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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ㅣ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사랑의 행복을 완벽하게 누릴 수 없다면 사랑의 고통과 아픔을 남김없이 마셔버리겠어요.
모피를 입은 비너스, p. 56. 제베린의 고백 中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30092173581984.jpg)
자신이 미치게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신체적 고통과 모멸감을 맛보며
정신적 아픔까지도 기쁘게 감내하려는,
아니,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달라고 여인의 발치에서 애원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의 괴상하고 병적인 부탁을 계속 거절하다가 거듭되는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엔 채찍을 손에 들게 된 한 여인이 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그 남자,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와 그 여자, 반다 폰 두나예프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써 내려간 한 편의 원고이다.(이제야 이름이 좀 입에 달라붙네.)
Venus in furs
사실 내가 이 표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노래와
영화, 벨벳골드마인의 ost를 통해서다.
모피로 감싼 비너스라…….
미와 사랑과 관능의 여신인 비너스와
그 육감적인 아름다움을 덮고 있는 털옷의 조합에 머리를 갸우뚱 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비너스는 조각상의 모습이 전부였고,
나는 단순히 그 조각들이 모피를 걸치고 있는 이미지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서 이 어색하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조합으로 내내 머물다가,
그 후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고
비너스와 모피의 조합은 내가 그 동안 가졌던 편견만큼
어색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둘은 더 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결합이었다.
그림 속 모피라는 소재는 비너스의 관능미를 더욱 부각시켜 주고,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은 그 시선을 받고 있을 묘연의 남성 또는 우리네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 힘을 배가시키는데 아주 훌륭한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마치 삼손의 긴 머리처럼.
내게 아주 큰 모피가 있어요.
그걸로 당신을 다 덮을 수 있지요.
마치 그물로 잡듯 그 모피로 당신을 잡을 거예요.
p. 40.
TIZIANO Vecellio, Venus with a Mirror
c. 1555
Oil on canvas, 125 x 106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30092173581986.jpg)
RUBENS, Pieter Pauwel
Venus at a Mirror(Detail)
c. 1615
Oil on panel, 124 x 98 cm
Collection of the Prince of Lichtenstein, Vienna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생생한 그녀의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p. 183.
거울 앞에 앉은 여인(비너스)은 티치아노뿐만이 아니라 벨라스케즈, 루벤스 등
여러 화가들이 사랑했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 속 여인의 시선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지위관계를 암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몸단장을 확인하는 동안 남자가 들어온다.
이때 남자가 보는 것은 여인의 뒤태 혹은 측면일 뿐, 아직 온전한 얼굴은 볼 수가 없다.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기척을 모르고 있다고 여기지만 여인은 이미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온 남자를 보고 있다.
남자가 알아차리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간의 애정선에서 소위 언급되는 '밀고 당기기'도 이런 시선의 점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직접적인 실체의 관계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모티프였기에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자허마조흐도 이 소설에서 티치아노의 비너스 그림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여성의 관능미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였던 티치아노와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인상적인 매치.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30092173581987.jpg)
TIZIANO Vecellio, Portrait of a Young Woman
c. 1536
Oil on canvas, 96 x 75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이 폭군 같은 여성의 모피는
여성과 여성의 아름다움 속에 깃들어 있는 포악함과 잔인성의 상징이 되었지요.
p. 18.
시각적으로 뾰족뾰족한 모피의 표면은 여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해주며
이 여인이 부유하고 사회적 신분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게다가 이 소설이 쓰인 시기에는 사회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모피의 종류가 정해져 있었다고 하니 모피와 권력은 서로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동시에 제베린에게는 자신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양질의 모피 생산지와 그것을 걸친 여인에 대한 이러한 환상 때문인지
그가 모피를 입은 반다를 러시아 여제로 비유하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한다.
여하튼 모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여자는 여자들을 옹호하고 숭배하는 남자들의 말처럼 그렇게 선하지도 않고,
여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렇게 악하지도 않아요.
여자의 특징은 바로 아무런 특징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여자도 순식간에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고,
천하기 그지없는 여자도 뜻밖의 훌륭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여 자신을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어요.
어떤 여자도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하다고 할 수 없어요.
(…)
모든 시대를 통해 도덕을 창조해 낸 것은 심오하고 진지한 문화였어요.
남자들은 아무리 이기적이고 사악하다 해도 늘 원칙을 따르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기분에 좌우돼요.
이것을 절대 잊지 마요.
pp. 92-93.
쾌락만이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해줘요.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생과 쉽게 작별하지 않아요.
반면에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은 죽음을 마치 친구처럼 받아들이지요.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생을 밝게 받아 들여야 해요.
(…)
쾌락과 잔인함, 자유와 예속은 늘 함께 있었던 거지요.
pp. 220-221.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자허마조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때문에 도덕적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신체적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주인공과 육체적 쾌락이 최고라는 생각
그리고 이교도(그리스)의 신들로 비유하는 방식에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통념과 모랄리즘을 비꼬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기독교의 시각에서 이교도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유산과 기독교 세계를 대치하고 있다.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부도덕으로 몰아가는 사회와 대조되는 자유로운 표현의 세계, 그리스를 자허마조흐는 피안의 세계로 생각했을지도.
반다 폰 두나예프는 본래 가학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제베린의 꺽을 수 없는 부탁을 할 수 없이 받아들인 반나는
예측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두르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작고 예쁜 새처럼 부드럽게 속삭인다.
제베린도 마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안도하며 기뻐하다가도
곧 그녀가 가하는 채찍질에 쾌락과 희열을 맛본다.
그녀가 보인 잔혹한 행동이 회를 거듭하며 자신도 모르고 있던 포악한 면을 끄집어 낸 것이었는지, 그녀의 해명대로 제베린의 버릇을 고치기 위한 연극이었는지,
뭐가 진실인지 나는 아직도 확실히 분간을 못하겠다.
비너스를 지배할 그리스 남신이 등장하면서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은
클라이맥스에 도달는데, 반다를 빼앗길 거라는 불안과 그녀가 곧 자신을 내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휩싸인 제베린의 모습은 마르스 (작가는 그 그리스인을 아폴론에 비유하긴 했지만) 에게 비너스를 빼앗긴 불칸을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초조함이 더해 갈수록 채찍에 대한 집착도 더 커졌기에
결코 그는 반다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연적으로부터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짜릿한 쾌락을 느꼈다고 말하는 인물이 바로 제베린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의 모피를 집어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피가 내 손에서 떨어져 있었다.
모피는 그녀의 어깨 체온으로 아직 따스하다.
나는 그 따스한 부위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눈에 눈물이 고인다.
pp. 189-190.
나의 눈길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천장에 가서 멈추었다.
거기엔 삼손이 델릴라의 발치에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파내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 순간에 그 그림은 내겐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열정과 욕망과 사랑의 영원한 비유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결국에 가서는 싫든 좋든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반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 여자가 무명 코르셋을 입었든, 아니면 담비 모피를 입었든 간에.'
p. 223.
나는 내가 그토록 미친 듯이 사랑했던 그 여인에게 미소를 보냈고,
지난날 나를 그토록 황홀케 했던 그 모피 재킷에게 미소를 보냈으며,
채찍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끝으로 내 고통에게 미소를 보냈다.
p. 227.
자신이 갈구하던 쾌락의 선을 넘어선, 잔혹한 매질을 당하고 나서야
제베린은 뉘우쳤고 자신이 지나치게 집착했던 그 네 가지로부터 벗어나 정상적으로 생활한다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졌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자란, 자연이 창조해 낸 바대로 그리고 현재 남자들이 키우는 바대로
남자의 적이라는 것이지요.
남자의 노예나 폭군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동료가 될 수는 없어요.
여자가 남자의 동료가 되려면 권리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고 또 교육과 일을 통해 남자와 동등해져야 해요. 당신도 보아서 알겠지만 채찍질은 내게 큰 도움이 됐어요.
장밋빛의 그 환상적인 안개는 이제 다 사라지고 없어요.
p. 228.
그러나 제베린이 '나'에게 드러낸 이 태도와 말은 자기기만이다.
그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 병적인 욕망을 마감했다고 했지만
결코 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채찍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과거 몇몇 여인들을 통해 보여준 그의 마조히즘적 성향은
우습게도 이제는 새디스트를 넘어, 모든 여자들에게 사도마조히스트로 변모해버렸다.
(이 대목이 나에겐 약간 충격이었고, 이 작품의 표면이 품은 반전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은 어쩌면 자허마조흐가 사회적 통념(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으면 했지 그 반대의 권력관계는 용납할 수 없다는)을 깨트릴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써넣은 부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은 남녀 사이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권력관계의 순환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제베린 자신이 노예계약을 맺어 반다의 발치에 엎드려 노예로 생활했지만,
사실 진정한 성적 노예는 반다였을 것이다.
그녀는 제베린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된 성적 도구였다.
그는 노예생활을 자처했고 그녀는 도구로서의 사용을 허락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깊이 품고 있는 반전은 이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관자놀이가 당길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생각해 본다.
제베린의 말대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교육•직업적인 면에서
더 우월한 배경을 가지기도 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과연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남녀관계에서 평등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남녀간의 권력관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인지 그에게 묻고 싶다.
덧붙이는 말: 작품 해설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허마조흐가 실제로 파니 폰 피스토르와의 사이에 맺었던 노예계약서를 실었는데,
작품 속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과 감정들이 다시금 응축되어
책 읽는 묘미를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Venus in furs는
루 리드의 가늘게 떨리는 음성과 몽환적인 사운드가 잘 혼합되어 빚어진 끝내주는 곡이다.
노래를 듣다보면 Severin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제베린을 가리킨 것이었다.
책읽기를 마친 지금 벨벳언더그라운드의 CD를 다시 듣는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이니 아직인 분들은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