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짝사랑하는 여자 친구 알레한드라가 선물한 노트에 부칠 수 없는 아빠를 향한 편지와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왜? 유언 없이 가버렸으니 누군들 알겠으며 누구에게 물아 봐야 한단 말인가?
아직은 조심스레 고개 드는 궁금증을 마주대하기 어렵다.
아빠는 화가였고 자상했으며 언제나 엄마처럼 자신 곁에 함께 하고 키워주셨다.
엄마는 일정한 보수를 받아오는 직장에 다니며 일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아니, 엄마와 자신을 버렸다는 아빠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 어쩌면 아빠가 그렇게 떠난 건 엄마의 냉정함 때문일 거라는 원망이 뒤섞여 가브리엘은 혼란스럽다.
가깝고 정답던 아빠의 갑작스런 존재의 상실이 무겁게 짓누르며 성장통을 앓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대답 없는 질문과 독백 속에 소년과 주변인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더듬어 이해하게 된다.
근 두 달 동안 이어지는 기록은 소년이 결국 엄마를 통해 어떤 진실에 도달한 후 끝을 맺는다.
어른이 되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시절은 어렴풋해지고 기억은 가물가물해지며 내 멋대로 추억은 짜깁기를 하면서 이해도 내 중심적으로 하게 된다.
대충대충 넘어가면서 대개가 내 입맛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아이의 세계? 십대의 고통? 그런 건 예전에 물 건너 가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얻어지는 건? 아둔한 머리를 감싸 안으며 그나마 아픈 기억들도 참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니 그것이 좋은 일일지도? 한 마디로 나는 잔인해진다.
아이들의 고민 같은 건 뭐,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마.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쉽게 내뱉는 걸로 나는 해답을 던져 주는 양 폼을 잡지만 그 마저도 귀찮은 것이다. 그건 약삭빠른 회피와 다름 아닌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작가들이 성장 시기의 아이들의 마음을 표현할 때 때로는 난 신기 해 한다.
그들은 참 어른이면서 아이의 섬세한 감수성을 잊지 않고 되살려 다시 사는구나.
그리고 아픔도 같이 아파하겠지? 같이 기뻐할 것이며 그렇게 크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거야.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모습찾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쭉 떠나지 않았다.
나의 시계 바늘을 되돌리며 가브리엘의 속절없는 무력감과 분노를 떠올려 보았다.
대체 어처구니없는 아버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가브리엘은 단지 아버지가 죽는 시기를 스스로 정한 것뿐이라고 자위한다.
나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되돌리는 일은 상처에 쉽게 노출되고 굳은살을 벗겨내어 피멍울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가브리엘 곁에 있었다면 역시 무언의 노트처럼 어떤 대답도 포기하고 가만히 들어주겠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어쭙잖은 충고 따위 집어치우고 그냥 듣기만 하겠다고.
그리고 소년이 울 때 어깨를 턱턱 두드려 주겠다.
한 마디 해 줄 말은 “넌 잘하고 있어. 괜찮아 질 거야.” 뿐이다.
소년은 사랑할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며 상처를 주는 불완전함을 경험하면서 차츰 자신과 주변을 품어나가는, 고통의 시간들을 견디는 힘도 얻어나갈 것이다.
성장이 완전함을 향한 보장은 되지 않지만 그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
곧 성숙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겠지.
소년과 같은 아버지의 부재를 겪지는 않았지만 또 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의 모습에서 나의 과거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음을 역시 알게 된다.
많은 혼란은 현재도, 또 미래도 항상 나를 둘러싸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도 소년 가브리엘처럼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며 역시 그렇게 긍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존재이니까.
소년 가브리엘과 엄마, 그리고 알레한드라, 자유의 여신상을 연기하는 ‘자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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