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06년 6월
평점 :
운동경기에서, 선수가 자세를 낮춰 준비자세를 취했다고 경주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경주는 "출발"이라는 출발신호와 함께 시작된다. 스탈린이 한 일은 바로 이것이다. (p303)
현재까지 1949년 7월 한국군의 대북공격의 위험성을 알리는 수많은 정보보고와 징후들이 존재했지만, 공격 계획의 실재를 증명해주는 증거자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북한 노획문서들이 1950년 6월 북한의 전면적 공격을 증거하는 것과는 달리, 1949년 한국군의 대북공격과 관련된 문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격 계획자체가 작성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p397)
김일성은 실패에 대한 고려나 두려움 없이 무력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올라,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 3자의 합의는 미군 개입과 전쟁 실패의 경우, 대부분의 책임을 김일성이 져야 하는 구조를 원초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p495)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분명 그 전 해의 사건들이 1950년의 인식을 형성했다. 현지에 있는 미국인들은 1946년 이래 침략의 위협 속에 살아왔다. 남한은 너무 자주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쳐" 어느 누구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올라온 미국의 정보보고는 5년 동안 너무 많은 '소음'이 되어서, 그 누구도 전쟁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949년의 전투는 즉각 1950년의 인식을 형성했다. 1949년 여름에 전쟁 발발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1950년의 정보에 나타난 증거들은 상대적으로 그 색이 바래버렸다. (p673)
그동안 한국 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역사라 기정사실화 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국 전쟁은 북한에 대한 남침이며, 동족상잔이라 생각한다. 북한 주민들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우리의 입장과 정반대이다. 남한에 의한 북침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미국의 개입은 북한의 조선 해방운동을 방해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 생각하며,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색깔을 뛰고 있지만, 명분 쌓기 위한 서로의 이념적성향이 도드라진다. 이런 생각의 차이는 북한과 남한이 통일이 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념의 차이는 갈등을 잉태하고,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북한과 남한이 합쳐지는 것에 대해 기대반 걱정반 가지고 있 이유가 여기에 나타난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살아온 이들이 만나면 한순간은 반가울 수 있지만, 반드시 충돌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50년 6월 25일 그 시점으로 시간 이동하고 있다. 남한의 수도 서울이 북한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 북한에 의한 전쟁은 남한은 왜 속절 없이 무너졌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또한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과정은 광복 이후가 아닌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1900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은 소련의 사회적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소련이 일본으로 넘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한국과 북한이 전쟁을 펼칠 때 북한군은 미군의 개입보다 일본군의 개입을 더 두려워 했던 이유가 이 책에 나오고 있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이 일본의 천황에게 포기 각서를 받아낸 뒤, 남한과 북한이 38선을 기점으로 인위적인 선이 그어진 이유,일본이 안고 있는 두려움과 미국과 소련은중공군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그렇게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인위적인 선이 그어지고 말았다.
전쟁이 시작되려면 먾은 것이 준비되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남한과 북한은 전쟁을 할 수 있는 전략이나 전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북한의 초고위급 장교들이 러시아 출신인 점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들은 러시아어에 능통하여야 했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의 중고위급 간부들은 중국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잇다. 중공군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그들과 소통하면서 전쟁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 전쟁이 왜 북한에 의한 남침인지 수많은 역사적 사료와 외교문서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편년체적으로 쓰여져 있으며, 한국 전쟁을 분석한 문서 중에서 라주바예프 보고서와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 전쟁의 기원" 은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였다. 여기서 북한은 한국 전쟁에 대해서 북침이나 북벌, 남침 유도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승만 정부 당시 빨치산 토벌에 앞장선 신성모 국방장관을 포함한 군고위급 간부들의 행동 때문이다. 그 당시 이승만 정부는 김구와 대치상태였으며, 1949년 김구는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남한과 북한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여순 반란 이후, 1949년 3.8선을 중심으로 빈번한 충돌이 일어났으며, 옹진군과 양양 일대에 북한과 남한이 대치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1년 동안 북한과 남한의 충돌, 1949년 당시 북한의 군사력은 거의 비슷하였지만 , 1950년들어와서 급변하게 된다. 한국은 8만 5000여명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7만여명이 군사분계선과 수도권 방어에 치중하였다. 북한은 20만 명이 넘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러시아 스탈린에게 전쟁을 하기 위한 물자들을 빌려왔다.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으로 쓰여졌던 탱크들은 북한에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북한의 김일성이 계획한 남침은 러시아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시작되었다. 군사적 전술과 전략이 없었던 북한군은 러시아 자료를 번역해 남침을 시작하였으며, 한국 전쟁은 3단계의 계획하에 일어나게 되었다. 스탈린의 재가와 마오쩌둥의 동의하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미군의 개입이나 한국 전쟁이 북한에 실패로 돌아갈 경우 스탈린은 뒷짐지는 형국을 띄고 있었던 이유, 한국전쟁이 성공으로 끝나면 그 수확은 북한과 러시아, 중국이 나눠 가지만 실패로 끝난다면, 책임은 온전히 김일성 혼자 지고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