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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사용법 - 텃밭부터 우쿨렐레까지 좌충우돌 DIY 도전기
마크 프라우언펠더 지음, 강수정 옮김, 소복이 그림 / 반비 / 2011년 11월
절판


가상현실 속에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그런데 하루 중 아주 잠깐이라도 손을 써서 뭔가를 만들고
고치면 그런 불편함이 가라앉는다.
진짜배기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손 사용법』에서


마당의 잔디를 없애 텃밭을 가꾸고, 머신을 개조해 최고의 에스프레소를 뽑
고, 닭을 키워 오렌지 색 노른자가 들어 있는 신선한 달걀을 얻고, 나만의 화음
을 내는 악기를 만들고, 몸에 좋은 발효음식을 만들고, 양봉을 시도하고, 아이들에
게 공부를 가르치고… 말이야 간단해 보이지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가진 우산잔
디를 박멸하기 위해 몇 개월을 고생하고, 수시로 닭을 노리는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심해야 하는 등 순조롭게 풀린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저
자는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고, 또다시 시도하고 끝내는 풍요로운 만족을 얻었다.
그리고 시도에서 중단된 일들은 다시금 계획을 세우려고 한다. 단순한 DIY생활
의 매뉴얼을 담은 내용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손을 통해 느리
게 살아가는 즐거움과 과정의 소중함, 사람들과의 소통의 중요함, 실수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부터 출발하여 자신감과 용기를 얻는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을 담은
책이다. 무엇보다 읽고 있으면 친구로부터 생생한 체험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무지 재미있는 페이지터너이다. 어렸을 적에 병아리->닭도 여러 번 키
워보았고 요거트나 치즈 등 발표 음식도 만들어보고 또 현재 부모님이 기르시는 텃
밭에 자주 가보기 때문에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인지 이 도전기가 더 흥
미롭게 다가왔다.
나 또한 손으로 뭘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 그리기, 책갈피 만들기, 간단한
음식 조리하기, 반죽해서 빵 굽기, 그리고 손으로 내려 마시는 커피까지도 손을
거치는 것을 선호한다. 손으로 만드는 행위, 결과물, 과정은 진실하다고 믿기에.
손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일은 겉포장을 두를 수 없다. 실체의 알맹이만이 두
손에 한가득 담긴다.



홈카페 문화가 널리 퍼져 집에서 직접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올해 초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커다란 고급 로스팅 기계로 잘 볶여 고르게 분쇄된 커피를 온라인으로 주문한 것이 핸드드립 커피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동안 카페에서 마시던 아메리카노와는 확연히 다른 신선도와 맛과 향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몇 번 분쇄커피를 사다 먹다가 신선한 원두를 접해보자 해서 핸드밀(수동원두분쇄기)을 장만하고, 또 다시 원두의 신선함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전문 로스터가 볶은 원두를 먹는 재미도 있지만 우선 일주일에 100g씩 주문해서 먹자면 돈이 많이 든다. 원두는 한 가지를 많은 양으로 구매할수록 저렴해지는데, 한번에 500g이상 사두고 보관해서 먹기란 시간이 지날수록 신선도가 떨어지는 커피를 마신다는 얘기다. 게다가 한 종류만 주구장창 마셔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직접 볶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커피 마니아도 아닌 내가 신선한 커피 좀 마셔보자고 일을 이렇게 벌이다니, 처음 두 종류의 생두를 받고서 이걸 어떻게 볶을까 고민하면서도 몹시도 설레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러나 커피 종류에 따라 볶는 정도가 다르고, 각각 커피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곧 뒤따랐다. 불 조절은 어떻게 하고 볶는 시간은 어느 정도로 정할 것인가 알기 위해선 리서치가 필요했다.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하고 실전모드로 들어갔다. 첫 시도는 성공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 시기에 나는 커피로스팅을 원두의 색깔로만 판별했기에 그럴싸한 내 결과물의 때깔만 보고는 해냈다고 자만을 떨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후 알아보니 나의 첫 로스팅은 시간초과로 커피의 좋은 향미가 볶는 과정에서 손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은 실패였다. 두 번째는 다른 종류의 커피를 볶았다. 첫 번째 경우와 같은 조건에서 볶았더니 이번도 대참패. 알아 보니 이 종류는 고지대에서 자란 것이라 밀도가 높기 때문에 충분히 강한 화력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커피라서 마음껏 즐기려고 산 생두였는데 하필 로스팅하기가 까다롭다니, 이 때부터 일주일에 3번씩 소량을 볶으면서 최적의 로스팅 포인트를 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했다. 아주 강한 불로 단 시간 내에 볶기, 낮은 불에서 진행시키다가 막바지에 화력을 높여 볶기, 며칠 전에 볶아 둔 원두를 다시 볶아보기도 하고(이 경우 모양과 색은 예쁠지라도 향미는 거의 없었다. 이 원두로 드립한 것은 한 마디로 커피가 아니라 검은 물.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신발장과 냉장고 탈취제로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생두의 절반을 버렸다. 말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린 건 아니지만 눈이 확 떠질 정도로 맛 좋은 커피를 마실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생두를 다 버릴 것 같아서 다른 생두 3 종류를 새로 들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로스팅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 커피 생활을 하면서 새로‘시작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같은 생두를 볶더라도 과정을 기록해 나갔다. 열을 받은 생두가 팽창하여 퍽 하고 소리 내는,< 1차 크랙 시작, 종료, 중간 휴지기, 2차 크랙 시작, 배출 > 등을 로스팅 하는 과정 중에 재빨리 체크했다. 게다가 흐린 날씨라는 변수가 끼어 들면 로스팅 소요시간, 화력조절의 조건을 다시금 정해야 한다는 것도 경험했다. 또 여러 번 시도해 보니 <이 커피는 이 볶음 정도가 알맞다> 라는 통념이 내 로스팅 마인드에서 물러났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커피, 차 등의 기호식품에는 틀에 박힌 룰이 없다는 것이 진리였다. 결과 내가 볶은 커피에 한해서 내 입맛에 맞는 로스팅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고, 지금은 그 지점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볶는 그 십 몇 분 동안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두 가지 이상의 커피를 볶는 경우, 원두를 섞는, 즉 블렌딩이라는 체험도 맘껏 할 수 있다. 각각의 원두가 지닌 특성을 염두에 두고 두 세가지 종류를 섞고, 비율에도 변화를 주면서 시도해보면 최고의 조합을 맛보는 행운도 만난다. 원두의 분쇄굵기도 정해진 크기가 있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조절해서 그라인딩한다. 연하게 차처럼 마시고 싶을 땐 굵게 갈아서 드립하고, 침출식 커피를 만들 때는 에스프레소용으로 분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마시는 것인데도 때에 따라 여러 조건을 만들고 맛을 내는,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이른바 <커피에 다가가는 과정>이 무척 신기하고 매력적이다. 초기에는 신선하고 다양한 커피 맛에 빠졌다고 단순히 여기곤 했는데, 드립커피에 매료된 지 10개월 차, 지금 생각해보면 그보다는 직접 로스팅을 하고, 숙성시간을 기다리고 원두를 갈아 내 손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그 과정에 중독된 것 같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느리게 살아간다는 것...
그 안에는 '정성'이라는 에센스가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정수는 세상을 보는 시선, 태도의 변화를 품고 있다.
핸드메이드라는 단어에는 무수히 많은 긍정의 태그어롱이 붙어 다닌다.
하루에 한 번 내 손을 사용하는, 이 짧은 중독의 순간들을 아래에 간단한 이미지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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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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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e never said a mumbaling word......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and he never said a mumbaling word, 그렇게 흑인 가수가 노래한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

사위를 가득 메운 절망적인 얼굴들.
내 얼굴도 그들 가운데 놓여 있다. 내 얼굴은 그들의 것과 같고
그들의 얼굴도 내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을 구별하려는 목적도, 행위도 의미 없는 시대. 언제나 상흔의 시대의 표정은 익명성이다.
불친절한 시대의 환부는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물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자꾸만 벌어지는 것만 같다.
전후 사회의 무기력하고 우울한 기운이 도처에 스며들어,
마치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몸짓처럼 도무지 벗어나려는 기미가 없다.

남편과 아내의 의식이 맞물린다.
기름칠이 닳아 거칠고 소름 도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더라도,
가득 낀 먼지 때문에 뻑뻑하더라도 그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는다. 아니, 멈출 수가 없다.

자신들의 주변 모습, 온전하지 못한 가족의 모습,
무엇보다 자신의 애처로운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이틀이 지난다.
그 48시간 동안의 흐름을 우리는 읽는다. 잿빛 오한에 마음을 부르르 떨며. 

짭짤한 맛으로 번지는 슬픈 시선과 희망

성당에 놓인 가브리엘 조각상을 마주하며 자신의 임신사실을 확신하게 된 캐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감탄했던 부분 중 한 장면이었다.
작가는 <수태고지> 표현의 역사상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수태고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했다.

전쟁의 생채기에서 아직 피가 흘러나오는 시대에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건
연약한 희망조차 가져다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시궁창과도 같은 삶이 더 더러워지고 힘들어질 뿐일지도 모른다,
석상 위를 덮은 먼지를 입김으로 불며 캐테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잠결에 부부의 나레이션을 듣는,
환청과도 비슷한 오묘한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아마 꿈이었을 것이다.
끝내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초록 모자를 쓴 캐테의 옆얼굴을 보며, 그녀의 몸이 품고 있는 생명의 기운을 새삼 깨달으며,
프레드가 어떤 의지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가족도, 개인도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의지가
가늘게 피어 오르는 연기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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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영광 열린책들 세계문학 146
그레이엄 그린 지음, 김연수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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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죄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느 순간 깨닫게 될테니까요.」
                                                         -『권력과 영광』中

『권력과 영광』은 오래된 땀 냄새가 날 것만 같은 소설이다.
따뜻함보다는 습한 기운으로 가득하고, 성스럽기 보다는 세속적이며, 소박하기 보다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기쁨과 안락보다는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지만 어느 이야기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 강렬하고 묘한 매력으로 넘치는 소설을 읽으며, ‘권력과 영광’이라는 제목을 되뇌었다.
작가는 어떤 권력과 영광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계속 궁금했다.
사랑과 증오(경멸), 아름다움과 고통, 추함, 선과 악, 죄악과 축복, 불신과 믿음.
이들 병치는 추상적인 정의만큼, 또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이 아니었다.
가톨릭 신앙과 사제들에 대해 경위가 품은 분노와 증오는
사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도와 주고픈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위스키 사제 또한 극도로 고통 받는 순간과 절망 속에서 아름다움과 선함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이 소설 속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버려져 있다.
집, 마을, 개, 그리고 사람들까지도 서로 버리고 버려진다.
척박하고 잔인하며, 황량한 풍경 속에 희망은 이미 오래 전에 말라버린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위스키 사제는 그링고를 찾아가기 위해 다시 산을 넘어
자신도 뒤에 남겨두고 떠났던 그 마을로 돌아간다.
자신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적이며 추하디 추한 세상이지만 버리고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창조주가 죄 덩어리인 인류를 사랑하고,
악하고 연약한 믿음을 지닌 인류를 위해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죽음에 도달했던, 신의 아들처럼.
앞섰던 순교자들처럼 그도 성인으로 남을 것이다.
기록되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기억되는 삶’ 속에서는 그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다는 영웅으로 묘사될 테지만
이와 달리 실제 그의 삶은 죄를 지었고, 그 부덕한 행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었다는 믿음이 그를 (자진)순교자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단어에서 따온 제목, The power와 The glory가 등장하는 부분 바로 앞의 구절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실 이 소설은 유혹과 악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사제는 어둠의 실체를 보고, 겪은 후에야 인간에 대한 진실 어린 애정을 품을 수 있었고,
창조주가 빚어낸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량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펼쳐져 있었던 영광에 도달했다.
이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유혹과 악, 권력과 영광 이 대조적인 두 쌍에 대한 믿음이
지상과 천상에 각각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 지상에 있다는 것이었다.
기성세대와 현세대의 믿음까지 뿌리 뽑는 데 실패했던 경위가 다음세대,
즉 아이들로부터 종교를 벗겨내리라 희망을 걸었으나 결국 작가는 종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한밤중에 찾아온 사제를 몰래 집안으로 들이는 마지막 장면은 독실한 신자였던 작가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세대에 세대를 따라 이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소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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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장 에슈노즈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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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p. 22

우연한 기회에 달리기 경주에 참가했다가 달리기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아주 잘 달리는 '기계'라는 별명을 얻기 전, 슬프고 외로웠던 적도 있었지만 그는 계속 달렸다.
선수라면 마땅히 지어야 할 정해진 몸짓을 보이며,
날아가는 듯, 춤추는 듯 아름다운 자세로 뛰는 훌륭한 선수들 틈에서
머리를 이상하게 움직이고 팔은 제멋대로 흔들거리며
얼굴이 짓는 표정은 더욱 해괴한 이상한 선수.
고통을 사랑한 기이한 달리기 선수.
실전보다 연습을 훨씬 혹독하게 했던 특이한 선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선수들이 스피드 분배를 할 때
느리게, 빠르게 자유자재로 자신의 체력과 스피드를 가지고 놀았던
달리기의 유희왕, 에밀 자토페크.
힘들이지 않고 빨리 달리는 것,
이것이 그가 신경 쓴 유일한 달리기 방법이었다.

회색빛 풍경 속에서 붉은 색 운동복을 입고 인생을 뛰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 『달리기』.
피곤을 느끼거나 속도가 느려질 징후가 느껴지면 오히려 그는 곧바로
속도를 높이려고 애를 썼다.
이 점에서 그에게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는 아픈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p. 52-53.

육체의 고통을 감내한 것처럼
영혼을 구속하는 모든 외부의 강압 또한 순순히 받아들였던 착한 사람.
바보스럽고 한심한 그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를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
긍정적이고, 부정까지도 수용하는 자세를 지녔다고 그를 칭찬하기 이전에,
그는 누구보다도 인생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가 보였던 대응은 무력함이 아니라 진솔한 용기와 깨달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가슴 아프고 슬픈 일들이 생겨나지만 인생은 달리기와 같다.
느슨하게 달리다가, 막판 스퍼트처럼 마지막 힘을 내야 할 때가 있으며,
잠깐 쉴 수는 있지만 숨이 붙어 있는 동안 꾸준히 달려야 한다.
계속 달리는 한 삶은 끊어질 수 없다는 믿음.
고통과 슬픔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 앞에 진솔한 모습으로 섰기에
그는 모든 것을 품고 달릴 수 있었다.
그는 삶이라는 자신만의 트랙 위를 쉬지 않고 질주했다.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달렸다.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함성소리가 귓가에 맴돌지 않아도,
결승선에서 끊을 테이프가 없어도.


독일인들이 모라비아에 들어왔다. p. 5.
소련인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들어왔다. p. 146.

자신의 페이스대로 성실하게 뛰었던 자토페크의 화려하고 빛나는 삶.
스모그가 낀 듯 자욱하고 숨막히게 만드는 냉전시대.
운동선수로서의 개인적인 성공과 전운이 가득 낀 당시 사회 상황을 동시에 본다는 것은
우습고도 무서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내몰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애써 웃음을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게 끝나는 게 좋아요.
나의 성공담이 너무 오래 계속되었거든요. p. 127.



작가, 에슈노즈는 자토페크 라는 인물의 모든 생애를 그리는 대신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때를 시작으로 해
공식적으로 그의 선수 생활이 끝나는 시점까지만 다루고 있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에게 향하는, 결승점이 존재하지 않는 레이스.
이것이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이다.
그가 달리기 전과 달린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그가 '달린다'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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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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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생활에서 사랑에 대한 외로움은 마치 예수님이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이리라.
그것은 퇴보의, 부정의 고독이 아니라 영원히 꽃피는 고독이리라.- p. 286.쪽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난 준비가 되어 있어요.」(중략)
「하지만 이렇게 살아온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요. 우린 오래 전에, 우리가 신학교 학생이었을 때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을 해냈잖아요∙∙∙∙∙∙. 적어도 그 일들 중 몇 가지는요. 젊었을 때 꿈꾸었던 일들을 실현시키는 것, 그것은 최고로 행복한 일이잖아요. 어떤 세속적인 성공도 이를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 (중략)
그들은 과거를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서로 꼭 껴안았다.- p. 292.쪽

신부는 캐년 데 첼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계곡은 나바호 족이 조그마하고 약한 부족이었을 때 살았던 곳이었다. 그곳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고 그들을 보호해 주었던 곳이었다.
그곳은 그들의 어머니였다. 더욱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벼랑들 군데군데 있는 동굴에 지어 놓은, 접근이 쉽지 않은 그 하얀 집에∙∙∙∙∙∙. 그곳에 백인의 세계보다 더 오래된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거주하고 있었다. 신부의 주님이 그의 성당에 있듯이 그들의 신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p.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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