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명화들 - 뭉크에서 베르메르까지
에드워드 돌닉 지음, 최필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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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개최로 나라전체가 한껏 흥분하고 들썩이던 노르웨이, 이런 고조된 분위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1994년 2월 어느 날 새벽,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전지 중인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가 두 명의 도둑들에 의해 간단히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황한 노르웨이 경찰 당국이 서둘러 수사에 착수할 즈음, 이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런던 경찰청 예술 범죄반 담당 비밀경찰 찰리 힐 역시 사건 해결을 위해 영국 상부 설득에 필요한 이렇다 할 수사 참여의 이유에 걸맞은 핑계를 찾느라 궁리에 빠져 있었다.

과연 세상에 이렇게 널리 알려진 명화를 비롯한 미술품에 거침없이 손을 대고 서슴없이 훔치는 도둑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얼마나 미술관들이 의외로 무방비상태에 노출되어 있고, 잃어버린 명화를 되찾고자 기울이는 노력들은 어떤 과정과 모습으로 펼쳐지고 접근하는지 이야기는 자세하고 흥미롭게 이어간다.

 

그러니까 <사라진 명화들>은 제목 그대로 사라진 명화를 둘러싼 범인과 그들을 쫓는 경찰들의 활약을 허구나 상상으로 빚은 결과물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과 실존인물들을 중심으로 사실성 있게 르뽀 형식에 가까운 담담한 어조와 시선으로 뒤쫓고 있다.

 

물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뭉크와 <절규>가 있고, 애타게 뒤쫓는 찰리 힐을 비롯한 위험에 노출된 형사들의 어려움이 곳곳에 긴장을 고조시키며 포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뭉크의 <절규>, 그리고 오슬로 국립 미술관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세계 곳곳의 미술관들이 그것도 유명해서 설마 했던 바로 그런 곳들이 또 그렇게 유명해서 표적이 되는 작품들이, 얼마나 쉽게 도난당할 수 있는지 그래서 버젓이 황당하리만치 가볍게 얼마나 도난당해 왔는지, 그렇지만 치열하게 찾아내려 해도 결국에는 돌아오지 못하고 어둠 속에 가려진 범죄의 포로가 된 아까운 명화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모든 얘기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래서 사라진 명화들이 제자리에 돌아와 자리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들의 노고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까지 진지하고 심각하게 몰입하며 책을 읽었다.

고가의 좋은 액자에 둘러싸여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뽐내며 도도하게 내려다보는 나이 많은 허영과 휘광으로 치장한 줄로만 알았던 명화들.

그런 작품들에게 이런 수난을 겪으며 주름처럼 늘어난 상처가 깊숙이 숨은 얘기로 남아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좀 더 색다른 시각으로 상처가 새겨진 영광의 작품들을 애정 있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침 절규라는 작품을 통해 에드바르트 뭉크라는 인물과 그의 삶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만날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명화가 고가이기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화가의 삶과 시선이 녹아있고 자신의 얘기를 투철하고 치열하게 구현하려한 작가들의 몸부림의 결정체이기에 우리는 감탄하고 느끼며 배우는 것이리라.

그들의 천재적 에너지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잠시 전이되기를 은근히 꿈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잃어버렸던 경험 때문에 더욱 소중함을 확인했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 악의를 갖고 개인의 탐욕을 채우려 무감각하게 도둑질을 하지만 의외로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상처로 각인된 아픔으로 남을 수 있음을 역시나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일렬의 과정에 나를 이끌어준 <사라진 명화들>은 그래서 마치 007제임스 본드의 영웅적 활약의 재미와 흥밋거리로만 대치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소곤거리며 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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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책방 1 - 그, 사랑을 만나다
마쓰히사 아쓰시 지음, 조양욱 옮김 / 예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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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책방 1... 그, 사랑을 만나다

 

천국에 책방이 있다.

아니, 천국 얘기부터 우선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천국은 종교의 의미에서 말하는 거창하고 경건하고 또,,,착하거나 옳은 일을 한 사람들만 선택되어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냥 누구나 가야하는 곳, 조건은 거의가 죽으면 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생활은 거의 이곳의 일상과 다를 바 없다.

쉽게 말하면 일상의 연장인 셈이다.

그러니 그 곳에 책방이 있다고 해서 전혀 어색할 건 없다.

생활 속에 책이 필요하듯 그렇게 책방도 필요하다.

단지 어느 책방은 서비스가 좋아서 책을 조심스레 들고 가 넌지시 요구하면 그 책의 일부분을 읽어준다.

읽어주는 이는 특별히 목소리가 좋을 필요도 없고, 책 읽어주는 기술이 뛰어날 필요도 없이 책을 바라보며 글자를 새기듯 읊으면 된다.

어느 새 듣는 이들은 주위에 몰려와 빙 둘러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왜?

사실은 읽어주는 이조차 이유는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책 내용의 어느 한 지점에서 천국이 아닌 이곳의 한 시절과 한 추억과 조용히 살짝 들이치는 햇살을 만끽하듯 해후하고 즐기는지 모른다.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그 시간이 지나면 돌아서는 걸로 봐서 짐작하건대 만족감에 젖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남자 사토시는 얼떨결에 천국에서 눈을 뜬다.

이곳에서의 되는 일 없이 시름에 겨워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책방에서 점장 대리라는 직함으로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했는데 뭔지 모르지만 일을 하면서 그는 점점 그 시간이 좋았다.

아마도 곁에 무뚝뚝하고 말다툼을 자주 하는 유이라는 아가씨가 있어서 더욱 그런지 모른다.

 

[천국의 책방]은 아주 가볍고 얇은 책이다.

나같이 책을 굼뱅이처럼 읽는 사람도 몇 시간 만에 끙~거리며 다 읽을 정도다.

그리고 읽는 동안 복잡한 일도 잊은 채 가벼이 머리를 식히는 청량감마저 들었다.

 

다 읽고는 속으로 난 생각했다.

그런 천국 있었으면 좋겠네.

도피처라고 해도 좋다.

마치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아 고달프다는 푸념이 입 밖으로 삐질삐질~ 삐져나올 때 즈음에 누군가 “자 좀 쉬지 그래~”하며 작은 위로의 말과 함께 천국행 티켓을 손아귀에 살짝 쥐어주면 좋겠다. 작은 휴가인 셈이다.

바리바리 가방이 터지도록 짐을 쌀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잔뜩 찌푸리고 투덜거리며 도착해도 어느새 나는 다른 작은 세상에 또 다른 여유를 갖고 게으르게 그곳을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누비리라.

그러다 눈에 띄는 책방에 들어서겠지?

책을 좋아하는 습성이 그곳이라고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책을 하나 꺼내 값을 치르고 돌아서려던 차에 그곳 젊은 점장 대리인 사토시의 책을 읽어주는 음성에 자석처럼 끌려갈 것이다.

만약 내가 건넨 책에 그가 당황하며 쭈뼛 거리다 “저기~!!전 한글을 못 읽습니다.”하는 말 한마디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천국이니까 모든 말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상상으로 해본다.

 

그리고 이 모든 상상에 기분이 좋아진다.

사토시 그가 천국에서 사랑을 만난다면, 나는 그저 천국을 방문해도 좋고, 그것마저 가당치 않을 일이라면 다시 생각을 되돌리겠다.

이곳에서 봄날의 나른한 꿈처럼 천국을 꿈꾸다 어설프게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즐겁게 [천국의 책방]을 뒤적여 보는 거지.

그런 나른한 시간과 꿈을 선사한 어여쁜 책이었다. [천국의 책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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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바이올린
진창현 지음, 이정환 옮김 / 에이지21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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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처음 ‘진창현’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산하와 푸른 논밭을 두루 비추는 영상 속에 낯익으면서도 낯선 이중의 시선으로 드라마를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과연 왜 일본 방송에서 재일교포 즉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꽤 껄끄러운 과거 식민지배 역사의 산물인 거주 외국인의 삶을 기념으로 드라마화해서 방영하는 것일까?

그는 과연 누구이며 얼마나 대단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에?

단순한 호기심이 먼저 솟아오른 것이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수상자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화려한 모습의 장본인 ‘진창현’.

그러나 내 짐작보다 더 심각한 고난의 경험을 짙게 깔고서 그의 삶은 거칠기만 했던 과정을 묵묵히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본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그의 자서전 [천상의 바이올린]을 펼쳐들었다.

 

1929년 경상북도 김천시 이천 마을에서 태어난 진창현은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아버지를 여읜 뒤 가세가 기울어 이복형들이 있는 일본으로 홀로 건너가 고학으로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마친다.

그러나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은 일본 사회에서 차별 받는 재일교포로서 이루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바이올린에 대한 강연을 듣는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현대 과학 기술로는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뛰어난 음색을 재현해내기 어렵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진창현은 깊은 감명과 도전의식을 갖게 된다.

평생을 바쳐서라도 그 소리에 가까이 가고 싶다는, 가고 말겠다는 의지와 집념은 결국 그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차별받는 청년에게서 훗날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올린 제작자로서의 장인 ‘진창현’을 탄생시킨다.

 

사실 책 한 권으로 진창현 그 분이 살아온 인생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바이올린 제작 과정의 시련 등을 어찌 다 표현하고 이해되겠는가?

그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뛰어난 성과와 결실을 보고 판단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나 저절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이상의 진가로서 진창현 그 분의 삶을 증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그에게 바이올린을 쉽게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선인이라는 차별의 시선이 그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그는 홀로 외로이 결심하고 도전하고 고독하게 작업하는 시간의 반복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는 길은 멀었고 아니 길은 보이지 않았고 안개 속을 헤매는 그는 가난과 차별 속에 어쩌면 ‘바이올린’에 미쳐있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그를 그리 단순하게 앞만 보고 가도록 이끌었을까?

이것은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서 드는 질문이었다.

단순함이 강인함의 다른 얼굴이었던가?

미스터리하기까지 느껴졌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면서 홀로 견디어온 젊은 날의 노력은 질기게도 그를 버티게 했고 하루하루가 그를 쉬운 길로 이끌지도 않았지만 역시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초인적으로까지 생각되었다.

 

차별을 실력으로 뛰어넘고 노력으로 세상을 설득하는 모습이 ‘천상의 바이올린’ 뒤에 큰 그늘을 머금은 거목으로 내게 교훈이자 굳건한 지표로 다가왔다.

뭔가 제대로 미쳐서 하나만을 집중하고 도달하는 집념 앞에 어려운 시대와 어려운 상황을, 현실이란 테두리 속에 자신을 가두거나 변명으로 머무르지 않는 자세가 ‘천상의 바이올린’ 이 한 권의 책이 내게 넌지시 알려주는 세상사는 방법임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한 권의 자서전이 내게는 열권의 자기계발서 보다 값지고 가치 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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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 신들의 보물에서 반지전설까지,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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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tv 케이블 방송 채널을 무심코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때였다.

지난 영화 한 장면이었는데, 구름 위 옥황상제처럼 큰 옥좌에 앉은 산신령같이 생긴 할아버지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로키~, 로키~”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할아버지 카리스마 넘치는 범상치 않은 인상에 한 쪽이 애꾸눈이었다.

애꾸눈? 로키? 그렇다면?

나는 한참 [안인희의 북유럽신화]에 빠져 있을 때였기에 순간 나의 한쪽 귀가 나팔처럼 커다래지고 두 눈은 화면에 붙박아졌다.

 

영화인즉슨 뭐 그런 거였다.

로키가 어찌어찌해서 마술의 힘을 가진 마스크를 잃어버리고 찾아야하는데 정작 장본인은 애꾸눈 오딘의 눈을 피해 뺀질거리면서 해변에서 썬탠을 즐기다 오딘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안절부절 못하는 영화 [마스크 2]의 한 장면이었다.

오호!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어쩜 이리 귀에 쏙 들어오고 반가울 수가!

나는 이 하나만 가지고도 금방 으쓱해지고 사실은 신기했다.

우리 문화 곳곳에 이런 신화의 구성원들이 쏙쏙 들어와 곁에서 이름을 빌려주고 숨 쉬고 있는데 내가 감히(?) 무지의 소산으로 그분(?)들을 몰라 뵈었으니 그분들은 대접받지 못하는 설움이 어찌 이만저만 하겠는가?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

세상은 하늘과 땅도 없고, 밤과 낮, 빛과 어둠 시간조차 없는 처음에 추위와 더위만 있었다.

얼음과 눈 등 추위 덩어리의 북쪽 공간은 ‘니플하임’, 더위로 만들어진 불꽃의 바다 ‘무스펠하임’.

양쪽 기운들 속에서 시간(?)이 흐른 뒤 태초암소 아우둠라와 태초 거인 이미르가 태어났다.

난 순간 ‘오호! 그렇다면 태초암소와 태초 거인이 결혼을 해서 암소거인이 태어나는구나’ 서둘러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신화란 원래 유전공학을 뛰어넘는 다양한 상상의 존재들을 배출해내지 않던가?

근데 아니올시다 였다. 이 태초거인 이미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잠만 자고 일어나 태초암소 젖을 먹고 배를 채우는 일.

그나마 태초암소는 소금기 섞인 돌을 핥아 먹고 살았는데 그 소금돌이 신이 되고 혼자서 어찌어찌해서 세상에 신들을 만들어냈다.

 

한편 먹고 자는 일에 충실한 이미르는 결국 자면서 작업을 한 결과 몸에서 흐르는 땀이 거인들을 만들었다. 뿐인가? 자고 있는 사이 그의 발과 다른 쪽 발이 짝짓기를 해서 아들을 낳는다. 한마디로 발은 발인 동시에 생식기 역할을 톡톡히 했나보다.

 

이리하여 두 주인공 신과 거인들이 세상에 탄생하고 신들은 이 게으른 이미르가 못마땅해서 죽여 그 몸으로 세상의 산과 바다, 자연을 만들어 냈다.

물론 구성원들은 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난쟁이, 요정, 인간등등.

인간 내면이 투사된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사랑하고, 다투고 어울린다.

 

죽은 신의 이야기.....

북유럽신화에 대해 백지와도 같은 나는 그래서 흥미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신은 신인데 어딘가 부족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신들은 왠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어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끝이 있는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 속에 최후로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그들과 그들 세상의 마지막이 또 그런 마지막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교도 즉 기독교인으로서 작품들을 집대성한 ‘에다’ 시인들의 냉정한 시선이 야속하게 다가왔다.

 

‘라그나뢰크, 신들의 황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냉혹한 현실은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들에게서 신성을 거세한 이야기는 과연 신화로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이 라그나뢰크를 거쳤기에 신성이 사라진 것은 아닐 테지만 신화가 전래 동화처럼 자취로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때 신들의 위상이 전락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비단 잊혀진 전설을 갖고 있는 다른 나라 얘기만이 아니라 공통의 경험을 가진 우리네 잃어버린 태생의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희미한 흔적을 아쉽게 살펴본다.

 

몰라서 신선했고 , 신선해서 흥미롭고, 흥미로워서 가까이 하고 싶은 북유럽신화를 이렇게 이야기로 정리해서 만나니 한층 중요한 고리하나를 되찾은 반가운 기분이다.

기억하는 신화는 현재와 미래에서 계속 만날 것이다.

과거의 죽은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문화의 힘으로 복원을 꿈꾸며...

그것은 북유럽신화 뿐 아니라 우리의 신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양함으로, 상상의 힘으로 세상을 지탱하는 문화의 강력한 꿈의 표현으로 굳건히 자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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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야 테르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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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은 열다섯 살 소년.

자기를 짝사랑하는 여자 친구 알레한드라가 선물한 노트에 부칠 수 없는 아빠를 향한 편지와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주 전 아빠는 바다에 뛰어 들어 자살했다.

왜? 유언 없이 가버렸으니 누군들 알겠으며 누구에게 물아 봐야 한단 말인가?

아직은 조심스레 고개 드는 궁금증을 마주대하기 어렵다.

 

아빠는 화가였고 자상했으며 언제나 엄마처럼 자신 곁에 함께 하고 키워주셨다.

엄마는 일정한 보수를 받아오는 직장에 다니며 일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엄마와는 친근하지 않고 어색하다.

그런데 이런 엄마와 단둘이 남겨졌다.

아니, 엄마와 자신을 버렸다는 아빠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 어쩌면 아빠가 그렇게 떠난 건 엄마의 냉정함 때문일 거라는 원망이 뒤섞여 가브리엘은 혼란스럽다.

 

가깝고 정답던 아빠의 갑작스런 존재의 상실이 무겁게 짓누르며 성장통을 앓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대답 없는 질문과 독백 속에 소년과 주변인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더듬어 이해하게 된다.

근 두 달 동안 이어지는 기록은 소년이 결국 엄마를 통해 어떤 진실에 도달한 후 끝을 맺는다.

 

모든지 이해하는 척은 하지 않겠다.

어른이 되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시절은 어렴풋해지고 기억은 가물가물해지며 내 멋대로 추억은 짜깁기를 하면서 이해도 내 중심적으로 하게 된다.

대충대충 넘어가면서 대개가 내 입맛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아이의 세계? 십대의 고통? 그런 건 예전에 물 건너 가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얻어지는 건? 아둔한 머리를 감싸 안으며 그나마 아픈 기억들도 참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니 그것이 좋은 일일지도? 한 마디로 나는 잔인해진다.

아이들의 고민 같은 건 뭐,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마.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쉽게 내뱉는 걸로 나는 해답을 던져 주는 양 폼을 잡지만 그 마저도 귀찮은 것이다. 그건 약삭빠른 회피와 다름 아닌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작가들이 성장 시기의 아이들의 마음을 표현할 때 때로는 난 신기 해 한다.

그들은 참 어른이면서 아이의 섬세한 감수성을 잊지 않고 되살려 다시 사는구나.

그리고 아픔도 같이 아파하겠지? 같이 기뻐할 것이며 그렇게 크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거야.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모습찾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쭉 떠나지 않았다.

작가 마리네야 테르시를 부러워했다.

나의 시계 바늘을 되돌리며 가브리엘의 속절없는 무력감과 분노를 떠올려 보았다.

대체 어처구니없는 아버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가브리엘은 단지 아버지가 죽는 시기를 스스로 정한 것뿐이라고 자위한다.

나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되돌리는 일은 상처에 쉽게 노출되고 굳은살을 벗겨내어 피멍울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곧 작은 결심을 상상한다.

만약 내가 가브리엘 곁에 있었다면 역시 무언의 노트처럼 어떤 대답도 포기하고 가만히 들어주겠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어쭙잖은 충고 따위 집어치우고 그냥 듣기만 하겠다고.

그리고 소년이 울 때 어깨를 턱턱 두드려 주겠다.

한 마디 해 줄 말은 “넌 잘하고 있어. 괜찮아 질 거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삶은 계속 될 것이다.

소년은 사랑할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며 상처를 주는 불완전함을 경험하면서 차츰 자신과 주변을 품어나가는, 고통의 시간들을 견디는 힘도 얻어나갈 것이다.

성장이 완전함을 향한 보장은 되지 않지만 그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

곧 성숙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겠지.

 

소년과 같은 아버지의 부재를 겪지는 않았지만 또 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의 모습에서 나의 과거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음을 역시 알게 된다.

많은 혼란은 현재도, 또 미래도 항상 나를 둘러싸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도 소년 가브리엘처럼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며 역시 그렇게 긍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존재이니까.

 

소년 가브리엘과 엄마, 그리고 알레한드라, 자유의 여신상을 연기하는 ‘자유’ 등등.

이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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