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 도스토옙스키부터 하루키까지, 우리가 몰랐던 소설 속 인문학 이야기
박균호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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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사회생활 출발점을 스무 살이라 치고, 그가 얼추 삼십 년 동안 무엇인가 한 가지에 천착한 결과물(여기서는 책이 되겠다)을 접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일면식도 없던 사이지만 나이, 대학의 전공, 직업,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점까지 나와 많이 닮은 듯하니 없던 친근감이 생기는 것 같다면 좀 억지일까. 심지어 그의 책을 통해 SNS상으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닮은 점이 좀 있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주장하기에는 좀 뜬금없다. 엄청난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다져진, 내가 미처 몰랐던 그만의 넘사벽내공까지 퉁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와는 정반대로 나는 어렸을 적 내 딸아이에게 머리맡 책 읽기를 해준 적이 다섯 손가락에도 안 꼽히고, 책은 읽었으되 고전 소설보다는 최신 정보의 대중 서적 위주였으며 읽은 책은 십 수년간 책장에 전시용으로 묵혀두었다가 이사할 때가 되어서야 급히 처분했던 적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20권의 소설 가운데 겨우 <분노의 포도> 한 권을 그나마도 학부생일 때 읽어봤을 뿐이라 예시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참으로 난망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누리는 즐거움과 함께 역사, 사회, , 종교,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문화를 읽는 즐거움도 누리게 해주며, 좋은 소설 한 권을 읽으면 뛰어난 인문 서적 여러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인문 서적이라면 나 역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순간, 머릿속에 아차~! 싶은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로 인해 변변한 책 한 권 읽지 못하던 아내에게 이제는 책 좀 읽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듯 사 모은 책을 보란 듯이 책장에 꽂아놓고 무언의 시위를 벌이며 못난 모습을 보였다. 제대로 소화도 못 시킬 책을 그렇게 많이 사 모으면 무얼 하나.

 

사실 아내는 이미 10대 문학소녀 시절 수백 권의 소설책을 섭렵한데다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하여 사회경력도 앞선 은둔 고수였으니, 어눌한 영어 몇 마디 주워섬길 줄 안다고 뻐기면서도 감정에 쉽게 휩쓸리기 일쑤이던 나는 이순신 장군 앞의 일개 왜장에 불과한 셈이었다. 앞서 말한 넘사벽 수준을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저자는 때로 사소한 일로 옆지기에게 혼쭐이 나거나 특유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등 마치 나의 결혼 생활을 보는 듯한 상황을 주저 없이 공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 사는 4 k 모습인가.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브로맨스를 유발하는, 유부남들의 키워드는 역시 동병상련인가 싶다.

 

문학 장르가 대개 그렇긴 하지만 소설이야말로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예술적으로 가장 잘 승화시킨 도구이다. 어느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가장 큰 화두를 이야기로 풀어냈음을 말한다. 희로애락과 같은 인간의 감정, 사상, 역사 등 전반적인 문화를 읽어내는 핵심어를 담고 있으므로 작품에 대한 이해는 곧 작가가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읽어낸다는 뜻이다. 세월이 흘러도 고전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인간 본성과 내면에 대해 이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 아닐까.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었다.

1역사의 단면을 다룬 벽돌책 도전하기에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가 죄수들의 유형지로 선택된 것은 험지 개척을 위한 국가 시책 때문이었으며, 1930년대 농부들이 미국 서부를 향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이유는 대공황 때문이며, 춘향전에 등장하는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 역시 오늘날의 입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과거의 유물로 남은 사무라이들이 칼을 버린 것은 시대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등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2복잡한 인간의 내면의 소우주 이해하기에서는 예술의 불멸하는 재료이자 가장 강력한 인간 본성인 질투, 음식, 금서, 영국의 사교계, 도박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댄디즘으로 압축되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풍미했던 무도회가 사실은 귀족들로 대표되는 상류사회의 정략적 결혼과 연계를 위한 치열한 각축장이었음을 알게 되며,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3아는 만큼 빠져드는 일상의 인문학에서는 신의 대리인인 동시에 악마의 상징으로 그려진 고양이, 조상은 야생동물 늑대였으나 인간에게 반려동물로 길든 개, 아내 없이는 살아도 술에는 너무나 진심이었다가 결국 요절한 작가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책 수집가들의 로망인 고서점, 종교에서 시작하여 문화가 된 요가, 본래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다이어트, 신들이 머물다 간 장소이자 고객이 곧 규칙이라는 호텔 등 일상적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작품을 소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여나 직업상 밥벌이에 도움이 될까 봐 최근 지식의 흐름과 동향을 파악한답시고 그간 심리학이나 과학, 어학, 자기 계발과 같은 실용 서적을 위주로 접해왔지만, 생각보다 책 내용은 오래도록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유토피아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일정한 이야기의 기승전결 형식을 갖춘 고전 작품의 내용과 작품이 주는 권선징악 교훈이 더 잘 생각난다. 비록 한 장면 한 페이지를 모두 다 떠올리지는 않지만, 우리는 단 한 번만이라도 작품을 접하게 되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전체 줄거리를 어려움 없이 회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지니는 위력이 아닐까.

 

그런데 갑자기 퇴직금 중간 정산도 아니고 왜 하필 저자가 말하는 나이는 오십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생 백세 시대의 중간을 맞아 이십 대에 읽었던 문학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수십 년간 나의 삶에 일어났던 일과 비교해보는 경험을 통해 새로이 다가오는 느낌을 제대로 가져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소설에서 전개되는 줄거리를 감상하기 바쁘던 시절이 이십 대였다면, 인생의 진득한 체험을 통해 소설이 인생 같고 인생이 소설 같아지는 때가 오십 대이다. 스무 살 가슴 뛰는 낭만은 아니어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여생을 채비할 수 있다. 인생이라는 고지를 향해 넘어지고 엎어지며 정신없이 올라왔다면, 이제부터는 넘어지면 일어서기가 만만치 않으니 예전보다 더 주위를 살펴 가며 내리막을 향해 갈 때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가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자긍심과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또다시 가야 한다는 서글픔이 겹쳐온다. 이쯤 되면 소설과 현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이 이러했을까를 나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순간이다. 하긴, 인생의 그럴싸한 모든 일이 다 소설의 소재 아니었나.

 

결국, 오십에 다시 읽는 고전 소설은 예전과 사뭇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조금 늦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이제라도 읽어 볼 생각이다. 칠십 대가 되어 오십 대에 읽지 못한 걸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십나는이제다르게읽는다 #박균호 #갈매나무 #인문학 #소설 #문학 #인문 #인문에세이 #책 #독서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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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2-08-01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야 말로 집필을 하셔야 할 정도로 필력이 탁월하십니다. 자세하고 따뜻한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샛별클럽연대기 - 조용한 우리들의 인생 1963~2019
고원정 지음 / 파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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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한국동란이 끝나고도 십여 년이 흘렀지만 남과 북이 한참 서슬 퍼런 이념의 냉전 시대를 관통하던 1963년부터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의 오늘에 이른다. 제목이 연대기인 만큼 일어난 일을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저자보다 한참 늦게 태어나 75년에 국민학생이 된 필자에게 이 작품 도입부의 시대적 배경은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1963년이면 아무리 인심 후하다는 시골에서도 막걸리 술안주로 대통령을 흉보던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돌아오더라도 아주 몹쓸 지경이 되곤 하던 때다. 국민학생은 시험을 쳐야 중학교에 진학했고, 집안의 장정 한둘쯤은 국가 시책으로 월남에 파병되는 누군가의 삼촌이자 아들이자 남편이었으며, 극장에서는 상영작 앞머리마다 대한늬우스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고등학교에는 예비역 장교가 상주하며 교장 부럽지 않은 위세를 부렸고 유사시 남학생은 총알받이로, 여학생은 위생병으로 전방에 투입될 운명이었다. 북한의 가정에서는 김일성 사진을, 남한의 가정에서는 박정희의 사진을 안방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올리던 때였다.

 

가장 큰 도시인 서울에서도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를 어기다 걸리면 파출소에 잡혀가 유치장 찬 바닥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했다. 장발족 청년과 미니스커트 처녀는 단속하는 경찰을 피해 다녀야 했고 저녁 여섯 시면 어김없이 울리는 애국가 사이렌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서 있곤 했다. 그러던 시대에 구국의 열사 김재규 장군의 총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러지자 철부지 동생은 다음 박정희는 누가 하느냐고 물었다. 17년간의 장기 독재로 그 기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파월 장병들에게 지급할 월급을 중간에 가로채 비자금을 만들어 후대에 남겼고, 낮에는 새마을 운동에 한창인 농촌에서 모내기에 막걸리를 걸치는 성군이었지만 밤이면 딸 같은 여대생을 곁에 앉히고 양주를 마시다 심복에게서 최후의 심판을 받았다. 민간에 정권 이양의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을 가업으로 만들려던 군부독재 유신은 그렇게 무너지는 듯하더니 또다시 신군부에 의한 독재를 이어갔다. 물질에 매몰되고 반공 이념에 피폐해진 정신세계는 생각 못 하면서 웬만큼 먹고살게 해주어 기본권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며 아직도 박정희와 그의 딸을 그리워하더니, 군부가 사라지자 이제는 부자를 편들며 왜 나는 늘 가난한가 한탄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듯 하 수상한 시절을 함께 출발했지만 수십 년 세월이 지나 생긴 틈새를 함께 메웠거나 더 이상 메울 수 없게 된 한 동네 초등학교 아홉 동창생과 이들을 지켜보며 세월의 증인으로서 기록을 써 내려온 주인공 문인호의 인생을 일인칭 시점에서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집안 내력을 이해하려면 가계도를 그려가며 요약할 필요가 있을 만큼 많은데, 저자는 이를 전설이라 칭한다. 모두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설정하였다.


초등학교 강창성 선생의 제안으로 이들 동창생은 샛별 클럽을 만들게 되고, 졸업을 기념하여 10년마다 학교 운동장을 찾기로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다섯 번째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못한다. 강창성 선생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 동창들의 어린 시절 순수함은 일찌감치 이념의 희생자가 된다. 예컨대 일명 반공 소년으로 웅변대회에서 열변을 토하던 장윤태는 자신들의 선생님과 친구들을 빨갱이라 고발하여 샛별 클럽을 와해시키고, 커서는 공안 검사가 되어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동창의 죽음에 일조했으나 목회자로 거듭난다. 군 장교가 된 박광도는 정치 사상범으로 몰린 의리의 주먹파 김광춘을 죽음으로 몰았으나 이후 정계에 발을 디뎠다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수감 생활을 마치고는 고향의 발전에 공헌한다. 천재라 칭송받던 한요섭은 머리가 뛰어난 만큼 비범한 삶을 살지만 제 생각과 재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고민 끝에 자동차로 공덕비를 들이받는 정면 대결을 택한다.

 


한요섭의 죽음에 이어 주인공 문인호는 군대 시절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사병 문인오의 사망에 연루되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사건의 진실을 부정 또는 묵인함으로써 역설적인 편안함에 몸서리친다. 목숨을 부지하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되는 친구가 거의 없는, 이런 격변의 시대에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기록을 전달하며 역사의 증인으로 남는다. 주인공의 지배적인 감성은 누군가 자기 뜻을 펼치게 되면 반드시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읽힌다. 그러나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그가 평생을 짝사랑하던 여자 동창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는 드디어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동창을 통해 파란만장한 인생의 보상인 인정과 구원을 얻는다. 오랜만에 문단으로 돌아온 고원정 작가의 흡입력 넘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에 가려 정작 국민은 대우받지 못했던 해방 이후 세대의 애환과 그 시절을 관통했던 주인공의 발자국을 통해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선배 세대의 아픔을 진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소설 #샛별클럽연대기 #민주화 #근대화 #고원정 #과거를돌아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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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클럽연대기 - 조용한 우리들의 인생 1963~2019
고원정 지음 / 파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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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는 언제나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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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
리처드 레티에리 지음, 변익상 옮김 / 애플씨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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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이상이 느껴질 때, 우리는 병원을 찾아 원인을 규명하려 든다. 간단한 혈액과 소변부터 시작하여 심전도, X, CT, 그래도 안 되면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까지 동원한다. 원인을 찾으면 치료할 방법이 있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추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 자신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타인을 해치면 사회와 격리되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사회악적인 존재가 된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만나 1,000건 이상의 범죄를 조사하고 증인으로 활동하는 법의학 심리학자이다. 범죄 행위를 일으킨 사람들의 정신적 장애를 파헤치면서, 그는 인간의 건강하고도 파괴적인 힘의 원동력으로 다이모닉daimonic’ 개념을 사용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대변하는 이것은 누구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잔혹함과 숭고함이 함께 존재하는 역설적인 잠재력, 다이모닉의 개념을 소개한다. 이 용어의 기원은 그리스어 다이몬(사람을 이끄는 작은 신)과 라틴어 데몬(정신)에서 왔으며, 악마와 악당에게 어울릴법한 영적인 힘 또는 천재에 의해 영감을 받거나 동기가 부여됨을 의미한다. 심리학에서는 개성을 향한 억제할 수 없는 추진력을, 문학에서는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밀어 넣어 자멸 또는 자아 발견으로 이끄는 역동적인 불안을 뜻하기도 한다. 2부에서는 특정적인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전문가로서 도달한 법의학적 절차를 설명하면서, 범죄자들의 풍부한 인간 본성과 그로부터 비롯된 분노, 기만, 체면 등을 폭넓게 살펴본다. 3부에서는 이중적인 다이모닉의 본질을 다루면서 인간 본성의 합리성에 기초한 법률 체계가 때로는 부당할 수 있음을 말하며 형사사법제도의 인간 친화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우리의 파괴적 행위는 대부분 인식할 수 없는 무력감, 절망감, 혼란에 대처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감정 상태가 높아지면 적응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듯한 감각이 뒤따르며, 우리를 끌어당기고 뒤흔드는 강한 힘이 된다.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열정이 솟구쳐 자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크고 작은 악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커진다. (27)


이 책은 심리 평가를 받기 위해 범죄 심리학자에게 맡겨진, 극악무도한 범죄로 기소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들어본 적도 없는 생소한 심리 검사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저자는 범인의 사회성, 충동성, 폭력성, 불행한 가정생활, 정신병 등 범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역추적한다. 그는 1급 살인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의 공통적인 속성을 두루 꿰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제거해야 할 사회악이 아닌, 실수를 저질렀을 뿐인 여느 인간으로 대한다. 심지어 그 대상에는 조금 전 살해한 여자들의 시체를 강간한 엽기적인 연쇄 살인범도 포함된다. 그는 누가 자신을 고용했든 최대한 양심적으로 법정에서 증언한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는 저자나 검사 같은 전문가보다는 독자에게 더 큰 파급력을 미치는 듯하다.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라도 그 이면에는 항상 애틋하고 눈물겨운 사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법의학이나 심리학자 책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로르샤흐 잉크 얼룩 검사(https://blog.naver.com/jyooster/222098696728 참조), 조금 덜 알려진 헤어 사이코패스 검사항목, 아주 생소한 위스콘신 카드 분류 검사까지 다양한 심리 검사가 등장한다. 보통 사람들이야 접해 볼 기회조차 없겠지만, 이들 검사지에 아무런 감정적 신체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더 정밀한 검사가 요구된다.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고, 친부모가 영아를 살해하는 엽기적인 범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자는 범인의 모든 스펙트럼을 조사하기 위해 실험실의 현미경 위에 놓인 배양 접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법의학 심리학자들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임상 기록을 넘어 피고인들과 그들의 복잡한 개인사에 대한 심층적인 심리학적 이해를 돕는다. 동시에 인간 본성의 기본적 힘인 다이모닉이 우리의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능력의 원천이라 주장한다.

 

자아를 인식할 때 우리는 자기의 욕망과 의도에 점차 익숙해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만의 욕망과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 조절을 강화하고 의미를 향상한다. 우리는 심리적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심리적 이해가 있어야 현실 왜곡과 파괴적 행동에 의지하지 않고, 감정적 강렬함뿐 아니라 심지어 가장 악의적인 충동까지도 잘 견뎌낼 수 있다. (49)

 

범행 당시에 피고인이 제정신이었는지 판단할 때, 법의학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사용하는 법적 기준으로 맥노튼 규칙을 적용한다. 이 규칙을 적용하려면 범행 시점에 피고인이 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신질환이 있음을 확실히 입증해야 한다. 범죄심리학자의 주요 역할은 범행 당시 범죄자의 정신상태를 정확하게 판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정신과 광기의 경계는 어디이며 범인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판사로부터 가혹한 징역형을 선고받는 대신 정신병 환자로 인정받으려면 범인은 과연 얼마나 미쳤어야 하는지, 범인의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범죄 행위에 미친 영향은 어느 만큼인지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각각의 사례에 대한 자신과의 관계와 느낌, 범인의 성장 배경, 사회 환경,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의 가능성에 대한 초기 인상과 분석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야기의 매듭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검사지 이름과 그 결과처럼 다분히 분석적인 저자의 화법에 약간의 지루함 또는 무미건조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이 발생하는 강력 엽기범죄 가운데 일부이다. 평범한 독자들이 거의 접할 수 없는 세계로 인도하면서 자자는 자신의 직업적 도전과 보상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다른 범죄 관련 서적과는 다르게 마지막 장에서는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나약함과 사악함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사법 체계와 맞물려 돌아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어쨌든 나는 이성을 가지고 발뺌을 하는 사람보다는 정신적으로 흐트러진 사람을 만나서 상담하는 일이 더 편했다. 무척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37)

 

끝으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법의학 심리학자이자 범죄학자인 저자의 독특한 시각과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들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난생처음 듣는 다양하고 밀도 높은 심리 검사 해석과 이를 따라가기 위한 많은 집중력으로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제시된 사례 가운데 일부는 마치 범죄 현장을 보는 듯 너무 생생하여 때로 소름이 돋기도 한다. 범죄자들의 비열한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탐구하고, 인간 행동의 숨겨진 이면을 이해하는 데 관심 있는 독자라면 법의학 심리학자가 이끄는 여행에 동참해 보시기를 추천해 드린다.

 

#인문 #충동과광기의암호를해독하다 #법의학 #범죄심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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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
리처드 레티에리 지음, 변익상 옮김 / 애플씨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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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악마의 마음을 보았다‘ 미국판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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