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살의나 극단적인 공포, 분노를 느껴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운이 따른 인생을 산 셈이다.
물론 같은 상황을 동일하게 겪고도 나타내는 반응은 천차만별이고, 천성과 경험은 그렇게 결합되어 인성을 만들어가는 거지만 말이다.
소설 [한니발 라이징]을 얘기하기 앞서 [양들의 침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한니발 렉터에 대해 극도로 표현을 자제해 신비적인 악인 한 명을 만들어놓았다.
주인공이나 범인 못지않은 무게로 다뤄지되 의외로 독자에게 제시된 설명은 제한적이어서 한니발 렉터란 인물을 파악하는 데 꽤 감질나게 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오지에 사는 종족도 아닌 담에야 식인 습성을 가진 이 뛰어난 지력과 정신의 소유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납득해야 할지 난감해 할 때 작가는 이 별난 캐릭터를 그의 작품마다 계속 우려먹고 있었다.
그의 트라우마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의 인생에서 벌어진 사건을 들여다보는 일은 비로소 퍼즐의 조각을 맞춰 나가는 결정적 힌트로서 나의 구미를 당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온몸이 결박당하고 마스크까지 씌어져 오히려 위협적으로 부각된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제 작가는 그의 고통과 경험을 설득력 있게 펼쳐보여야 한다.
마침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탄생의 도화선은 ‘복수’였다.
여기서부터 엇갈리고 뒤틀린 한니발을 설명하기에는 빈약해 보인다.
그저 복수 뒤에 사이코패스 하나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도 되는 것일까?
악몽에 시달리던 젊은 시절 한니발은 결국 평화로운 잠을 얻는 대신 꿈을 잃는다.
상처받지 않는 대신 사랑 또한 받을 수 없는 비극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에게 형벌은 다 한 것인가?
인간성 상실이나 파괴로 한니발 렉터의 남은 생 수 많은 엽기적 살인의 원인으로 치부하기에는 왠지 너무 가볍다.
난 그저 재미나 흥미 위주의 대중 소설 한 권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꼴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째 한니발 렉터를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영화 속 007시리즈 색다른 제임스 본드 같은 인물의 무게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또 다른 비극이요 작가 토마스 해리스의 한계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한계를 충분히 감안한다면 소설은 속도감 있고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레이디 무라사키의 이 신비스러운 존재를 보고 있노라면 이 밑도 끝도 없는 이국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은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뭐, 동양의 문화, 일본의 하이쿠를 무게감 있게 그들이 이해한다면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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