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이 책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을 펼치기 전 나는 [포 단편선]을 읽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어릴 적 아동도서로 [검은 고양이]를 달랑 한 편 접했던 터라 난 [포 단편선]을 꽤 만만히 여기고 있었는데 두께도 얇아서 가뿐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치울 요량이었다. 그런데 웬 걸,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책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애드가 앨런 포(1809~1849)는 소설로 장편은 없고 74편의 단편만 남겼다는데 대부분이 ‘우울과 공포’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4편만이 추리적 내용으로 한 작품이란다.
그래서였을까? 작품마다 뭔가 빈틈이 없고 빽빽하게 들어찬 듯한 것이 집중력을 요하고 있었다.
그러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 불쑥 내 시선은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에 쏠리고 있었다.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리고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소설 속에는 광폭한 오랑우탄 한 마리가 실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번역자는 오랑우탄을 ‘성성이’로 표현해 무척이나 낯설고 어색하게 만들어 유감이었지만)
그렇다면 혹시 이 ‘오랑우탄’이 저 ‘오랑우탄’?
급히 내 공상은 샛길로 접어들어 중구난방으로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 광폭한 ‘포의 오랑우탄’이 어쩌다 엄연한 남의 작품 표지 모델로 등장했을까? 가만, 그렇다면 그 제목 중 ‘불멸의 오랑우탄’이란 칼을 빼어 입에 물고 붉은 눈 희번덕거리는 ‘포의 오랑우탄’과 연관이 있단 말인가? 역시, 그렇다면 ‘포의 광폭한 오랑우탄’이 ‘야만성’도 부족해 ‘불멸성’까지 획득하고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종횡무진 신출귀몰 이제는 유럽에서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나타나 밀실살인을 저지르고 유유히 사라져 인간을 또다시 공포로 몰아넣고 농락한단 말인가?
사실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읽어보면 그가 과감하게 오랑우탄을 중요한 역할로 삼은 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조차 발표되기 전 19세기 초반을 살아온 포 자신에게 동물이되 인간과 흡사한 행태를 보이는 오랑우탄이란 유인원이 미스터리하게 느껴졌을 법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내달리던 나의 잡념을 접고 이제 정식으로 소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을 손에 쥐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만으로도 충분히 흡인력 있는 키워드지만 두 말이 보기 좋게 결합하여 매력적으로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보르헤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아니 그의 작품을 위시한 남미 소설 자체를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고도 호기심 가득히 발라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읽는 도중 문득 다가오는 소설의 느낌이란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접했을 때처럼 현학성을 앞세운 아찔함의 지배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남미문학이 어떤 고민을 담고 있었는지 모르나 내가 읽은 이 한 권의 소설은 지역성은 넘어선 세계 보편의 지적 소재를 가지도 잘도 요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굳이 우리에게 낯선 곳 지구의 남반구 얘기가 아니라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애드가 앨런 포의 ‘추리소설’을 기반으로 한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형태로 펼쳐졌기에
나는 전혀 어색함 없이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는 포의 작품세계에 대한 마니아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 속에서 밀실살인이 일어나고 용의자들은 주변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적 탐구자 보르헤스는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의 프랑스인 오귀스트 뒤팽을 닮은 활약을 펼쳐 보이며 사건을 풀어나간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화자 ‘포겔슈타인’이 살인현장과 피해자를 처음 목격한 자로서 증언을 포함하여 보르헤스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나누던 대화 등을 다시 정리해서 편지 형태로 보르헤스에게 보낸다.
자신이 보고 들었던 사건 진행 경험과 더불어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보르헤스와 친근한 대화가 가능했던 것에 나름 기쁨을 표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사건해결자이고 범인은 ‘불멸의 오랑우탄’이란 포를 사이에 둔 대결을 상징하는 것일까? 정 그렇다면 ‘불멸의 오랑우탄’이란 지능적 밀실살인범을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동물원 철창 안에서? 아니면 도시의 어두운 미로 같은 골목길을 사람들의 이목을 뒤로하고 오늘도 호기롭게 어슬렁거리며 다닐 텐데 그 붉은 색 띠는 털과 흔들거리는 긴 팔의 존재를 왜 그렇게도 우리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의 불멸성이 증거 하듯 먼 과거로부터 생존해온 생명력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소설 속에는 ‘포의 야만적 오랑우탄’외에 또 다른 오랑우탄 한 마리가 등장한다. 존 디라는 16세기 신비주의학자로 이 역사적 인물이 비유로 표현했다는 ‘불멸의 오랑우탄’ 바로 그것이다.
현대 미술의 이해 못할 추상성을 조롱하기 위해 곧잘 드러내는 얘기가 있다. 침팬지에게 붓을 쥐어주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게 한 후 그것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했을 때 반응 같은 것이다. 아마도 멋들어지게 표현했을 침팬지의 추상화를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작품이라 칭하지 않는다. ‘포의 오랑우탄’이든 ‘불멸의 오랑우탄’이든 만약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추리소설이 갖은 의외성은 있을지언정 치밀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으로서의 가치로는 우리를 납득시키는 어렵다. 최소한 자기들이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행위의 책임까지 인식시킬 수 없으니까...
이 두 마리의 오랑우탄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범인으로서 맹점이 이것인데 반해 차별성이라고 할까 ‘불멸의 오랑우탄’에게는 좀 더 묵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이것이 소설 제목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그것은 붓을 휘두르는 침팬지도 아니요, 길들여지지 않은 포의 야만적인 오랑우탄도 아니며, 바로 펜대를 놀리는 녀석이라는 데 있다. 뭔가 잔뜩 써 늘어놓긴 했는데 자기가 무엇을 써놓았는지 조차 모르는 녀석의 무지를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옳단 말인가?
녀석이 늘어놓은 글이 때로는 비수가 되어 누군가에게 살인에 버금가는 깊은 고통을 안겨 줄 수도 있고, 이 글자 저 글자를 제멋대로 조합해 놓았는데 사실은 세상에 공표해서는 안 되는 천기를 누설한 거라면?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알아차렸듯이 문제는 ‘불멸성을 띤 오랑우탄을 닮은 무엇’이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녀석에게서 우리가 강구해야할 해결책이란 무엇일까?
오랑우탄이 어서 진화해서 자기 제어력을 갖든지, 아니면 오랑우탄에게서 불멸성을 빼앗든지 하면 위험이 좀 감소될까?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우리 앞에서 오늘도 꿈틀거린다.
소설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거울’이 갖는 특성과 의미도 꽤 인상적이다.
작중 보르헤스는 반복적으로 고백한다. “나는 거울이 무섭다”고....
일상 속에 침투해 있는 이 장치는 그 일상적 효과와 인식 때문에 추리소설이나 공포영화에
나를 비추되 나와 반대되는 속성 때문에 작품 속에서도 일례로서 알파벳들이 거울을 중심으로 대치되어 다양하게 읽힐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집요하게 대칭되는 것에 집착적인 흔적을 곳곳에 숨겨 놓았는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대칭되는 보르헤스 루이스 호르헤 라는 정반대 성격의 인물이라든지 북반구와 반대되는 사건의 장소 남반구 역시 적도를 중심으로 하는 대칭이 아니던가?
곧 눈에 보이는 사실은 하나인 듯하지만 그 너머 모습은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해서 오는 혼란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실 자체로 받아들인다.
이 마술 같은 오독을 경각심을 갖고 조심하는 가운데 추리 소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이 던져주는 지적 유희를 보르헤스라는 길잡이를 통해 즐기도록 하자.
한 가지 재미를 배가시킬 힌트로 덧붙이자면 이 소설을 읽기 전 워밍업으로 포의 대표적인 작품집을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 소설에 한결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는데 큰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과연 내가 읽은 것이 ‘포겔슈타인’의 보르헤스에게 보고 하는 밀실 살인사건에 대한 목격(?)담인지 아니면 포겔슈타인이 작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한 편의 추리소설 속의 ‘추리 소설’이었는지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종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