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 - 서울올림픽이 만든 88년 체제의 등장과 커튼콜
박해남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6월
평점 :

2000년대에 이르자 '정상적인 삶'은 마치 유령처럼 변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정상적인 삶을 위해 가족 단위로 고군분투했다.여기서 정상적인 삶은 사교육을 받은 자녀가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계속되는 가족의 투자로 스펙을 쌓으며,'괜찮은 일자리'를 얻고 나면 주식 투자를 시작하고, 집 한 채를 가지면 부동산 투자를 통해 노후를 대비하는 삶을 가리킨다.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자녀 세대에서 재생산하고자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안전망을 통해 궤도 이탈을 방지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살은 도시적인 삶을 통해 재생산되며, 도시를 향한 젊은이의 이동도 끊임없을 수 밖에 없다. (-5-)
한국은 그 이전까지 거대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유치했음을 자부해왔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보자. 2002년 월드컵 개최지에서 제외됐던 강원도는 야심차게 동계올림픽 개최의 깃발을 올렸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는 두번이나 평창이 아닌 다른 도시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평창은 다시 IOC에 문을 두드렸다. 2009년 말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평창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를 특별사면했고,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올림픽 유치에 매달렸다. (-16-)
1966년 만들어진 태릉선수촌은 군인들의 지원체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훈련장이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자 한국은 165명의 선수를 참가시켰다. 이는 참가국 중 규모 면에서 다섯 번째에 들어가는 인원이었다.하지만 여러 개의 금메달과 함께 국제 무대의 주연으로 자리 잡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결과는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였다.그러자 국가는 선수들의 퍼포먼스를 향상시키려고 국가대표 선수들을 위한 전용 훈련장을 지었다. (-79-)
감시의 시선은 단속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았다.군인들은'계도'라는 이름 아래 수백만 명의 사회정화위원을 동원해 권력의 대본을 따라 연기하지 않는 이들을 감시했다. 정류장 줄 서기, 차선 지키기, 횡단보도 앞 서행, 여행지에서 쓰레기 버리지 않기., 음주추태 부리지 않기, 바가지 요금 없애기, 경기장에서는 판정에 불복하지 않기, 경기장에서 술 마시지 않기,. 상점에서는 가격 표시하기,영수증 주고받기, 명절 건전하게 보내기, 연말연시 검소하게 보내기 등 도시민이 일상 속에서 따라야 할 대본은 넘쳐났다. 물론 감시는 언제든 처벌로 전환될 수 있었다. (-115-)
1980년의 군인들이 기존의 새마을운동에 사회정화운동이라는 관제 캠페인을 더해 사회적 삶의 대본을 숙지시키고 이에 따른 연기를 도시민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런데 서울에서 올림픽을 상영하기로 하자 군인-연출자들은'범민족올림픽추진위원회'라는 이름의 관제 캠페인을 추가했다. (-162-)
앞서 본 것처럼 군인들은 1970년대부터 '퇴폐가요'를 없애겠다면서 팝음악을 라디오방송에서 퇴출시키고 이를 민요나 군가로 대체하는 등 여가에 개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곧장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레크레이션 프로그램을 보급하고 강사들을 육성했다. 그런데 1980년대의 군인들은 대중의 여가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장 먼저 출범한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리그였다. (-210-)
노점상들은 1988년 4월 18일 '노점상의 생존권과 올림픽에 관한 공청회'에서,국민의 생존권은 모든 법에 우선하고 노점상이 올림픽에 방해될 일이 없으므로 강제철거를 중단해야 하며,국가라면 응당 노점상에게도 의료혜택과 주거대책을 마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이들은 더 나아가 '노점상보호법'을 통해 자신들이 도시라는 무대에 설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노점상보호법은 노점상의 합법화, 기존 노점의 영업권 인정, 노점신고제, 노점상 조직의 합법화, 빈곤에 대한 지원, 1가구 1노점 원칙 등을 골자로 했다. (-274-)
연출자들의 관심은 민중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아파트라는 현대적 주거 공간을,올림픽의 무대장치를 제공하는 '자신의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데 있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신도시 어딘가에 임대아파트를 만들 때 앞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월간 말》의 한 기자는 올림픽을 앞두고 4~5평의 조그만 공간에서 살아가던 도시 빈민의 공간을 30평 이상의 고층 아파트로 바꾼 연출자들을 비판하면서,고층 아파트를 '올림픽 공식 주거'라 불렀다. (-298-)
2015년과 2016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가 방영되었다.그 드라마를 통해 기성세대는 추억에 잠겼고, 신세대들은 과거의 대한민국의 삶을 학습했을 것이다. 특히 그 해에 열린 88올림픽은 대한민국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고, 내전은 종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으며,그것이 5년 이내에 , 구소련이 무너지고, 통일독일이 탄생되면서, , 현실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다.
저자는 1988년 그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적 전환을 분석하고 있다.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 젉대권력자였던 리바어어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세력이 대한민국에 어떤 변화를 야기했는지 분석하였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메가 시티가 된 서울, 그 서울 곳곳에 빈민촌이 어떻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리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고,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눈으로 확인했다.이 모습은 대한민국의 군부 세력에게 민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1960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프로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태릉 선수촌이 만들어지고,국제적인 실력을 갖춘 국가대표를 만들었다.그 과정들이 군인들에 의해 만들어낸 연출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모든 것이 뒤바꼈다. 1988 서울 올림픽 유치라는 공통적 목표는 낡은 것, 뒤떨어진 것을 퇴출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대책 없이 도시에 몰려들었던 이들을 도시재개발로 인해 양성화하였고, 노점상 퇴출 ,퇴폐가요 정리 수순으로 이어진다. 서양의 음악에 규제를 가하였고,해외여행 자유화로 이어진다. 그 안에서, 올림픽 유치가 불가능했던 대한민국은 IOC위원이었던 이건희 특별사면과 동시에, 평창올림픽 유치 작전이 본격화했다. 삼성그룹의 역할이 올림픽 유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대한민국은 서서히 변화되었고,법과 제도를 개선해 나간다. 관제 캠페인을 통해,대한민국의 흑역사였던 후진국의 잔재들을 지우기 시작하였다.그러나, 대한민국은 하계 서울올림픽, 동계 평창올림픽, 2001 한일 월드컵 유치 성공까지 이어졌지만, 그것이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사회적 부작용과 함께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만다.서울이 198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극장도시로 전환되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