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비밀의 부채 1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라오통, 전족, 의자매, 누슈....

이런 것들이 중국 전체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관습인지 아니면 소설 속 야오족에게만 국한된 고유전통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느 것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인다.

같은 동아시아라 하지만 중국에서도 오지인 야오족의 풍속은 생경한 것 투성이였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와 많이 다르면서 많이 닮아있었다.

이런 애매모호함으로밖에 소설 전체의 감상을 옮길 수 없는 것에 솔직히 무력감을 느낀다.

 

소설은 야오족 통코우 마을 ‘루마님’이 팔십 평생, 조용히 앉아서 보낸 시절 과거를 회상하며 친정 푸웨이 마을 ‘나리’로 지냈던 어린 시절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반추해보는 고백 글이다.

당시 여자들의 평균 연령이 대개 40세로 장수하면 50세였다니까, 루마님의 80세 나이는 무려 배나 살았던 셈이다.

그만큼 자신은 풍족하고 부유했으며 모두에게 권위로운 모습으로 존경받았지만 태생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전족’에 의지한 어머니의 욕망이 빚은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부모 밑에서 지내던 그녀에게 전족할 나이 6세 때 타고난 운명으로 전족만 잘하면 부잣집으로 시집갈 사주라는 점쟁이의 얘기를 듣는다.

동시에 ‘라오통’ 역시 맺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전해 듣고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아이 ‘설화’와 라오통을 맺는다.

 

같이 성장하고 같이 늙어가는 사이, 여자들의 글자 누슈를 통해 우정을 유지하고 삶의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나누며 계집아이에서 소녀로, 또 결혼해서 여인으로 성숙해간다.

그 과정에서 당시 여성에게 짐 지어진 삶의 굴레를 고스란히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진솔하게 작가는 섬세한 심리 묘사 와 더불어 표현하고 있었다.

 

 

* 전족

 

여자아이 여섯 살이면 밑바닥 인생을 살지 않을 사회적 신분을 위해 전족을 하는데 작은 발 하늘거리는 걸음걸이를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으로까지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남성의 성적 욕구와 맞닿아 있는 관습이다.

 

예전부터 이런 것이 있다는 얘기야 언뜻 흘려들어왔지만 소설 속에서 전족을 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의 발을 기형으로 만들어 안으로 오므라들게 만드는 데 자그마치 2년에 걸쳐 완성된다. 열 명 중 하나가 전족을 하다 죽는다는 사실만으로 위험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녀들은 참 안 됐구나가 아니라 왜 내가 순간 모욕과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그건 마치 여성 할례에 대해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무참한 고통의 압박감이 밀려왔다.

 

 

* 누슈

 

여성의 문자가 있었다.

천 년을 비밀스럽게 여자가 여자에게 전수하며 은밀히 이어져온 속삭임.

 

사실 그렇게 폐쇄되고 그렇게 제한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싶을 만큼 여성들의 행동반경은 예상외로 좁아서 꽤 놀라웠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그저 암흑 속에서 감정만 들끓고 그것을 삭히는 일상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숨통을 틔어주는 수단이었던 누슈는 여자들의 푸념과 한 숨, 일상, 꿈을 담기에 역할을 톡톡히 해 냈던 것 같다.

 

 

*라오통, 의자매 그리고 우정....

 

낯선 개념인 의자매 더 나아가 라오통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 결혼 전까지 관계가 유지되는 같은 또래의 모임인 의자매는 적은 수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라오통은 단 한 사람과 평생 관계가 유지된다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곧 결혼한 남편 못지않은 깊이 있는 관계로 인정받는 것이어서 유일성이 조건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여자들에게는 친구라는 일반적 개념과 명칭이 따로 있지 않았다. 같은 동네 처녀들이라도 의자매가 아니면 그다지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적으로 집중적일 수는 있어도 아까도 얘기했던 제한적인 삶을 꽤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에서 루마님 나리는 자신의 라오통 ‘설화’가 시댁마을 다른 의자매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얘기에 불같은 질투를 느끼며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는 부분이 나온다.

왜 남편보다 깊은 관계가 동성과 유지되고 인정되는지 모르겠으나 과연 여자에게 우정이란 무엇일까?

 

루마님의 말년 고백처럼 설화와의 갈등에서 나는 간혹 내 성정이 가져온 그림자를 발견하고 뜨끔했다. 누군가에게 충고하고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나의 뜻에 반하는 상대의 다른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또 설화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애원. 쉽게 충고하고 쉽게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나의 성급함과 옅은 인간성. 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라오통 나리와 설화를 통해 재발견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참 많이 부끄러웠다.

 

 

*여자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작가의 이 질문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그녀들 속으로 들어가 생생히 그녀들의 삶을 보고 느끼는 순간부터 잠재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딸아이의 발을 싸매며 매섭게 몰아치는 정을 주지 않는 엄마 또 그런 엄마에게 정에 굶주려하면서도 자신 역시 결혼을 하여 자신과 라오통 설화에게 끊임없이 아들을 낳아 남자의 어머니로서 여자의 삶을 보장 받아야 한다고 다그치는 모습과 욕구는 사실 여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내가 그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산다고, 이 질문에서 자유로운 건 더더욱 아니다.

선택이 주어졌을 때 책임이 따르고 결과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진정한 해답을 얻는 과정은 지금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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