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을 그리는 시간 - 기억에 관한 짧은 이야기
이윤 지음 / 파이어스톤 / 2023년 11월
평점 :
철로가 놓인 미래 터널에 대한 기억은 열아홉 살쯤부터다.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떠나던 날 나는 전라선의 마지막 종착역인 여수역에서 기차를 탔다. 아마 엄마가 기차에서 먹으라고 달걀을 삶아 주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했던 대학에 합격했고 나는 드디어 이 도시를 떠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18-)
영화를 봄 후 한참이 지난 어느날 앨비스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의 사진과 일생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 앳된 엘비스가 노래하는 영상과 나이 들어 비대해진 엘비스의 영상들이 있다. 어느 시절이건 엘비스는 여전히 노래하고 있었다. (-38-)
국도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달리는 속도를 한껏 올리니 순식간에 도시의 경계를 지난다. 낯선 산과 들을 지나고 가을 건너, 멈추지 않고 달린다. 나느 그곳과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고향을 또 떠난다. (-70-)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언제부턴지 쓰던 걸 버리는 게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보면 젊었을 땐 안 그랬던 것도 같다. 쓰다가 아닌 것 같으면 그냥 내다 버렸다. 벽시계도, 선풍기도,그릇들도 버렸다. 풍족한 살림이 아니었으니 버릴 것 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쓰던 물건을 버려도 금방 잊었다. (-91-)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천에서 왜가리르 보았다. 머리 옆을 가로지른 꽁지머리 같은 검은 깃털과 몸통의 잿빛 털이 제법 멋진 새다. 그런 왜가리가 얕은 물에 두 발을 담근 채 미동조차 없이 서서 물풀 사이를 보고 있다. 뭔가를 노리는 듯한 태도다.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왜가리가 길고 날카로운 부리로 물고기를 낚아챌 순간을 기대하며 숨죽여 기다렸다. (-112-)
살면서 가끔 나에게서 불쑥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DNA 를 느낄 때가 있다.그럴때면 나는 왠지 비애를 느낀다. 한없이 유순한 얼굴을 한 아버지의 사진을 볼 때도 그렇다. 좀 더 즐겁게, 좀 더 단순하게 , 좀 더 건강하게 인생을 살다 가셨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해 슬프고 아쉽다. (-122-)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힘들었겠구나'라는.
미워만 했지 이해해 보려 하지 않았다.이해는 커녕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여겨졌다. 자기밖에 모르고 그래서 자기 인생만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177-)
자가 이윤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MBCc 창작동하대상에 응모한 장편동화가 단선되었으며, 작가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작가의 생의 이면과 나의 생의 이면을 서로 거울처럼 엮어 보았다.작가 이윤의 가치관 속에는 나의 가치관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의 기억, 버스보다 기차에 대한 추억이 더 많았다. 비둘기호, 통일호,무궁화호,새마을호, 기차역에서, 까먹던 삶은 계란에 대한 추억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차역은 여전히 추운 쓸쓸함만 감도는 플랫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 인생의 여정은 기차역에서 시작하여,기차역에서 끝날 대가 많았다. 특회 어릴 적 청량리역에 얽힌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슬픔이자 애증이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존재, 저자에게도 아버지 DNA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싫었고,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서, 아무도 안 보는 곳에 버려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바로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이었을 것 같다. 작가의 인생과 삶의 기록은 내 인생의 작은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 있다. 내 안의 수면 밑에 잡겨 있었던 혼란스러운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동질감과 이질감, 이 두가지 선택 중에서,나는 동질감을 선택하고 싶다. 이질적인 것은 삶의 저항에 불과했고, 불편할 때가 있다. 버리지 못하는 습관, 17년전 발견한 어떤 소지품이 떠올랐다. 기념품 하나 선물 받은 뒤, 한번 도 빨지 않았지만, 기념품은 여전히 깨끗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그것에 얽힌 추억은 나와 타자를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우연이다. 서로 공통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 인정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틈새를 만들수 있고,서로 대화가 통한다는 걸 느낄 때,나이 차이를 떠나 대화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 감정 마저도,느낌이나 경험들, 이런 것들이 내 살의 퍼즐을 맞춰 나가며, 서로 애틋함과 풋풋함이 연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