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마침 이 책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을 펼치기 전 나는 [포 단편선]을 읽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어릴 적 아동도서로 [검은 고양이]를 달랑 한 편 접했던 터라 난 [포 단편선]을 꽤 만만히 여기고 있었는데 두께도 얇아서 가뿐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치울 요량이었다. 그런데 웬 걸,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책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애드가 앨런 포(1809~1849)는 소설로 장편은 없고 74편의 단편만 남겼다는데 대부분이 ‘우울과 공포’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4편만이 추리적 내용으로 한 작품이란다.

그래서였을까? 작품마다 뭔가 빈틈이 없고 빽빽하게 들어찬 듯한 것이 집중력을 요하고 있었다.

그러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 불쑥 내 시선은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에 쏠리고 있었다.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리고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소설 속에는 광폭한 오랑우탄 한 마리가 실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번역자는 오랑우탄을 ‘성성이’로 표현해 무척이나 낯설고 어색하게 만들어 유감이었지만)

 

그렇다면 혹시 이 ‘오랑우탄’이 저 ‘오랑우탄’?

급히 내 공상은 샛길로 접어들어 중구난방으로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 광폭한 ‘포의 오랑우탄’이 어쩌다 엄연한 남의 작품 표지 모델로 등장했을까? 가만, 그렇다면 그 제목 중 ‘불멸의 오랑우탄’이란 칼을 빼어 입에 물고 붉은 눈 희번덕거리는 ‘포의 오랑우탄’과 연관이 있단 말인가? 역시, 그렇다면 ‘포의 광폭한 오랑우탄’이 ‘야만성’도 부족해 ‘불멸성’까지 획득하고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종횡무진 신출귀몰 이제는 유럽에서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나타나 밀실살인을 저지르고 유유히 사라져 인간을 또다시 공포로 몰아넣고 농락한단 말인가?

 

사실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읽어보면 그가 과감하게 오랑우탄을 중요한 역할로 삼은 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조차 발표되기 전 19세기 초반을 살아온 포 자신에게 동물이되 인간과 흡사한 행태를 보이는 오랑우탄이란 유인원이 미스터리하게 느껴졌을 법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내달리던 나의 잡념을 접고 이제 정식으로 소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을 손에 쥐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만으로도 충분히 흡인력 있는 키워드지만 두 말이 보기 좋게 결합하여 매력적으로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보르헤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아니 그의 작품을 위시한 남미 소설 자체를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고도 호기심 가득히 발라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읽는 도중 문득 다가오는 소설의 느낌이란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접했을 때처럼 현학성을 앞세운 아찔함의 지배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남미문학이 어떤 고민을 담고 있었는지 모르나 내가 읽은 이 한 권의 소설은 지역성은 넘어선 세계 보편의 지적 소재를 가지도 잘도 요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굳이 우리에게 낯선 곳 지구의 남반구 얘기가 아니라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애드가 앨런 포의 ‘추리소설’을 기반으로 한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형태로 펼쳐졌기에

나는 전혀 어색함 없이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는 포의 작품세계에 대한 마니아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 속에서 밀실살인이 일어나고 용의자들은 주변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적 탐구자 보르헤스는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의 프랑스인 오귀스트 뒤팽을 닮은 활약을 펼쳐 보이며 사건을 풀어나간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화자 ‘포겔슈타인’이 살인현장과 피해자를 처음 목격한 자로서 증언을 포함하여 보르헤스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나누던 대화 등을 다시 정리해서 편지 형태로 보르헤스에게 보낸다.

자신이 보고 들었던 사건 진행 경험과 더불어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보르헤스와 친근한 대화가 가능했던 것에 나름 기쁨을 표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보르헤스’는 사건해결자이고 범인은 ‘불멸의 오랑우탄’이란 포를 사이에 둔 대결을 상징하는 것일까? 정 그렇다면 ‘불멸의 오랑우탄’이란 지능적 밀실살인범을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동물원 철창 안에서? 아니면 도시의 어두운 미로 같은 골목길을 사람들의 이목을 뒤로하고 오늘도 호기롭게 어슬렁거리며 다닐 텐데 그 붉은 색 띠는 털과 흔들거리는 긴 팔의 존재를 왜 그렇게도 우리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의 불멸성이 증거 하듯 먼 과거로부터 생존해온 생명력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소설 속에는 ‘포의 야만적 오랑우탄’외에 또 다른 오랑우탄 한 마리가 등장한다. 존 디라는 16세기 신비주의학자로 이 역사적 인물이 비유로 표현했다는 ‘불멸의 오랑우탄’ 바로 그것이다.

 

현대 미술의 이해 못할 추상성을 조롱하기 위해 곧잘 드러내는 얘기가 있다. 침팬지에게 붓을 쥐어주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게 한 후 그것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했을 때 반응 같은 것이다. 아마도 멋들어지게 표현했을 침팬지의 추상화를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작품이라 칭하지 않는다. ‘포의 오랑우탄’이든 ‘불멸의 오랑우탄’이든 만약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추리소설이 갖은 의외성은 있을지언정 치밀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으로서의 가치로는 우리를 납득시키는 어렵다. 최소한 자기들이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행위의 책임까지 인식시킬 수 없으니까...

이 두 마리의 오랑우탄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범인으로서 맹점이 이것인데 반해 차별성이라고 할까 ‘불멸의 오랑우탄’에게는 좀 더 묵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이것이 소설 제목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그것은 붓을 휘두르는 침팬지도 아니요, 길들여지지 않은 포의 야만적인 오랑우탄도 아니며, 바로 펜대를 놀리는 녀석이라는 데 있다. 뭔가 잔뜩 써 늘어놓긴 했는데 자기가 무엇을 써놓았는지 조차 모르는 녀석의 무지를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옳단 말인가?

녀석이 늘어놓은 글이 때로는 비수가 되어 누군가에게 살인에 버금가는 깊은 고통을 안겨 줄 수도 있고, 이 글자 저 글자를 제멋대로 조합해 놓았는데 사실은 세상에 공표해서는 안 되는 천기를 누설한 거라면?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알아차렸듯이 문제는 ‘불멸성을 띤 오랑우탄을 닮은 무엇’이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녀석에게서 우리가 강구해야할 해결책이란 무엇일까?

오랑우탄이 어서 진화해서 자기 제어력을 갖든지, 아니면 오랑우탄에게서 불멸성을 빼앗든지 하면 위험이 좀 감소될까?

두 가지 모두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우리 앞에서 오늘도 꿈틀거린다.

 

소설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거울’이 갖는 특성과 의미도 꽤 인상적이다.

작중 보르헤스는 반복적으로 고백한다. “나는 거울이 무섭다”고....

일상 속에 침투해 있는 이 장치는 그 일상적 효과와 인식 때문에 추리소설이나 공포영화에

꽤 좋은 소재로 사용된다.

나를 비추되 나와 반대되는 속성 때문에 작품 속에서도 일례로서 알파벳들이 거울을 중심으로 대치되어 다양하게 읽힐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집요하게 대칭되는 것에 집착적인 흔적을 곳곳에 숨겨 놓았는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대칭되는 보르헤스 루이스 호르헤 라는 정반대 성격의 인물이라든지 북반구와 반대되는 사건의 장소 남반구 역시 적도를 중심으로 하는 대칭이 아니던가?

곧 눈에 보이는 사실은 하나인 듯하지만 그 너머 모습은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해서 오는 혼란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실 자체로 받아들인다.

 

이 마술 같은 오독을 경각심을 갖고 조심하는 가운데 추리 소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이 던져주는 지적 유희를 보르헤스라는 길잡이를 통해 즐기도록 하자.

한 가지 재미를 배가시킬 힌트로 덧붙이자면 이 소설을 읽기 전 워밍업으로 포의 대표적인 작품집을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 소설에 한결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는데 큰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과연 내가 읽은 것이 ‘포겔슈타인’의 보르헤스에게 보고 하는 밀실 살인사건에 대한 목격(?)담인지 아니면 포겔슈타인이 작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한 편의 추리소설 속의 ‘추리 소설’이었는지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종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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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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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살의나 극단적인 공포, 분노를 느껴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운이 따른 인생을 산 셈이다.

물론 같은 상황을 동일하게 겪고도 나타내는 반응은 천차만별이고, 천성과 경험은 그렇게 결합되어 인성을 만들어가는 거지만 말이다.

 

소설 [한니발 라이징]을 얘기하기 앞서 [양들의 침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한니발 렉터에 대해 극도로 표현을 자제해 신비적인 악인 한 명을 만들어놓았다.

주인공이나 범인 못지않은 무게로 다뤄지되 의외로 독자에게 제시된 설명은 제한적이어서 한니발 렉터란 인물을 파악하는 데 꽤 감질나게 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오지에 사는 종족도 아닌 담에야 식인 습성을 가진 이 뛰어난 지력과 정신의 소유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납득해야 할지 난감해 할 때 작가는 이 별난 캐릭터를 그의 작품마다 계속 우려먹고 있었다.

 

[한니발 라이징].

이제서 그 뚜껑을 제대로 여는 기분이다.

그의 트라우마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의 인생에서 벌어진 사건을 들여다보는 일은 비로소 퍼즐의 조각을 맞춰 나가는 결정적 힌트로서 나의 구미를 당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온몸이 결박당하고 마스크까지 씌어져 오히려 위협적으로 부각된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제 작가는 그의 고통과 경험을 설득력 있게 펼쳐보여야 한다.

마침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탄생의 도화선은 ‘복수’였다.

그럼 복수 뒤에는....?

여기서부터 엇갈리고 뒤틀린 한니발을 설명하기에는 빈약해 보인다.

그저 복수 뒤에 사이코패스 하나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도 되는 것일까?

악몽에 시달리던 젊은 시절 한니발은 결국 평화로운 잠을 얻는 대신 꿈을 잃는다.

상처받지 않는 대신 사랑 또한 받을 수 없는 비극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에게 형벌은 다 한 것인가?

인간성 상실이나 파괴로 한니발 렉터의 남은 생 수 많은 엽기적 살인의 원인으로 치부하기에는 왠지 너무 가볍다.

 

난 그저 재미나 흥미 위주의 대중 소설 한 권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꼴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째 한니발 렉터를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영화 속 007시리즈 색다른 제임스 본드 같은 인물의 무게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또 다른 비극이요 작가 토마스 해리스의 한계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한계를 충분히 감안한다면 소설은 속도감 있고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레이디 무라사키의 이 신비스러운 존재를 보고 있노라면 이 밑도 끝도 없는 이국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은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뭐, 동양의 문화, 일본의 하이쿠를 무게감 있게 그들이 이해한다면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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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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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왠지 인생에서 진 것 같은 패배감이 드는데, 실제로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말이지. 이봐, 내 말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미무라 군이라면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테니까.” - p179

 

과연 그런 것일까?

아르바이트 주유소 점장의 이 얘기는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예견이었을까?

미무라 슌은 결국 ‘나가사키’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성장하고 퇴락해간 집안처럼 그의 젊은 날의 모습도 급속히 시들어간다.

 

조선소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사고로 죽고 엄마 치즈루에 이끌려 슌과 유타는 외가에서 살게 된다.

외가는 작은 야쿠자 집안이었다.

항상 온 몸에 문신이 그려진 덩치 큰 남자들이 북적대고 저녁이면 술판에 여자들은 시중을 들어야했다.

집 밖 주변 사람들은 앞에서 굽실대도 돌아서면 손가락질 했다.

결정적으로 집안을 이끌던 둘째 삼촌 분지가 형무소에 들어간 사이 집안의 남자들은 모습을 감췄다.

점점 남자들의 집은 여자와 아이들의 집이 되었고 시끌벅적함은 잠잠한 고요 속에 삼켜졌다.

엄마 치즈루마저 남자를 따라 떠난 뒤 근근히 생기를 이어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슌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지켜봤던 미무라 가의 모습을 담담하고 쓸쓸한 시선으로 훑어나간다.

나가사키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남자.

떠나려다 주저앉은 남자.

접힌 날개는 쉽게 펴지지 않았다.

 

요시다 슈이치의 많은 작품들이 이미 국내에 많이 소개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접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나 작품마다의 비교는 아쉽지만 불가능하다.

 

‘나가사키’는 장소로서 공간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품은 시간이다.

어디이든 다르겠는가?

그 흐름의 변화는 항상 경험하는 모든 이에게 애잔한 슬픔이 배어난 회상도 함께 감내하게 한다.

특히나 접힌 날개를 소유한 자라면 더욱더.

 

곧 요시다 슈이치의 다른 작품에도 시선을 옮겨 다른 이야기도 귀담아두고 싶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근래 부쩍 늘어난 일본 소설 중에는 항상 신경을 거슬리는 번역상의 문제가 숨어있다.

그런데 이 소설 ‘나가사키’는 역자가 국문학을 전공한 자여서 일까?

우리말의 문장으로 제법 매끄럽게 읽힌다.

이것만으로도 반갑고 한결 작품의 질을 드높여 줘서 읽는 데 즐거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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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비밀의 부채 1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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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통, 전족, 의자매, 누슈....

이런 것들이 중국 전체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관습인지 아니면 소설 속 야오족에게만 국한된 고유전통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느 것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인다.

같은 동아시아라 하지만 중국에서도 오지인 야오족의 풍속은 생경한 것 투성이였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와 많이 다르면서 많이 닮아있었다.

이런 애매모호함으로밖에 소설 전체의 감상을 옮길 수 없는 것에 솔직히 무력감을 느낀다.

 

소설은 야오족 통코우 마을 ‘루마님’이 팔십 평생, 조용히 앉아서 보낸 시절 과거를 회상하며 친정 푸웨이 마을 ‘나리’로 지냈던 어린 시절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반추해보는 고백 글이다.

당시 여자들의 평균 연령이 대개 40세로 장수하면 50세였다니까, 루마님의 80세 나이는 무려 배나 살았던 셈이다.

그만큼 자신은 풍족하고 부유했으며 모두에게 권위로운 모습으로 존경받았지만 태생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전족’에 의지한 어머니의 욕망이 빚은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부모 밑에서 지내던 그녀에게 전족할 나이 6세 때 타고난 운명으로 전족만 잘하면 부잣집으로 시집갈 사주라는 점쟁이의 얘기를 듣는다.

동시에 ‘라오통’ 역시 맺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전해 듣고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아이 ‘설화’와 라오통을 맺는다.

 

같이 성장하고 같이 늙어가는 사이, 여자들의 글자 누슈를 통해 우정을 유지하고 삶의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나누며 계집아이에서 소녀로, 또 결혼해서 여인으로 성숙해간다.

그 과정에서 당시 여성에게 짐 지어진 삶의 굴레를 고스란히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진솔하게 작가는 섬세한 심리 묘사 와 더불어 표현하고 있었다.

 

 

* 전족

 

여자아이 여섯 살이면 밑바닥 인생을 살지 않을 사회적 신분을 위해 전족을 하는데 작은 발 하늘거리는 걸음걸이를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으로까지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남성의 성적 욕구와 맞닿아 있는 관습이다.

 

예전부터 이런 것이 있다는 얘기야 언뜻 흘려들어왔지만 소설 속에서 전족을 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의 발을 기형으로 만들어 안으로 오므라들게 만드는 데 자그마치 2년에 걸쳐 완성된다. 열 명 중 하나가 전족을 하다 죽는다는 사실만으로 위험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녀들은 참 안 됐구나가 아니라 왜 내가 순간 모욕과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그건 마치 여성 할례에 대해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무참한 고통의 압박감이 밀려왔다.

 

 

* 누슈

 

여성의 문자가 있었다.

천 년을 비밀스럽게 여자가 여자에게 전수하며 은밀히 이어져온 속삭임.

 

사실 그렇게 폐쇄되고 그렇게 제한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싶을 만큼 여성들의 행동반경은 예상외로 좁아서 꽤 놀라웠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그저 암흑 속에서 감정만 들끓고 그것을 삭히는 일상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숨통을 틔어주는 수단이었던 누슈는 여자들의 푸념과 한 숨, 일상, 꿈을 담기에 역할을 톡톡히 해 냈던 것 같다.

 

 

*라오통, 의자매 그리고 우정....

 

낯선 개념인 의자매 더 나아가 라오통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 결혼 전까지 관계가 유지되는 같은 또래의 모임인 의자매는 적은 수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라오통은 단 한 사람과 평생 관계가 유지된다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곧 결혼한 남편 못지않은 깊이 있는 관계로 인정받는 것이어서 유일성이 조건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여자들에게는 친구라는 일반적 개념과 명칭이 따로 있지 않았다. 같은 동네 처녀들이라도 의자매가 아니면 그다지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적으로 집중적일 수는 있어도 아까도 얘기했던 제한적인 삶을 꽤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에서 루마님 나리는 자신의 라오통 ‘설화’가 시댁마을 다른 의자매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얘기에 불같은 질투를 느끼며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는 부분이 나온다.

왜 남편보다 깊은 관계가 동성과 유지되고 인정되는지 모르겠으나 과연 여자에게 우정이란 무엇일까?

 

루마님의 말년 고백처럼 설화와의 갈등에서 나는 간혹 내 성정이 가져온 그림자를 발견하고 뜨끔했다. 누군가에게 충고하고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나의 뜻에 반하는 상대의 다른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또 설화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애원. 쉽게 충고하고 쉽게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나의 성급함과 옅은 인간성. 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라오통 나리와 설화를 통해 재발견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참 많이 부끄러웠다.

 

 

*여자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작가의 이 질문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그녀들 속으로 들어가 생생히 그녀들의 삶을 보고 느끼는 순간부터 잠재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딸아이의 발을 싸매며 매섭게 몰아치는 정을 주지 않는 엄마 또 그런 엄마에게 정에 굶주려하면서도 자신 역시 결혼을 하여 자신과 라오통 설화에게 끊임없이 아들을 낳아 남자의 어머니로서 여자의 삶을 보장 받아야 한다고 다그치는 모습과 욕구는 사실 여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내가 그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산다고, 이 질문에서 자유로운 건 더더욱 아니다.

선택이 주어졌을 때 책임이 따르고 결과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진정한 해답을 얻는 과정은 지금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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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 2005 페미나상 상 수상작
레지스 조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푸른숲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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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늙은이가 되지 못해. 아흔여덟 살이 되어도 여전히 어두컴컴한 우물 같은 불행의 순간과 행복의 순간을 간직한 청춘인 거야. 성숙하고 절제된 사람이 되려면, 더 이상 좋은 기분에서 슬픔으로, 찬란한 감탄에서 좌절로 분별없이 건너뛰지 않으려면, 의심을 품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단 한 번이라도 가치 있는 조언을 해줄 만큼 충분한 경험을 갖추려면 오륙 세기는 기다려야 할 거다.” (p64 중에서)

 

-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그리고 삶은 계속될 것이다. 말도 물론 이어질 것이다.

 

말은 존재인가?

난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유용성 내지 가치는 차치하고, 말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해서 실체를 불신하는 건가?

아니다. 말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할 뿐이지 불신할 필요는 없다.

문장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거짓은 아니다.

꽤 변덕스러워 일관성을 잃어도 의식의 흐름이 그 따위인 걸 어찌하랴?

말이 변덕스러운 건 실체가 변덕스러운 탓이다.

실체가 변덕스러운 건........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아~!이것이 프랑스 소설이라는 건가?

제대로 맛을 보고 확인한 셈이다.

장황하고 다변적이고 관념적이며 일상을 얘기하지만 일상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주변적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주인공은 사라지고 말만 둥둥 떠다니며 중심을 차지하고 위력적이면서 모호한가 하면 위협적이다.

그러니까,

내가 서평이라고 몇 자 긁적이면서 이리도 호들갑스럽고 횡설수설하는 건 모두 이 빌어먹을 “프.랑.스.소.설” 탓이다.

이 얼어죽을 한 권의 프랑스 소설이 배설하듯 뱉어낸 말에 치이다보면 얼이 빠지고 제 정신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난 전혀 잘못이 없다. (그래도 난 이성적인 상태가 분명하다. 변명부터 늘어놓으며 자기 방어부터 제대로 하는 걸 보면)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제목을 한참 들여다본다. 그리고 원제를 쓰윽 훑어보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Asiles de fous"

불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종이 장을 뚫을 것처럼 주시해도 뜻을 알 리 없다.

그래도 그렇지.

문장의 길이로 봐서 몇 단어로 된 이 짧은 제목이 최소한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같은 긴 문장으로 둔갑할 수는 없다는 걸 이내 파악하고 나의 발작은 시작된다.

빌어먹을, (책을 만든 사람들을 향해) 은근히 질겅거리듯 말을 씹는다.

너네 책제목에 손댔구나?

그리고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이건 또 뭐냐?

‘스물아홉’을 의인화해서 ‘그’로 표현하고 ‘나’를 떠나므로 해서 ‘난 서른이 되었다’는 뭐 그런 뜻이냐? 내 나름대로 재빨리 넘겨짚어 본다.

 

숙주의 가죽을 뚫고 들어가 몸통 속을 휘젓고 다니며 야금야금 뜯어먹고 파먹고 빨아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입구부터 암호에 걸려 봉쇄된 기분이 참 떨떠름하다.

이런 경험을 종종 겪는다.

그 잘나빠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봤을 때도 대체 참을 수 없는 건 ‘존재’인지 아니면 ‘가벼움’인지 몰라 끙끙대다가 책 뒤편 어느 구석에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나 겨우 알았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곧 참을 수 없는 건 가벼움이었다.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이것도 딱 그 짝이다. 성질 급한 나는 소설을 어느 정도 넘기고서야 알게 되었다.

남자가 스물아홉 살의 여자를 떠났다는 단순한 말을.

그러나 동시에 이 문장은 이 책의 시작이요 끝이며 전체이자 부분이다.

“그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 하나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별이 사랑을 얘기하고, 사람을 관통해서 세상을 표현하고 세상은 온갖 만물을 담는다.

그래, 지구는 중력이 작용해서 지구 표면을 인간은 유영하듯 넘실넘실 춤을 추며 걸어 다닐 필요가 없지 정도로 단순명쾌한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사람이 둥둥 떠다니지 않는 대신 말이 공기 속에 숨어서 염탐하다 달콤한 꿀이 되고 총알이 되고 비가 되고 빛이 되고...또는 창조하고....틀어쥐고...

분명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이 맞긴 맞나보다.

 

책 첫 장을 펼쳐봐라. 갑자기 말들이 벌떼가 되어 달려든다.

난 깜짝 놀라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엉덩이는 하늘을 향해 들려 있다.

마치 닭들이 자기 몸뚱이보다도 작은 바위 뒤에 대가리만 숨기면 안전하다고 느끼며 숨어든 꼴이다. 그가 떠나는 바람에 스물아홉의 그녀는 정신분열증이라도 일으켰는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그래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읽는 내가 오히려 정신을 추스르고 있을 즈음 갑자기 남자의 아버지가 나타나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줄줄 물이 새듯 말이 새고 있었다. 난 순간 그가 고치겠다고 가져온 새 수도꼭지를 뺏어서 그의 입에 달아주고 싶었다. 물론 이음새도 단단히 막아서 더 이상 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일 없듯 말도 꽉 잠가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전화 통화를 시작으로 남자 어머니의 등장에는 아니 어머니의 말의 등장에는 주인공 스물아홉 그녀처럼 나도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침묵을 지키다 말에 넌더리를 내고 있을 때, 드디어 떠나신 님 그 남자가 술에 쩔어 독백을 한다. 사건의 당사자에게서 직접 뭔가 듣고 확인하고 싶었던 나는 이 술주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참아야했다. 휴~!!참고 참다가 보니 책 한 권이 끝났네?

 

빌어먹을, 책 속의 인물들이 토해 낸 말들을 내게 꾸역꾸역 먹게 한 작가 레지스 조프레인지 조프레 레지스인지 대체 어떤 작자일까?

그는 어쩌면 은밀한 비의가 담긴 주문을 외워 최면을 거는 요상한 마법사일지 모른다. 뾰족한 모자를 숨기고 시치미 떼고서 아닌 척 곁눈질로 쳐다보는 책 날개 속의 사진에서 나는 그것을 미리 꿰뚫어 봤어야 했다.

지금도 지하 어딘가에서 이말 저말 섞어 영묘한 말과 상황을 만들고 있는 아주 고약하고 괴팍한 연금술사일지도 모른다.

이 고약한 작자가 하필 꽤 유능해서 그가 젓가락을 휘휘 저어 만든 한 잔의 또는 한 권의 책을 마시자 나는 그만 두 어깨가 축 처지고 삽자루라도 하나 구해 어깨에 둘러맨 다음 집 뒤곁으로 가서 땅을 열심히 판 뒤 내가 들어갈 관이라도 묻고 그 속에 들어가 드러누워 편히 쉬었으면 딱 좋을 성 싶다.

 

한마디로 떠난 건 ‘그‘만이 아니라 ’세상’도 떠나고 ‘읽는 나’도 떠난 것이었는데 결국 돌아서보니 모든 게 내 등짝에 다 달라붙어 나와 함께 와 버렸네?

이거 대체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꿀꿀하면서도 아찔하면서도 축축하면서도 건조해지는 희한한 맛에 빠져 쌀뜨물처럼 뿌옇고 시커먼 찌꺼기들이 둥둥 떠다니는 구정물 속에서 꼬르륵꼬르륵 가라앉을까봐 버둥거리면서도 왜 물가로 나가려 들지 않는지 내 자신도 모르겠다.

이 기분 이대로 잠시 동안 젖어있고 싶은.....자학(?)이라도 빠진 걸까?

레지스 조프레. 주문을 걸어도 제대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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