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 케이블 방송 채널을 무심코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때였다.
지난 영화 한 장면이었는데, 구름 위 옥황상제처럼 큰 옥좌에 앉은 산신령같이 생긴 할아버지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로키~, 로키~”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할아버지 카리스마 넘치는 범상치 않은 인상에 한 쪽이 애꾸눈이었다.
나는 한참 [안인희의 북유럽신화]에 빠져 있을 때였기에 순간 나의 한쪽 귀가 나팔처럼 커다래지고 두 눈은 화면에 붙박아졌다.
로키가 어찌어찌해서 마술의 힘을 가진 마스크를 잃어버리고 찾아야하는데 정작 장본인은 애꾸눈 오딘의 눈을 피해 뺀질거리면서 해변에서 썬탠을 즐기다 오딘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안절부절 못하는 영화 [마스크 2]의 한 장면이었다.
오호!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어쩜 이리 귀에 쏙 들어오고 반가울 수가!
나는 이 하나만 가지고도 금방 으쓱해지고 사실은 신기했다.
우리 문화 곳곳에 이런 신화의 구성원들이 쏙쏙 들어와 곁에서 이름을 빌려주고 숨 쉬고 있는데 내가 감히(?) 무지의 소산으로 그분(?)들을 몰라 뵈었으니 그분들은 대접받지 못하는 설움이 어찌 이만저만 하겠는가?
세상은 하늘과 땅도 없고, 밤과 낮, 빛과 어둠 시간조차 없는 처음에 추위와 더위만 있었다.
얼음과 눈 등 추위 덩어리의 북쪽 공간은 ‘니플하임’, 더위로 만들어진 불꽃의 바다 ‘무스펠하임’.
양쪽 기운들 속에서 시간(?)이 흐른 뒤 태초암소 아우둠라와 태초 거인 이미르가 태어났다.
난 순간 ‘오호! 그렇다면 태초암소와 태초 거인이 결혼을 해서 암소거인이 태어나는구나’ 서둘러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신화란 원래 유전공학을 뛰어넘는 다양한 상상의 존재들을 배출해내지 않던가?
근데 아니올시다 였다. 이 태초거인 이미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잠만 자고 일어나 태초암소 젖을 먹고 배를 채우는 일.
그나마 태초암소는 소금기 섞인 돌을 핥아 먹고 살았는데 그 소금돌이 신이 되고 혼자서 어찌어찌해서 세상에 신들을 만들어냈다.
한편 먹고 자는 일에 충실한 이미르는 결국 자면서 작업을 한 결과 몸에서 흐르는 땀이 거인들을 만들었다. 뿐인가? 자고 있는 사이 그의 발과 다른 쪽 발이 짝짓기를 해서 아들을 낳는다. 한마디로 발은 발인 동시에 생식기 역할을 톡톡히 했나보다.
이리하여 두 주인공 신과 거인들이 세상에 탄생하고 신들은 이 게으른 이미르가 못마땅해서 죽여 그 몸으로 세상의 산과 바다, 자연을 만들어 냈다.
인간 내면이 투사된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사랑하고, 다투고 어울린다.
북유럽신화에 대해 백지와도 같은 나는 그래서 흥미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신은 신인데 어딘가 부족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신들은 왠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어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끝이 있는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 속에 최후로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그들과 그들 세상의 마지막이 또 그런 마지막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교도 즉 기독교인으로서 작품들을 집대성한 ‘에다’ 시인들의 냉정한 시선이 야속하게 다가왔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냉혹한 현실은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들에게서 신성을 거세한 이야기는 과연 신화로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이 라그나뢰크를 거쳤기에 신성이 사라진 것은 아닐 테지만 신화가 전래 동화처럼 자취로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때 신들의 위상이 전락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비단 잊혀진 전설을 갖고 있는 다른 나라 얘기만이 아니라 공통의 경험을 가진 우리네 잃어버린 태생의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희미한 흔적을 아쉽게 살펴본다.
몰라서 신선했고 , 신선해서 흥미롭고, 흥미로워서 가까이 하고 싶은 북유럽신화를 이렇게 이야기로 정리해서 만나니 한층 중요한 고리하나를 되찾은 반가운 기분이다.
기억하는 신화는 현재와 미래에서 계속 만날 것이다.
과거의 죽은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문화의 힘으로 복원을 꿈꾸며...
그것은 북유럽신화 뿐 아니라 우리의 신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양함으로, 상상의 힘으로 세상을 지탱하는 문화의 강력한 꿈의 표현으로 굳건히 자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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