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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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새로운 지역에서 거대한 새로운 교구를 시작하는 데는
라투르 주교처럼 섬세한 자질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우아하게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앞으로 다가오는 시절에는 라투르 주교에 대한 어떤 것,
그의 이상이나 그에 대한 추억, 전설 같은 것이 남아 있게 되리라.
윌라 캐더,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pp. 283-284.


낯선 지역으로 들어가 자신들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믿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
선교는 오로지 믿음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개인의 다짐이나 의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기 안에서 무너뜨렸을 때 비로소 선다는 것도.
이 이야기는 그러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두 사람이
새로운,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들이 찾고 있었던 듯한
어떠한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 여정은 인디언 사회와 외래 종교간의 마찰, 화해, 수용으로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성공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첫인상으로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을 거라고 난 섣불리 생각했었다.)
선교사 두 사람이, 그리고 그 이전 세대의 선교활동이 가져온 낯선 믿음의 정착에 대한
시시콜콜하게, 때론 억지스러운 과정을 묘사하는 대신
원시 세계로 흘러 들어온 선한 이들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정한 인간성'에 도달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하나의 믿음을 전하러 왔던 이들은 이미 그곳은 믿음이 깃들어 있는 영적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토착민들에게는 하늘의 뜻을 베풀고, 그들 또한 받았다.
그들의 영혼이 도달한 동산에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했다.
세속의 부나 명예, 안락한 삶을 선택하는 대신 자신만의 신념을 차곡차곡, 오랫동안 성실히 빚어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당시 이 '신세계'를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아니 그러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많은 종교인들의 시선이나 예상과는 달리
사막의 모래폭풍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었던 선교자들은 그곳의 믿음을 '묻혀있는 보물' 로 여겼다.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앞으로 자신들이 심어야 할 새로운 씨앗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 가까웠다.
'물소와 우글거리는 뱀들' 만 있는 미개의 공간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보물이 박혀 있는 그 성스러운 땅에서
오히려 믿음과 신념을 발견한 이들은 '조물주'에 대한 믿음과 올바른 삶의 원칙을 간직하고 있던 '진짜' 인간들을,
어쩌면 본래 신이 의도했고 기대하는 태초의 인류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진심으로 존중하였고 그들의 '신들'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도 가슴을 열었다.
라투르 주교가 동굴 안에서 저편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는 장면은 주교에게 미친 영향만큼이나
나에게도 무척 인상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는다.
이 시점부터 라투르 주교가 인디언들의 사고방식, 특히 그들의 정신 세계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평화롭고 조용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그 선교사는 벌거벗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그는 당시 유럽인들의 욕망과 뚜렷이 대조되는 인디언들의 정신적 가치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이전 선교 선배들처럼 그도 서서히, 하지만 강렬하게 깨달았다.
인디언들의 믿음은 자신이 섬기는 주님이 창조한 질서 안에 오롯이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그곳에 뿌리내려온 믿음은 외부인들로 인해 인위적으로, 이따금씩 강제로 심어진 것이 아니라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아득한 옛날 어느 때부터 자생해온 형태라는 것을.
그는 그 태초의 믿음을 자신의 믿음 위에 아로새겼다.
주교는 눈을 감기 전, 그곳을 온전히 이해하였고, 그곳 사람들의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았다.
주교를 비롯한 이곳의 선교사들이 보여준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모든 면모를 올바르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가짐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행한 믿음의 진정한 형태였다.
'인류는 동산에서 추방되었지만 동산에서 구원받았다(블레즈 파스칼)'
그는 그 동산에서 구원을 받았기에 평온 속에서 육신을 떠날 수 있었으리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라는 제목이 풍기는 장엄함이나 다소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그의 삶은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조용했으며,
소박한 동시에 다른 것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숭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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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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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오랜만에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다.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도롱뇽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곳곳에 인간에 비견하는 능력을 가진 도롱뇽들이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있다고 '전해지는', 인간의 대륙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과연 도롱뇽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인류의 숨통을 조여드는 일이 발생할 때 , 도롱뇽과 관련된 그 일들을 보며

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사건들의 '발단'이라고 하는 도롱뇽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인간들이 이 난리법석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조종한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도롱뇽 신디게이트를 만들어, 회의를 열고 열띤 토론을 하던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도롱뇽들을 본 적도 없고

그들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대목이 있었다.

참 우습고도 아이러니하다.

작품 속 도롱뇽들이 시종일관 '유지한다'고 하는, 소름끼치는 침묵보다 나를 치를 떨게 한 것은 

서로를 죽도로 미워하고, 서로의 등을 밟고 서려는 인류의 더러운 탐욕과 거짓과 간교였다. 

차페크는 인간과 도롱뇽과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전쟁을 말하고 있었다. 자멸의 지름길인 그 싸움을.

 

이 소설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성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야기 부분도 있고, 보고서나 논문과도 같은 측면도 가지고 있으며 신문의 단면을 읽고 있는

느낌도 주는데, 그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떠올리게 한 형식이지만, 훨씬 역동적이었다.

재미있고 강렬하며 충격을 마구 던지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쓰디쓴 여운을 남기는 엄청난 작품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라고 저자가

밝힌 반대로 현실을 확실히, 통렬하게 씹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책이 출간된 1930년대의 국제 정세가 오롯이 녹아 신랄한 맛을 내는 대작!이다.

정치와 경제, 과학, 철학을 포함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현실을 써내려 갔지만

그 현실이 비인간적이고 허무맹랑하며 때론 우스갯소리처럼 들려

도저히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까? 이 책의 내용에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몇 십년 전의 국제 정세를 담고 있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아도

낡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차페크 씨의 통찰력 덕분이겠지.

이때문에 파시즘이 자욱히 깔려 있던 이탈리아와 스페인, 헝가리 그리고 동맹국인 일본,

또한 독일 등지에서 출판되지 못한 것은 당시에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여러 국가에서 금지된 책이었지만 언제나 독자들은 금서에 더 열광하기 마련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명성은 심지어 도롱뇽들마저 타락시키는 법이다. p. 140.

 

무엇보다 사람들이란 자기한테 도움을 주는 편리한 존재를

신비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상해를 가하고 위협이 되는 존재들만 신비로운 법이니까. p. 221.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행복하지도, 평등하지도 않고 모순이란 것은 죄다 모여있는(이 단어도 인간이 만든 어떤 것이지만) 인간사회를 향한 계획된 발길질을 당하였지만 마지막에 그가 조용히 내뱉은 것은 긍정과 희망에 대한 희망이었다. 
각각의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가 그 구질구질한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오기를, 작가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스스로 갇혀 무기력한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오라고 우리에게 넌지시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니 도롱뇽의 살 맛이 금속냄새가 나는 신맛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소름이 돋았다.
 

독서노트를 쓰다보니 블로그에 책 리뷰를 올리는 일이 거의 없는 요즘,

흥분하며 읽은 책이라 이렇게 몇 자 적어 보았다.

차페크의 다른 작품들이 무척 기대되고, 이 작품은 꼭 재독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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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미치광이 펭귄클래식 54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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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하겠다는 거예요?"
"왜? 난 아직 내 삶의 밑바닥까지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거든요…….(…)"
p. 331.


7인의 미치광이
나는 이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목만 보아도 만만한 책읽기가 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서 써야 할지 조금 막막하다.
7인의 미치광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몽상가들이었다.
이러한 미치광이가 구상을 실현하게 되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 것이고,
그 반대라면 아마 계속 꿈만 꾸다 좌절해서 자멸에 이르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를트가 보여주는 이 미치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계획을 실현시키는 데 성공했을까, 아니면 실패했을까?
이 소설의 속편 <화염방사기>에서 이 인물들을 더 자세히 묘사했다는데,
우선 <7인의 미치광이>에서는 결말을 내지 않은 ing 상태라 저 이분법적인 결과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두는 듯하다.
아니면 저 구분조차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Ⅰ. 1㎠ 인간- 에르도사인
"인생이란 게 당신이 늘 말하던 그런 거라면……. 그래, 돌아올 거야…….
꼭 돌아올 거야." p. 91.
'과연 나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냐, 난 살로 살짝 가려진 상처일 뿐이야.
심장이 뛸 때마다 고통에 못이겨 온몸을 뒤틀고 비명을 지르는 상처.' p. 94.
머리카락처럼 왜소해진 영혼, 진흙탕 속에서 꿈틀대는 뱀장어같은 삶…….
그의 삶에서 존재 의식이 차지하는 공간은 1㎠도 안 되는 듯했다.
(…)
유령 같은 삶을 살면서 오직 고통만이 허용된 1㎠의 존재일 뿐이다.
나머지는 부분은 다 죽었다. 아니, 나머지는 그에게 현실의 쓴맛을 보여 준
그 어두운 태반 속에서 시체처럼 뒤엉켜 있었다.(…) p. 95.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진정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될까? p. 117.
왜 그의 인생은 늘 이 모양이란 말인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인생 역시 '그런 꼬락서니'이긴 마찬가지다.
다만 '그런 꼬락서니'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인생에는 그토록 선명하게 찍혀 있는 불행의 낙인이,다른 이들의 삶에서는 흐릿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p. 263.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 지금도 음산한 곳에서 헤매고 있다. p. 265.

공금을 횡령한 잘못으로 에르도사인은 직장을 잃었고, 아내 엘사도 그의 곁을 떠났으며,
자신의 쓰디 쓴 삶마저도 지워져 가고 있었고,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에 대한 믿음도
슬픔으로 얼룩져 점점 상실해 가고 있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사람은 무모해지고 극단적인 감정흐름 때문에
거침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기 십상이다. 바로 에르도사인이 그랬다.
구질구질한 삶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는 당당히 '존재'하고 싶었기에
에르도사인은 범죄를 선택했다.
존재의식이 거의 없는 불행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인물, 에르도사인에게 희망은 사치스러운 감정으로만 느껴졌다.
그때는.

Ⅱ. 위대한 허구를 만드는 게 급선무-점성술사와 목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
결국 인간의 행복이란 오로지 거대한 거짓말,
즉 형이상학적 가상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한 거요.
그러한 가상을 제거하면 인간들은 또 다시 경제라는 환상에 빠져버리게 되지. p. 194.
희망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멋들어진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늘어놓는다면,
그들에게 감언이설로 혼을 쏙 빼 놓는다면,
이 세상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 위험한 몽상가, 점성술가.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저 어중이떠중이들을 위해서
우린 행복이란 요리를 만들어 상에 내놓기만 하면 돼.
그러면 저들은 짐승처럼 몰려들어 게걸스레 먹어치우겠지." p. 198.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뭔가를 믿으려 하고, 또 믿어야 살 수 있다'는 거요.
우리 인간에게 그건 음식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요. p. 203.
70칼로그램의 살덩어리 안에서
바다와 같은 영혼이 요동치고 있는 게 바로 삶이 아닌가?
그 무거운 살덩어리는 하늘 높이 날기를 원해.
우리 안의 모든 게 저 구름 높이 날아가길 바라고 있다고. p. 349.

점성술사를 중심으로 한 이 비밀집단이 꿈꾸고 실행하려는 계획은
정말 허무맹랑한 일들 뿐이다.
사창가를 무슨 산업체마냥 확대시켜 자금을 확보하고,
혁명훈련 캠프를 설치하고, 인류 역사 속 추악한 행위들-화형제도, 파시즘 등- 을
모조리 끌어내 부활시키려는 구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난다.
이 세상은 허구와 갖가지 거대한 거짓말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믿는 점성술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뿌리가 그러한데, 우리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설파하며, 일단 그 계획이 이루어지고 나면 자신들에게
돌아갈 이득이 무엇인지 감언이설로 조직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큰소리로 사람들을 휘어잡으며 이러이러한 것을 해내겠다 라고
말만 할 뿐 정작 몸은 그의 터무니없는 이상을 받쳐주지 못한다.
나는 7인의 미치광이들 중에 점성술사 라는 인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스스로를 인생의 낙오자처럼 여기는 구질구질한 에르도사인과는 달리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이 인물은 높은 이상과 강한 개혁정신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흔들림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인간은 모순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점성술사가 홀로 있을 때 펼쳐 놓은 망상 속에 자리해
이상과 현실 사이를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감정의 변화는
그도 한 명의 미치광이로서 불안으로 인해 수시로 흔들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결단력 또한 단단하지 않는, 그저 한 명의 몽상가임을 알게 해 주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가슴 벅차는 일'이 될 여러 계획을
그는 그저 입으로만 반복할 뿐이다.
한 마디로 점성술사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달아나 버리지.
그래, 바로 그거야.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모두 빈 감자 자루처럼
무력하게 스러져갈 뿐이야.
저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p. 348.
인형들은 마치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처럼 허공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p. 354.

마치 마리오네트를 하는 사람처럼 허구의 공간을 빌려
자신만의 꼭두각시 인형들을 적절히 배치시키고는, 품고 있는 스토리를 실현시키려는 사람.
전지전능한 신이 된 것마냥 자신의 의지대로 시, 공간을 종횡무진하지만
인형극이 끝난 후 조명이 꺼지고 나면 인형과 자신은 어두컴컴한 현실의 방으로 돌아온다.
희열도, 무력감도 모두 존재하는 삶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인간에게는 허구가 필요한 것일까?
Ⅲ. 완벽한 남자를 찾는 이폴리타
시간이 갈수록 상상 속에서 만나는 이런 신기한 인간들은 자꾸만 시시해지고,
차라리 소설 속 인물들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소설 속에서 이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면면을 잘 살펴보면
현실에서는 다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들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다 채우고 나면 이들은 약점을 그녀에게 보여 준 것이 못내
창피한 듯 하나같이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 그녀는 사막을 헤매듯 점점 더 무의미한 삶 속으로 가라앉았다. pp. 320-321.
동시에 그녀는 여자들도 혐오했다.(…)
여자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고생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잠들게 하는 유령처럼 여자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상을 꿈꾸던 그녀의 영혼은 타인의 따가운 시선과 간섭 때문에
제대로 날지도 못한 채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평생을 하녀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운명에 맞서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pp. 323-324.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배고픔, 욕망, 그리고 돈, 이 세 가지 뿐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p. 319.

번듯한 삶을 채워줄 요소를 갖춘 남자를 찾는 이폴리타.
하녀로 살며 자신이 언젠가는 그럴싸한 인생을 꾸릴 수 있을까 하며 막연한 생각을 해보았고,
창녀로서 지내던 중에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켜 줄 것 같았던 한 남자를 만났지만
그동안 꿈꿔온 이상이 부질없다는 걸, 허구 속 삶과 현실의 삶은 같을 수 없다는 걸 그녀는 깨닫는다.
그러나 여전히 이폴리타는 그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아를, 자신이 갈구하는 그 삶을 찾으려 한다.
그녀는 현실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동정 섞인 질문은 삼가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녀는 허구의 존재 덕분에 위안을 얻고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Ⅳ. 허구와 희망은 동전의 양면?
사람의 마음 속엔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이 나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신비한 본능 같은 거라고나 할까.
지금 나한테 일어나고 있는 일도 내 운명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겪을 수 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p. 79.
(…)내 몸에 구멍을 내서라도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거짓과 위선을 죄다 빼버리고 말거야. p. 121.
저 안쪽 깊숙한 곳에, 우리의 의식과 사유가 이루어지는 곳보다 더 깊은 데에는
훨씬 더 강하고 넓은 또 다른 삶이 있어요. p. 127.
"그런데 왜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하겠다는 거예요?"
"왜? 난 아직 내 삶의 밑바닥까지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거든요…….(…)" p. 331.

이 소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문한다. 자신이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
수시로 자신에게, 타인에게 의심을 품으면서도 그들은‘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이 있다는 믿음에 마음 한 켠을 내어준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바람, 그러나 거의 언제나 희망은 절망하는 자들의 것이다 ’ 라는 아레나스의 말처럼 그들이 손에 잡고 붙들 것이라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허구’뿐이다.
그러한 허구 즉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의 여부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소중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허구의 존재는 그들이 입은 삶의 쓰린 상처를 묵묵히 핥아주기 때문이다.  


같은 라틴 문화권의 작가들이 보여준 정치적인 색채, 현실과 허구와의 관계 때문인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해가 지기 전에 Before Night Falls>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 나치 문학>이 자꾸 생각났다.
<7인의 미치광이>에는 '나'라는 화자가 등장해 어떤 사건에 대해 일정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가 있어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닌 일종의 르포타주처럼 느껴져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작가의 펜 끝으로부터 흘러나왔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듯 생생히 살아 있는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쉽지만은 않았으나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살짝 엿 본 경험은 신선한 책 읽기였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현실과 공상의 경계선에 서서 물 흐르듯이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아를트는 이러한 두 정신세계의 날실과 씨실을 촘촘히 훌륭하게 엮어 놓았다.
꿈꾸는 내용이 아무리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꿈을 꾸지 않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
그리고 작가는 이 책을 읽은 이들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는 듯 했다.
문학이 우리들의 따라지 인생을, 이 우중충한 사회를 구제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머리 쪽을 떼어낸 후 꼬리 쪽을 떼어내면 다시 머리 쪽을, 그리고 다시 꼬리 쪽을 떼어내야 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거머리처럼 이렇게 찰싹 달라붙는 우리네 삶의 애환을 허구가 조금이나마 달래주지 않을까요?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이상이, 행동이 그대들이 보기에는 현실감이 현저히 떨어지고, 어처구니없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소만, 각자의 유토피아가 있어야만 세상살이가 좀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육체는 영혼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데, 그 이유는 영혼에게는 항상 의지할 그 무엇, 기억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아레나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땅 위를 딛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가 설정한 허구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그것에‘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죠.
그리고 언젠가는 거대한 허구로만 생각되던 것이 우리 인생에 생산적인 어떤 것을 이끌어주는 매개체로 변모할지도 모르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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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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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행복을 완벽하게 누릴 수 없다면 사랑의 고통과 아픔을 남김없이 마셔버리겠어요.
모피를 입은 비너스, p. 56. 제베린의 고백 中


자신이 미치게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신체적 고통과 모멸감을 맛보며
정신적 아픔까지도 기쁘게 감내하려는,
아니,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달라고 여인의 발치에서 애원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의 괴상하고 병적인 부탁을 계속 거절하다가 거듭되는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엔 채찍을 손에 들게 된 한 여인이 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그 남자,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와 그 여자, 반다 폰 두나예프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써 내려간 한 편의 원고이다.(이제야 이름이 좀 입에 달라붙네.)

Venus in furs
사실 내가 이 표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노래와
영화, 벨벳골드마인의 ost를 통해서다.
모피로 감싼 비너스라…….
미와 사랑과 관능의 여신인 비너스와
그 육감적인 아름다움을 덮고 있는 털옷의 조합에 머리를 갸우뚱 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비너스는 조각상의 모습이 전부였고,
나는 단순히 그 조각들이 모피를 걸치고 있는 이미지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서 이 어색하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조합으로 내내 머물다가,
그 후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고
비너스와 모피의 조합은 내가 그 동안 가졌던 편견만큼
어색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둘은 더 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결합이었다.
그림 속 모피라는 소재는 비너스의 관능미를 더욱 부각시켜 주고,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은 그 시선을 받고 있을 묘연의 남성 또는 우리네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 힘을 배가시키는데 아주 훌륭한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마치 삼손의 긴 머리처럼.

내게 아주 큰 모피가 있어요.
그걸로 당신을 다 덮을 수 있지요.
마치 그물로 잡듯 그 모피로 당신을 잡을 거예요.
p. 40.
  

TIZIANO Vecellio, Venus with a Mirror
c. 1555
Oil on canvas, 125 x 106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RUBENS, Pieter Pauwel
Venus at a Mirror(Detail)
c. 1615
Oil on panel, 124 x 98 cm
Collection of the Prince of Lichtenstein, Vienna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생생한 그녀의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p. 183.

거울 앞에 앉은 여인(비너스)은 티치아노뿐만이 아니라 벨라스케즈, 루벤스 등
여러 화가들이 사랑했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 속 여인의 시선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지위관계를 암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몸단장을 확인하는 동안 남자가 들어온다.

이때 남자가 보는 것은 여인의 뒤태 혹은 측면일 뿐, 아직 온전한 얼굴은 볼 수가 없다.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기척을 모르고 있다고 여기지만 여인은 이미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온 남자를 보고 있다.
남자가 알아차리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간의 애정선에서 소위 언급되는 '밀고 당기기'도 이런 시선의 점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직접적인 실체의 관계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모티프였기에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자허마조흐도 이 소설에서 티치아노의 비너스 그림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여성의 관능미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였던 티치아노와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인상적인 매치.


TIZIANO Vecellio, Portrait of a Young Woman
c. 1536
Oil on canvas, 96 x 75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이 폭군 같은 여성의 모피는
여성과 여성의 아름다움 속에 깃들어 있는 포악함과 잔인성의 상징이 되었지요.
p. 18.

시각적으로 뾰족뾰족한 모피의 표면은 여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해주며
이 여인이 부유하고 사회적 신분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게다가 이 소설이 쓰인 시기에는 사회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모피의 종류가 정해져 있었다고 하니 모피와 권력은 서로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동시에 제베린에게는 자신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양질의 모피 생산지와 그것을 걸친 여인에 대한 이러한 환상 때문인지
그가 모피를 입은 반다를 러시아 여제로 비유하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한다.
여하튼 모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여자는 여자들을 옹호하고 숭배하는 남자들의 말처럼 그렇게 선하지도 않고,
여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렇게 악하지도 않아요.
여자의 특징은 바로 아무런 특징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여자도 순식간에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고,
천하기 그지없는 여자도 뜻밖의 훌륭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여 자신을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어요.
어떤 여자도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하다고 할 수 없어요.
(…)
모든 시대를 통해 도덕을 창조해 낸 것은 심오하고 진지한 문화였어요.
남자들은 아무리 이기적이고 사악하다 해도 늘 원칙을 따르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기분에 좌우돼요.
이것을 절대 잊지 마요.
pp. 92-93.

쾌락만이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해줘요.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생과 쉽게 작별하지 않아요.
반면에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은 죽음을 마치 친구처럼 받아들이지요.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생을 밝게 받아 들여야 해요.
(…)
쾌락과 잔인함, 자유와 예속은 늘 함께 있었던 거지요.
pp. 220-221.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자허마조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때문에 도덕적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신체적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주인공과 육체적 쾌락이 최고라는 생각
그리고 이교도(그리스)의 신들로 비유하는 방식에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통념과 모랄리즘을 비꼬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기독교의 시각에서 이교도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유산과 기독교 세계를 대치하고 있다.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부도덕으로 몰아가는 사회와 대조되는 자유로운 표현의 세계, 그리스를 자허마조흐는 피안의 세계로 생각했을지도.

반다 폰 두나예프는 본래 가학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제베린의 꺽을 수 없는 부탁을 할 수 없이 받아들인 반나는
예측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두르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작고 예쁜 새처럼 부드럽게 속삭인다.
제베린도 마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안도하며 기뻐하다가도
곧 그녀가 가하는 채찍질에 쾌락과 희열을 맛본다.
그녀가 보인 잔혹한 행동이 회를 거듭하며 자신도 모르고 있던 포악한 면을 끄집어 낸 것이었는지, 그녀의 해명대로 제베린의 버릇을 고치기 위한 연극이었는지,
뭐가 진실인지 나는 아직도 확실히 분간을 못하겠다.

비너스를 지배할 그리스 남신이 등장하면서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은
클라이맥스에 도달는데, 반다를 빼앗길 거라는 불안과 그녀가 곧 자신을 내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휩싸인 제베린의 모습은 마르스 (작가는 그 그리스인을 아폴론에 비유하긴 했지만) 에게 비너스를 빼앗긴 불칸을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초조함이 더해 갈수록 채찍에 대한 집착도 더 커졌기에
결코 그는 반다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연적으로부터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짜릿한 쾌락을 느꼈다고 말하는 인물이 바로 제베린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의 모피를 집어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피가 내 손에서 떨어져 있었다.
모피는 그녀의 어깨 체온으로 아직 따스하다.
나는 그 따스한 부위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눈에 눈물이 고인다.
pp. 189-190.

나의 눈길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천장에 가서 멈추었다.
거기엔 삼손이 델릴라의 발치에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파내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 순간에 그 그림은 내겐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열정과 욕망과 사랑의 영원한 비유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결국에 가서는 싫든 좋든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반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 여자가 무명 코르셋을 입었든, 아니면 담비 모피를 입었든 간에.'
p. 223.

나는 내가 그토록 미친 듯이 사랑했던 그 여인에게 미소를 보냈고,
지난날 나를 그토록 황홀케 했던 그 모피 재킷에게 미소를 보냈으며,
채찍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끝으로 내 고통에게 미소를 보냈다.
p. 227.

자신이 갈구하던 쾌락의 선을 넘어선, 잔혹한 매질을 당하고 나서야
제베린은 뉘우쳤고 자신이 지나치게 집착했던 그 네 가지로부터 벗어나 정상적으로 생활한다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졌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자란, 자연이 창조해 낸 바대로 그리고 현재 남자들이 키우는 바대로
남자의 적이라는 것이지요.
남자의 노예나 폭군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동료가 될 수는 없어요.
여자가 남자의 동료가 되려면 권리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고 또 교육과 일을 통해 남자와 동등해져야 해요. 당신도 보아서 알겠지만 채찍질은 내게 큰 도움이 됐어요.
장밋빛의 그 환상적인 안개는 이제 다 사라지고 없어요.
p. 228.

그러나 제베린이 '나'에게 드러낸 이 태도와 말은 자기기만이다.
그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 병적인 욕망을 마감했다고 했지만
결코 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채찍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과거 몇몇 여인들을 통해 보여준 그의 마조히즘적 성향은
우습게도 이제는 새디스트를 넘어, 모든 여자들에게 사도마조히스트로 변모해버렸다.
(이 대목이 나에겐 약간 충격이었고, 이 작품의 표면이 품은 반전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은 어쩌면 자허마조흐가 사회적 통념(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으면 했지 그 반대의 권력관계는 용납할 수 없다는)을 깨트릴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써넣은 부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은 남녀 사이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권력관계의 순환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제베린 자신이 노예계약을 맺어 반다의 발치에 엎드려 노예로 생활했지만,
사실 진정한 성적 노예는 반다였을 것이다.
그녀는 제베린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된 성적 도구였다.
그는 노예생활을 자처했고 그녀는 도구로서의 사용을 허락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깊이 품고 있는 반전은 이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관자놀이가 당길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생각해 본다.
제베린의 말대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교육•직업적인 면에서
더 우월한 배경을 가지기도 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과연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남녀관계에서 평등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남녀간의 권력관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인지 그에게 묻고 싶다.

덧붙이는 말: 작품 해설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허마조흐가 실제로 파니 폰 피스토르와의 사이에 맺었던 노예계약서를 실었는데,
작품 속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과 감정들이 다시금 응축되어
책 읽는 묘미를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Venus in furs는
루 리드의 가늘게 떨리는 음성과 몽환적인 사운드가 잘 혼합되어 빚어진 끝내주는 곡이다.
노래를 듣다보면 Severin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제베린을 가리킨 것이었다.
책읽기를 마친 지금 벨벳언더그라운드의 CD를 다시 듣는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이니 아직인 분들은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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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기행 2 펭귄클래식 18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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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지, 드디어 이 세계의 수도에 당도했다.
                                                 이탈리아 기행 1, p. 169. 

    

PANNINI, Giovanni Paolo
View of Rome from Mt. Mario, in the Southeast
1749
Oil on canvas, 102 x 168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이제 이곳에 오니 마음이 안정되어 평생 동안 마음의 평온을 얻을 것 같다.
부분적으로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
나는 어디를 가나 새로운 세상에서 친숙한 것을 발견한다.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다.
이탈리아 기행 1, pp. 169-170.
 
VALENCIENNES, Pierre-Henri de
View of Rome in the Morning
1782-84
Oil on paper laid on board, 18 x 25 cm
Musée du Louvre, Paris

주랑과 성당, 특히 둥근 지붕의 아름다운 형상이
처음에는 불꽃이 이는 가운데 윤곽을 드러내다가,
이내 한 덩어리가 되어 이글거리는 모습이 둘도 없이 장려합니다.
(…)
성당과 둥근 지붕의 아름다운 형상은
흡사 불꽃이 이는 것 같은 윤곽 속에서 위대하고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이탈리아 기행 2, pp. 14-15.

"Grand Tour"라고 불리던 여행은
16세기 엘리자베스 치하의 영국인들에게는 로마를 종착지로 하는 유럽 일주 여행이었다.
인생에 입문하는 성격을 띤 이 유럽일주는
젊은 귀족 자제들이 자국에서 배운 외국어를 실제로 사용하여 실용화하고,
외국 여행을 통해 세련된 매너들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특히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접하는 것은 필수 코스였다.
18세기에 들어와 이 그랜드 투어는 전 유럽으로 크게 확산되었는데,
통계에 따르면 1760년 겨울에 로마를 찾은 외국 관광객이 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여행은 프랑스에서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특히 예술가와 시인,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코스로 인식되고 있었다.
스탕달, 샤토브리앙, 제리코와 코로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를 찾아 그들의 예술적 열정과 우울함을 달랬다고.
-Daniel Lagoutte, Introduction à l'histoire de l'art, pp. 118-119. 

이 시기에 그려진 회화에는 그랑 투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고
당시 유행하던 고전주의에 대한 취향이 빈번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그랑투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당시에 이런 취향이 반영된 그림의 수요는 대단했다.

이곳에선 집밖으로 나가 조금만 산책을 해도
너무나 값진 대상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기억은 무한히 아름다운 대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탈리아 기행 2, p. 38.  

(…)선명함, 다양성, 엷은 안개에 싸인 투명한 하늘, 풍경
특히 원경의 절묘한 색조를 바라보노라면 넋을 잃을 지경입니다.
p. 60.

괴테가 로마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독일의 여름날씨를 생각하며 기뻐하는 마음가짐에서 그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열기가 점차 누그러지고 북풍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온다고 말한다.
몸은 외국에 나와 있지만
사소하게는 여행지의 날씨를 보면서
마음은 독일을 떠나지 않는 괴테를 위해 프리드리히의 풍경화 한 점을 그에게 내밀고 싶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중 누가 더 위대한 화가이냐에 대한 논쟁은 재밌게도
언제나 결국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서 결론을 맺는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 위대한 자들의 이름이 단순한 이름에 그치지 않고,
무구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생생한 진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진가는 점차 완전해져 간다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라고 말하는
경탄 섞인 독백과 깨달음이 내 마음에 조용히 와닿는다.  

예술 작품은 보라고 있는 것이지,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직접 대할 때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전에 예술 작품을 대할 때마다 너무 말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p. 43.    

드디어 우리가 잘 아는 모든 사물들의 알파요 오메가인
인간의 형상이 나를 사로잡았고,
나도 그것을 사로잡았습니다.
p. 63.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 과거의 고전주의에서
화려하게, 폭발적으로 연구, 발전되었던
인문주의로 돌아간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접했던 모든 예술은,
그 위대함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었기에,
인간성의 중심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그가 여행 내내 토양이며, 식물이며, 기후기며
다양한 자연의 현상과 모습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세는
인간과 자연을 과학적 시각으로 연구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의 정신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여 생각에 잠기면
젊은 시절의 감흥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다시 떠오릅니다.
그러면 대상들의 높은 수준과 품위가
내 궁극적인 존재가 다다를 수 있는 높이와 거리만큼 나를 끌어 올립니다.
p. 15. 
 

18세기의 여행가들은 이탈리아의 곳곳에 있는 폐허를 사랑했다.
이제는 잡초와 풀가지만 무성해져 뚜렷한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호화롭고 영광스러웠던 옛 시절을 가슴에 품고서
쓸쓸한 정취 속에서 잠든 그곳을 그들은 목말라하며 쉴 새없이 이 나라를 드나들었다.
이 사람들이 뭘 하려고 방문 했느냐고?
특별히 무엇을 하려고 찾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나라, 집 주변에서도 행해졌을 지극한 일상생활 속의 행위들일 뿐.
그들은 걷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옛 영광을 간직한 예술품들을 보러 다니기도 했으며,
예술적 영감에 불타오르는 젊은 화가들은 스케치를 했다.
이처럼 여러 다른 행동을 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우수가 깃들어 한동안 거부감없이 그 상태로 나날을 보냈다.
지평선이 해를 삼키기 전 그 붉은 빛을 온전하게 받고 있는
그곳을 그들은 미치도록 그리워 했으리라.
그곳이 내뿜는 그리움과 쓸쓸한 평온함이
여행가들의 발길을 자꾸만 되돌리게 하는 연유였겠지.

사진기가 없던 시절의 여행은 그 정취가 훨씬 깊었을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물질적인 어떤 이미지로 남겨 자신만의 소유물로 만드는 것이
오늘날 우리네 여행 풍경인데,
옛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그 시간과 공간을 기계나 조작하는 데 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또 바라보고,
여행할 적의 대기 상태, 햇빛 등이 감싸고 있는 모든 사물, 사람들,
그 내면에 깃든 감정들까지도,
당시 풍경의 모든 것을 기억의 성에 차곡차곡, 흐트러지지 않게 두었다.
몸의 온 감각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글이나 그림으로 적으며, 그리며
인상의 되새김질을 했다.
게다가 변화하는 상태 마저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여행방식을 동경한다.
그들은 사진기에 담을 풍경을 두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사진을 찍느라 주마간산식으로 휙휙 지나치는 방식을 모르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타인들의 셔터소음에
짜증을 부릴 잉여의 감정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 
 

티슈바인은 아주 착실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즐겁고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못할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대단하기도 한 이사람에 대해서는 나중에 만나서 직접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내 초상화는 잘 되어가며, 실물과 너무 흡사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착상이 마음에 들 것입니다.
이탈리아 기행 2, p. 13.   


잠시 괴테와 함께 여행했던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이 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탈리아 곳곳을 담은 그림 외에도 옛 유적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 마디로 기념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류의 그림은 괴테의 초상처럼 홀로 상념에 잠긴 모습이나 두 세명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묘사가 되었는데, 이들 초상화의 공통점은 이탈리아, 특히 로마의 폐허와 부서진 조각이나 건축물등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옛 시대의 숨결이 항상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규모가 거대한 것은 모두 숭고하고
평이하면서도 동시에 독특한 인상을 풍깁니다.
(…)이는 흥분된 내 마음에 깊고 위대한 느낌을 불어넣어
영웅적이고 비가적이라 일컬을 만한 정취를 불러일으켰습니다.
pp. 291-292.  


내 마음속에 슬픈 정경 아른거리누나,
로마에서 보내는 이 마지막 밤에,
소중한 추억 그토록 많이 남겨준 밤을 생각하니,
지금도 눈에선 한 줄기 눈물이 흐르누나.
어느새 인적 끊기고 개 짖는 소리도 그친 가운데,
밤의 여신, 루나가 하늘 높이 밤 마차를 모는구나.
하늘을 바라보자 카피톨리노 신전이 눈에 들어오고,
집의 수호신이 부질없이 이토록 가까이서 지켜주고 있구나.
p. 292.


나는 다시 세상에 관심을 갖고
나의 관찰 정신을 시험하고 심사하고 있다.
나의 학문과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나의 눈이 빛나고 순수하고 밝은지,
얼마나 많을 것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지,
마음속에 파고들어 짓눌렸던 주름들이 다시 지워질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탈리아 기행 1, p. 32.

1권 첫 부분에서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의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물론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동경해온 나라의 '위대한' 예술의 향기를 맡는 이유도 컸겠지만
그는 다시금 자아를 찾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여전히 깨어 있는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
그의 여행기를 읽고 난 지금
괴테가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믿는다.

작가들이 여행한 경로를 따라 그들이 찾은 장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 올랐던 수많은 감정들,
이 모든 경험을 나누다 보면 깊은 울림이 되어 그 반향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내가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라이자 가장 여행하고 싶은 나라, 이탈리아를
직접 내 발로 그 땅을 밟으며 그곳의 수많은 정경을 내 눈으로 빨아들이기 전에
괴테의 건장한 어깨 위에 앉아 그 풍광 속을 먼저 넘노닐어 본다.
나도 그 시대의 여행가들처럼 이 나라의 곳곳을 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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