그 기원이 어떻게 다른 국기들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다.

 

국기가 국가와 국민을 상징하고 그 자체로 정체성을 띠며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인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국기의 최초 유래는 주로 군사적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흔히 보이듯, 고대로부터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서는 깃발 사용이 필수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 제국의 군기인 아퀼라(Aquila), 로마 군단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을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기를 넘어 국가의 위엄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국가들에서도 이 전통이 이어져 국가의 공식적인 상징물로 정착하게 되었다. 또 다른 좋은 사례인 영국 국기 유니언잭은 잉글랜드의 성 조지 십자가, 스코틀랜드의 성 안드레아 십자가,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 십자가 등 여러 왕국의 깃발이 통합된 형태로, 군사적 목적과 왕국의 통합을 상징하여 발전한 대표적 사례이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각 민족 국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 국기를 적극 활용했다. 특히 18~19세기 독립운동과 혁명 운동의 영향으로 국기를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으로 채택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청홍의 음양과 팔괘를 사용한 우리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필요하여 제작되었다. 한국인의 철학과 전통을 담아 국가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상징하는 깃발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오늘날 유럽 지역 다수의 국가가 비슷한 색상과 배열을 지닌 국기를 사용하고 있어 가끔 혼란스럽기도 하다. 예컨대 프랑스의 하양, 파랑, 빨강 삼색기는 이탈리아의 빨강, 흰색, 초록색 삼색기로 이어지고 다시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삼색기로 확산되었다. 각 장은 특정 국기를 중심으로 시작하며 그 국기가 어떻게 다른 국기들과 연결되는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 일부 인근 국가가 서로 비슷한 삼색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의 민족주의 혁명과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삼색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각각의 파랑-하양-빨강 색상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며, 혁명의 이상을 담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고 혁명 이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 삼색기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국기에는 또한 각 국가의 역사와 문화, 정신적 가치가 함축된 상징들이 담겨 있다. , , 태양, 독수리, 사자, 십자가, 귀족 집안의 전통 문장 등 독특한 문양들은 그 국가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먼저, 별은 희망과 독립, 통합 등을 상징한다. 미국의 국기에 등장하는 50개의 별은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단결을 의미하며, 유럽연합의 별들은 통합과 화합을 나타낸다. 또한 터키의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며 희망과 번영을 염원한다. 속칭 다윗의 별로 불리는 이스라엘 국기의 육각형 별은 두 개의 정삼각형이 서로 겹쳐진 모양으로, 위쪽은 하늘(), 아래쪽은 땅(인간)을 상징하며 두 삼각형이 결합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결합, 조화, 균형을 나타낸다. 역사적으로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 식별용으로 사용한 고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달과 태양은 생명력과 지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국기 중앙의 태양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며, 유독 한국인에게 군국주의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일본 국기의 붉은 태양은 밝은 미래와 강한 국가 의지를 의미한다. 동물 중 독수리와 사자는 강력한 힘과 권위를 표현한다. 독일,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문장에 나타나는 독수리는 강력한 국가의 권력과 독립성을 상징한다. 영국의 국장에 등장하는 사자는 용기와 왕권의 권위를 드러낸다. 십자가는 주로 기독교 국가에서 나타나며, 그리스, 스웨덴, 영국 등의 국기에 보인다. 이는 종교적 정체성과 더불어 역사적 전통을 상징한다. 귀족 가문의 문장은 역사적 권위와 지속성을 나타내며, 스페인 국기의 문장은 과거 강력했던 왕실의 권위를 여전히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국기를 통해 국민성을 짐작할 수 있을까? 사례를 들어보자면, 캐나다의 단풍잎은 자연 친화적이고 평화로운 국민성을 시사하며, 스위스 국기의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십자가는 국민의 중립성과 정확성, 간결성을 반영한다고 평가된다. 또한 브라질 국기에 등장하는 질서와 진보라는 문구는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와 국민의 열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태극기의 태극 문양은 음양 사상에 기반한 우주의 조화와 균영을 상징하며, 건곤감리 4괘는 각각 천지인화를 나타내어 조화를 중시하는 상생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물론 독자들은 상징성을 전체의 일반화로 수용하기보다는 국민 다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로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이처럼 국기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가치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기호이며, 국민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되었으며 현재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출간되고 있다. 저자는 각 국기의 기원과 그 영향을 받은 다른 국기들을 연결 지어 설명함으로써 국기가 단순한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집합체임을 보여준다. 책에 포함된 200개 이상의 다양한 사진 자료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특히 기존 국기의 대안 디자인을 소개함으로써 국기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캐나다 국기의 대안 디자인은 붉은 단풍잎이 두 개의 파란 띠 사이에 있는데 이들은 각각 대서양과 태평양을 상징한다. 이 책은 역사, 정치,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상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유익한 읽을거리다. 국기를 통해 세계의 역사를 탐구하고픈 이들에게 추천해 드린다.

 

저자 소개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Dmytro Dubilet)는 우크라이나의 금융 기술(Fintech) 기업가이자 전직 정치인으로, 디지털 혁신과 공공 서비스 개선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85년생 만 40세로 런던 비즈니스 스쿨 MBA (2012) 졸업생이다. 아버지가 CEO인 프리밧방크(PrivatBank)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최고정보책임자(CIO)로 재직하며 디지털 전환을 주도했다. 2015, 공공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통해 부패를 줄이고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비영리 플랫폼인 iGov를 개발했고 2017, 우크라이나 최초의 모바일 전용 은행인 모노뱅크를 공동 설립하여 9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했다. 러시아와의 전쟁 이전인 2019년 올렉시 혼차루크 총리 내각에서 내각 장관으로 임명되어 약 8개월 정도 재직했다. 2020, 런던에 본사를 둔 핀테크 기업을 설립하여 인도, 베트남, 중앙아시아 등 신흥 시장에서 디지털 은행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3년 베트남 OCB 은행과 협력하여 디지털 은행인 리오뱅크를 출시했다. 2016, 파이낸셜 타임스와 구글이 선정한 '뉴 유럽 100'에 포함되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15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한 영향력 있는 블로거로 활동 중이다.

 

#깃발 #상징의기원 #깃발의역사 #펄럭이는세계사 #국기 #삼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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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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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덕후가 알려주는 국기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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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는 왜 실패하는가 - 트럼프 2.0, 미국이 만드는 세계의 명암
문정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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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질 몸매에 망토를 걸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퍼 히어로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억압받는 이들을 구제하며, 혼란 속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마블과 DC의 화려한 스크린 속 영웅들은 세계 무대 위에서 미국이 자처해온 외교적 역할을 은유한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종종 그 '영웅 서사'에 걸맞지 않은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빅 브라더'로서의 과도한 개입, 이중잣대, 자국 이익 우선의 정책은 오히려 국제사회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수많은 외교적 실패를 초래해왔다.

 

미국의 외교는 자주 '인권 보호',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를 앞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은 수많은 국가에서 개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어왔다. 베트남 전쟁,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주둔은 그 대표적 사례다. 초기에는 악의 축에 맞선 정의의 전쟁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본질은 자국 중심의 전략적 계산임이 드러났다.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 정치적 공백, 극단주의의 확산은 해방이 아닌 혼란을 낳았다. 수퍼 히어로의 망토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세계는 미국을 구원자가 아닌 간섭꾼으로 보기 시작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에는 눈에 띄는 이중잣대가 존재한다. 인권을 이유로 특정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한편, 자국의 이익과 결부되었을 때 침묵하거나 오히려 그 정권을 지원한다.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국가들과의 밀착된 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국제사회의 비판을 외면한다. 이러한 선택적 정의는 미국의 외교적 신뢰를 훼손하며, 세계 질서의 수호자가 아닌 '편파적 심판자'라는 이미지를 부각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등장한 빅 브라더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존재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망, 동맹국조차 대상으로 삼은 스파이 활동, 경제 제재를 통한 압박 외교는 이와 흡사하다. 기술과 정보력을 앞세운 이러한 방식은 동맹국과의 신뢰를 위협하고 신냉전적 긴장을 심화시킨다. 강대국의 책임 있는 외교보다는 패권을 유지하려는 집착에 가까운 이러한 접근은 오히려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된다.

 

미국 외교의 특징을 말하느라 서설이 길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외교 분야의 '어벤져스급' 책이다. 강렬한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데,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은 왜 외교만 했다고 하면 이리저리 삐걱대고 국제사회에서 비난받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에 딱 맞는 답을 던진다. 국제정치 분야에서 이름난 석학 11명이 모여 미국 외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시원하게 파헤친다. 읽다 보면 답답했던 속이 좀 뚫리는 기분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른다. "도대체 미국은 왜 외교에서 자꾸 실패를 반복할까?" 이 물음에 답하려고 저자들은 크게 세 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미국 외교의 민낯을 들춰낸다.

 

1. 북한 핵 문제: 고집불통 외교의 한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역시 북한 핵 문제다. 국제사회에서 언제나 뜨거운 감자인 이 주제에 대해, 로버트 갈루치 전 6자회담 대표는 미국이 제재와 압박만 고집하다가 결과적으로는 '핵 없는 북한'이 아니라 '핵을 가진 북한'을 만들어냈다고 쓴소리를 날린다. 너무 강경하게만 나가다 보니 북한을 점점 더 구석으로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비는 법이다.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계속 놓쳤다"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결국 미국 외교는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외교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일이 반복됐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같은 동맹국들은 이제 미국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자체적인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우리도 눈치만 보지 말고 센스 있는 외교 한번 해보자는 거다.

 

2. 미국 외교 시스템: 고장이 반복되는 낡은 기계

두 번째로는 미국 외교 시스템 자체의 문제다. 찰스 쿱찬 교수는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실수가 계속되는 이유가 단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낡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 외교를 자꾸 같은 자리에서 멈추는 낡은 자동차에 비유한다. 월터 미드는 보수 외교정책이 정통 보수, 네오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까지 각종 이념이 뒤섞인 채 방향성을 잃었다고 말한다. 존 아이켄베리 교수는 미국이 자유주의 질서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다가 오히려 신뢰를 잃었다며, 이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미국 외교는 단순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더 유연하고 실용적인 개혁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3. 글로벌 현안에 발목 잡힌 미국 외교

세 번째 이슈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이다. 미중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사태, 기후변화까지. 수잔 손튼 전 국무부 차관보는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 구도를 너무 키우다 보니 문제 해결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쪽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칼 아이켄베리 전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사태를 다루는 방식에서 윤리적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도 점점 힘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 비노드 아가왈 교수는 미국 외교가 국내 정치에 너무 휘둘리다 보니 제때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란다 슈뢰어스 교수는 기후 문제 대응에서도 미국이 리더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요약하자면, 미국은 글로벌 리더라는 이름에 걸맞는 외교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다극화, 복합위기, 문화적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과거처럼 한 국가가 정의를 독점하거나, 모든 문제에 개입하려는 접근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국이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수퍼 히어로적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국가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존중하며, 자신 역시 국제 규범에 의해 평가받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는 더 이상 자칭 영웅이 아니라, ‘겸손한 파트너를 원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단순히 "미국 외교가 문제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대안을 함께 제시한다는 데 있다. 각 분야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해결 방향까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미국 지도자들에게만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니다.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도 "이제는 무작정 미국 따라가기만 하지 말고, 우리만의 전략을 짜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교는 결국 자기 이익을 지키는 전략 게임이다. 유쾌하면서도 뼈 있는 말들로 가득한 이 책을 국제정치나 외교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하다. 미국 외교의 실패를 진단하면서도 비판에 그치지 않고 방향까지 제시해주는 이 책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외교 길라잡이라고 할 수 있다.

 

#메디치 #문정인 #미국외교는왜실패하는가 #국제정치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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