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리다 - 예술에 담긴 죽음의 여러 모습, 모순들
이연식 지음 / 시공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231-1.jpg



우리는 '죽음'을 자주 말하다 못해 입에 달고 산다. 죽겠다,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을 작은 투정에도 쉽게 사용한다. 실제 죽음이 갖는 위압적인 무게에 견주어 볼 때 괴상할 정도다. 그런 주문으로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다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켜켜이 쌓아온 죽음의 무게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다. (-8-)


이제 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네, 햇살보다 아름다운 여자 여섯 명이 지금 옆방에 있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대기시켜놓았지. 자네도 동참하게나. 나처럼 여자들이나 품고서, 그 모든 미신의 허망한 궤변을 잊도록 해 보게. 위선이 낳은 어리석은 착각들이랑 깡그리 잊어버리라구. (-30-)


작품의 배경이 되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가서 네로와 파트라슈의 자취를 찾아 돌아다니고 ,마지막으로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한다. 소설과 애니메이션에서 네로와 파트라슈가 숨을 거둔 곳이다. (-43-)


검정은 죽음의 색이다. 때로는 단순히 배경처럼 보인다. 그림자, 실루엣일 뿐이다. 하지만 그림자는 발끝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인간으 따라다닌다. 때로 검정이 우리를 부른다. 오딜롱 르동의 그림은 고대 세계에서 지혜와 치유를 관장하고 우주의 비밀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신 아시스가 베일에 감사인 모습을 보여준다. (-120-)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그림으로 '간택' 되었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을 언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고, 죽음을 암시하는 까마귀가 저물어 가는 밀밭 위로 날아가는 모습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삼기 적격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을 살필수록 허망해진다. 빈센트가 자기 아랫배를 틀어쥐고 비척거리며 하숙집으로 돌아온 그날, 아침에 갖고 나갔던 화구와 캔버스와 이젤을 가져오지 못했다. (-153-)


<가셰 박사의 초상>은 1890년 6월 반 고흐가 당시 머물던 오베르에서 의사 가셰를 그린 작품이다.가셰의 앞에는 강심제의 재료로 쓰였던 디기탈리스가 꽂혀 있고, 가셰 자신은 손을 얼굴에 괸채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백셩의 꾸물거리는 터치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심리를 암시한다. (-185-)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죽은 자가 아니면 애도할 수 없다.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승천했다. 반면 아서왕의 부활은 유예되었다. 여전히 유예되고 있다. (-234-)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기리고, 그리워하고, 회고하고, 슬퍼한다. 여기에는 대전제가 있다.'죽은 이는 절대 이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이걸 바탕 삼아 산 사람은 마음껏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면서 연민인지 자기연민인지 회고인지 회한인지 모를 감정에 흠뻑 빠져 지낼 수 있다. (-268-)


죽은 다음에는 어떤 세상을 만날까? 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나를 떠난 부모, 연인, 자식, 반려동물을 만날직도 모른다. 그럼 행복할까?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게 되어도 아버지는 아버지일까?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면 당장은 기쁘겠지만 이승의 질서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가 생길 법도 하다. 그곳 나름의 규칙도 법도도 있지 않을까? 또 관계라는 건 언제든 권태로워질 수도 곪았던 감정이 다시 터져 나눌 수도 있다. (-298-)


인간의 삶 그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삶을 기억하고, 죽음을 기록한다. 삶의 흔적과 죽음의 흔적을 동시에 남기며,삶의 원칙을 세우고자 하였다. 죽음을 그린다는 건, 예술 속에 채워진 죽음에 대한 아날로그적인 가치가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남겨진 신의 죽음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후 부활에도 죽음과 종교적 가치가 결합된다.


삶은 위대하다. 죽음은 더 위대하다. 때로는 자신의 죽음으로서, 진심과 진정성은 내보이고자 한다. 인간은 그래서 동물적 속성을 지니지만, 동물과 차별화하고자 한다.어둠과 밝음, 뭉크의 절규 뒤에 숨어있는 죽음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현존한다. 1494~1495년 피에르토 페루지노의 피에타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명화 1001점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영화 피에타로 재현되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파우로 프란체스카>에서는 인간의 욕정이 남자가 여자의 뺨에 입을 맞추는 기이한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는 검은 색으로 빛과 대조를 이뤄서 어둠의 화가로 대표하고 있으며, 카라바조의 <성 루치아의 매장>,<마테오를 부르심>은 16세기 중세 유럽의 표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인간의 본능적인 가치에 죽음으로 채우고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2-01-07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