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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는 왜 실패하는가 - 트럼프 2.0, 미국이 만드는 세계의 명암
문정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5년 3월
평점 :
근육질 몸매에 망토를 걸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퍼 히어로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억압받는 이들을 구제하며, 혼란 속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마블과 DC의 화려한 스크린 속 영웅들은 세계 무대 위에서 미국이 자처해온 외교적 역할을 은유한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종종 그 '영웅 서사'에 걸맞지 않은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빅 브라더'로서의 과도한 개입, 이중잣대, 자국 이익 우선의 정책은 오히려 국제사회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수많은 외교적 실패를 초래해왔다.
미국의 외교는 자주 '인권 보호',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를 앞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은 수많은 국가에서 개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어왔다. 베트남 전쟁,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주둔은 그 대표적 사례다. 초기에는 ‘악의 축’에 맞선 정의의 전쟁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본질은 자국 중심의 전략적 계산임이 드러났다.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 정치적 공백, 극단주의의 확산은 ‘해방’이 아닌 ‘혼란’을 낳았다. 수퍼 히어로의 망토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세계는 미국을 구원자가 아닌 간섭꾼으로 보기 시작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에는 눈에 띄는 이중잣대가 존재한다. 인권을 이유로 특정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한편, 자국의 이익과 결부되었을 때 침묵하거나 오히려 그 정권을 지원한다.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국가들과의 밀착된 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국제사회의 비판을 외면한다. 이러한 선택적 정의는 미국의 외교적 신뢰를 훼손하며, 세계 질서의 수호자가 아닌 '편파적 심판자'라는 이미지를 부각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등장한 ‘빅 브라더’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존재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망, 동맹국조차 대상으로 삼은 스파이 활동, 경제 제재를 통한 압박 외교는 이와 흡사하다. 기술과 정보력을 앞세운 이러한 방식은 동맹국과의 신뢰를 위협하고 신냉전적 긴장을 심화시킨다. 강대국의 책임 있는 외교보다는 패권을 유지하려는 집착에 가까운 이러한 접근은 오히려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된다.
미국 외교의 특징을 말하느라 서설이 길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외교 분야의 '어벤져스급' 책이다. 강렬한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데,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은 왜 외교만 했다고 하면 이리저리 삐걱대고 국제사회에서 비난받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에 딱 맞는 답을 던진다. 국제정치 분야에서 이름난 석학 11명이 모여 미국 외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시원하게 파헤친다. 읽다 보면 답답했던 속이 좀 뚫리는 기분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른다. "도대체 미국은 왜 외교에서 자꾸 실패를 반복할까?" 이 물음에 답하려고 저자들은 크게 세 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미국 외교의 민낯을 들춰낸다.
1. 북한 핵 문제: 고집불통 외교의 한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역시 북한 핵 문제다. 국제사회에서 언제나 뜨거운 감자인 이 주제에 대해, 로버트 갈루치 전 6자회담 대표는 미국이 제재와 압박만 고집하다가 결과적으로는 '핵 없는 북한'이 아니라 '핵을 가진 북한'을 만들어냈다고 쓴소리를 날린다. 너무 강경하게만 나가다 보니 북한을 점점 더 구석으로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비는 법이다.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계속 놓쳤다"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결국 미국 외교는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외교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일이 반복됐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같은 동맹국들은 이제 미국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자체적인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우리도 눈치만 보지 말고 센스 있는 외교 한번 해보자는 거다.
2. 미국 외교 시스템: 고장이 반복되는 낡은 기계
두 번째로는 미국 외교 시스템 자체의 문제다. 찰스 쿱찬 교수는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실수가 계속되는 이유가 단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낡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 외교를 자꾸 같은 자리에서 멈추는 낡은 자동차에 비유한다. 월터 미드는 보수 외교정책이 정통 보수, 네오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까지 각종 이념이 뒤섞인 채 방향성을 잃었다고 말한다. 존 아이켄베리 교수는 미국이 자유주의 질서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다가 오히려 신뢰를 잃었다며, 이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미국 외교는 단순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더 유연하고 실용적인 개혁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3. 글로벌 현안에 발목 잡힌 미국 외교
세 번째 이슈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이다. 미중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사태, 기후변화까지. 수잔 손튼 전 국무부 차관보는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 구도를 너무 키우다 보니 문제 해결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쪽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칼 아이켄베리 전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사태를 다루는 방식에서 윤리적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도 점점 힘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 비노드 아가왈 교수는 미국 외교가 국내 정치에 너무 휘둘리다 보니 제때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란다 슈뢰어스 교수는 기후 문제 대응에서도 미국이 리더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요약하자면, 미국은 글로벌 리더라는 이름에 걸맞는 외교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다극화, 복합위기, 문화적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과거처럼 한 국가가 정의를 독점하거나, 모든 문제에 개입하려는 접근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국이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수퍼 히어로적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국가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존중하며, 자신 역시 국제 규범에 의해 평가받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는 더 이상 ‘자칭 영웅’이 아니라, ‘겸손한 파트너’를 원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단순히 "미국 외교가 문제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대안을 함께 제시한다는 데 있다. 각 분야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해결 방향까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미국 지도자들에게만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니다.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도 "이제는 무작정 미국 따라가기만 하지 말고, 우리만의 전략을 짜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교는 결국 자기 이익을 지키는 전략 게임이다. 유쾌하면서도 뼈 있는 말들로 가득한 이 책을 국제정치나 외교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하다. 미국 외교의 실패를 진단하면서도 비판에 그치지 않고 방향까지 제시해주는 이 책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외교 길라잡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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