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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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끝나고 인생은 시작된다, 라는 건가.” (p385)

그럴 리 없다. ‘청춘’이 어느 특정 시기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 배고픈 하루 혹은 분주한 청춘, 그 어느 일상

“젊은 놈이 평론가 같은 거 되어서 뭐해? 저기 객석에 앉아서 남이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다는 건 노인네들이나 하는 짓이야. 젊은 사람은 무대에 올라가야지! 못해도 상관없어, 서툴러도 상관없다고. 내 머리와 내 몸을 움직여서 열심히 뭔가를 연기하지 않으면 안 돼!”
"이 아저씨, 진짜 못 말리겠다.“ 히라노가 웃음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젊다는 건 특권이야. 자네들은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특권을 가졌어. 근데 평론가라는 건 본인은 실패를 안 하는 일이잖아? 그러니 안 된다는 게야.”
(p137)

여섯 쪽으로 나눈 어느 특정한 날의 하루, 그 단면을 쫓는 이야기이다.
마치 사과나 수박을 쪼개고, 자른 부분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촘촘히 박힌 씨앗도 눈에 띄고 튼실한 속살도 빼곡하다.
그런데 그것이 청춘 예찬이나 들먹이며 풍요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어딘가 허기진 구석이 못미덥게 동전의 앞뒷면처럼 숨어서 버티고 있는 데 문제의 모순은 노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공 다무라 히사오는 하루를 끊임없이 동분서주하고 게다가 일에 치여서 굶는 일도 허다하다.
거참, 먹기 위해 일하고, 살기 위해 먹는 건데도 말이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하는 일도 있다니 이 어인 모순일까?
한 끼 밥의 포기가, 또는 하루의 굶주림이 그렇게도 원통하냐 싶겠지만 나는 왠지 서러움마저 밀려왔다. (분명 내가 굶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밀리고 옆에서 달려드는 하루가 대충 마무리 되고 지친 밤을 맞이할 때면 별을 바라보며 그나마 여유를 찾고 마음을 달랜다.
정말이지 원기 왕성한 젊음이 아니면 버티기 어렵겠다 싶어 다시 젊음의 위력을 확인하게 되지만 씁쓸하고 피곤한 뒷맛은 영~ 쉽게 가시지 않는다.

허기지고 피곤한 하루가 씁쓸하게 밤 하늘 별처럼 버티고 있어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살, 도쿄]는 분명 기존의 유쾌, 통쾌한 소설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니 웃을 준비를 하고 이 책에 달려들다간 ‘스무 살’이라는 나이의 시간과 ‘도쿄’라는 복잡한 도시 그 공간에 치이고 떠밀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나의 시간과 공간의 문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에 웃음의 요소가 준비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을 보고 맘껏 웃어라.
[스무살, 도쿄] 소설은 이렇게 읽는 이에 따라 웃길 수도 있고 서글플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어떠랴, 원래 인생이란 웃길 수도 있고 서글플 수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다무라 히사오의 20대 이야기, 오쿠다 히데오는 슬며시 진지하게 시간의 켜를 들쳐 더듬으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잡는다. 오쿠다 히데오의 또 다른 시선과 표현을 발견했다고 할까, 그래서 읽는 재미와 의미도 한 꺼풀 깊게 파고들어 다가온다.

참, 소설 속에 틈틈이 숨어있는 문화단신도, 시간의 흐름 위에 깃발처럼 나부끼니 맛보기 역시 놓치지 말기 바란다.
어느 하루는 TV에서 존 레논의 노래가 하루 종일 흘러나온다. 그 날은 존 레논의 사망일.
어느 날은 나고야의 올림픽 개최지 선정일. 물론 88올림픽은 서울이라는 사실을 아는 우리로서 나고야 올림픽 개최실패가 가져온 그날 그들의 감정을 살짝 엿보는 것도 재미다.
무심히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하루 종일 TV에서 비친 장면은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이었다는 사실 등등.
어떤 기억된 이슈가 가져온 그 날의 추억을 같이 엮으면서 내용상의 구성을 짜임새 있게 꾸려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마쓰다 유사쿠가 어느 시기에는 활발히 활동하는가 하면 마지막에 영화 [블랙 레인]을 끝으로 그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된다.
존 레논의 죽음이나 마쓰다 유사쿠의 죽음은 젊은 시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기처럼 함께한 문화적 코드로서 정서적 공감과 상실, 그에 따른 충격을 맛보게 하는 개인적 경험이다.

예를 들면, 내게는 장국영의 죽음이 그랬을까?
내가 그의 열렬한 팬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죽음 소식이 떠들썩하게 들려왔을 때 그 날이 마침 만우절이라 난 만우절의 거짓말이라 치부하며 외면했다. 어쩌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미약한 자기 보호적 거부였는지 모르겠다.
장국영에게서 나는 그의 영화를 보고 즐기던 시절의 나를 함께 확인하곤 했으니까.
그런 그가 죽었다면 서서히 나의 죽음도 함께 바라보는 거라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비록 그는 자살하였고 스타였고 그래서 나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그의 죽음을 통해 나는 큰 상실감을 맛본다. 나의 소중한 무언가의 상실.
그리고 이런 개인적 경험은 의외로 모든 세대들이 겪는 보편적 정서와 경험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쌓인 장벽이 다시 무너지고 젊었던 사람은 늙어 죽고….
순간순간 사건으로 시간의 흐름을 목격한다.

“청춘은 끝나고 인생은 시작된다, 라는 건가.” (p385)

이 말은 무게감 있는 엄살이자 푸념처럼 들린다.
인생은 청춘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20대가 갔다고 청춘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단지 젊음의 가장 화려한 시기가 사라진 것뿐, 청춘의 전부가 촛불이 꺼지듯 자취를 감춘 건 아니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 청춘이 끝났다고 한들 인생이 암흑인 것은 아니다. 난 그렇게 고집할 것이다.

물론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청춘’을 책임지지 않는 아이같은 세대로, ‘인생의 시작’이란 책임이 동반된 성숙한 어른의 시간으로 나눈 것뿐이라는 걸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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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몸, 마음, 영혼을 위한 안내서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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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류시화가 꾸준히 번역해오던지 책으로 엮었던 책들을 몇 권이라도 들쳐본 독자라면 그의 일관된 시선이나 스타일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이 책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역시 역자의 이름을 통해 읽기도 전부터 미리 내용을 더듬어 예상해보는 것이 섣부른 일이긴 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아, 그러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맛을 예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새삼  알게 된다.




저자 아잔 브라흐마는 스님이다.

정확히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론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 출신으로 태국에서 불교에 입문했고 현재는 호주에서 일반인들에게 법문을 보다 쉽고 편하게 전달하며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그 ‘쉽고 편하다’는 표현이 직접 접해보고 나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이게 된다.




요즘 개인적으로 심사가 하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차에 이 책을 덥석 집어 들었는데 내용이 기대이상으로 나에게 힘을 전달해주었다.

뒤틀리는 심정을 어루만지며 잔잔히 속삭이듯 다가오는 충고의 소리는 다급한 나를 멈추게 하고 나를 내려놓게 하였다.

잠시 쉬어가야겠다는 마음이 여유를 낳고, 여유는 다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내 마음의 코끼리는 술까지 취했나보다.

제어가 안 되고 미친 듯이 마음을 헤젓고 다닌다.

점점 녀석의 위력에 깔려서 나는 주눅 들어 있는데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도 분간이 안가 막막하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마치 마취총을 쏘듯 나의 코끼리를 잠재울 수는 없다.

그러나 힌트를 얻고 잠시 평안한 휴식이 되었음은 사실이다.

어렵지 않게 일화나 우화를 통해 불교의 지혜를 전달하려는 아잔 브라흐마의 배려 덕이었다.




내용 중 힘이 되어 주었던 하나다.

집 앞에 한 트럭의 소똥을 누군가 버리고 갔다.

황당하고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가 치워야 한다.

몇 날 며칠 아니 몇 년, 얼마가 걸릴지도 모른다.

불행은 그렇게 다가온다.

참 억울한 일이지만 그렇게 정원을 치우고 나면 거름이 되어 그곳에 열매가 열리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

향기는 정원을 채우고 비로소 나는 허리를 펴고 풍성한 그 속에서 미소를 짓는다.




역시 지혜란 얻기 힘들지만 실천하는 일은 더욱 벅차다.

살다보면 점점 어려운 일이 억울함이요, 내가 원인이 아닌데도 결과로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어떨 때는 동시다발로.

그 다음은 분노로 잠을 이룰 수 없다.

마침 책에서 지혜를 만났다.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지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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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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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내내 슬펐다.

외로움이 있어 슬펐고, 마음이 아파 고통스러웠다.




[악인]속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어쩌면 이리도 모두 외로운 것일까?

고독이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 감정일지 몰라도 고독 속 인간에게는 보편성이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홀로 감당하고 견뎌야 하는 잔인한 상태로서 삶의 이면에 눌러 붙어 버티고 있는 징벌과도 같다.

그래서일까? [악인] 속 인물들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헛된 욕망으로 치장하든 헐벗은 관계 속에 버려지든 출발은 외로움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악인’이란 내 머리 속에 이미 선명한 의미로 정의 내려져 있는 줄 믿었는데 점점 단언하기 망설여졌다.

‘악의’는 있을지언정 ‘악인’은 없었으며 쉽게 단정 짓는데 자신했던 내 자신이 사실은 누구에게든 비웃음을 사고 비웃곤 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거짓말이 일상이 되어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와 일상의 거짓에 서툴렀던 남자는 모순 된 입장과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시미즈 유이치는 살인자가 되고 만다.

거기다 하필 그토록 애타고 목마르게 기다렸던 사랑과 위안은 뒤늦게 나타나 곁으로 다가온다.

짓궂은 운명이지만 악인을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나는 희미하게 시미즈 유이치 못지않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나가사키]이후 두 번째다.

일본 소설에 몰리는 근래의 관심과 유행에 우리 문학계가 시기어린 야유를 쏟아내도 일본 소설에는 분명 우리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

그렇다고 일본 문학을 찾는 독자 중에 그 속에서 대단한 뭔가를 발견했다는 고백이나 감상 또한 본 적이 없다.

그만그만한 수준에서 맴도는 것에 만족하는 데도 꽤 이력이 붙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우리 소설이 주지 못하는 재미만이라도 한 움큼 우리 가슴에 건네주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악인]은 근래에 읽은 일본소설 중에 보기 드물게 무게와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저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의 작가로 알았던 요시다 슈이치에게 이런 이야기의 얼개를 짜내고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능력과 면모가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소설의 두께만큼이나 작품과 작가의 신뢰도 비례해 찬사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뜻 깊은 좋은 소설이었다. 읽는 것이 즐거웠다.





인상깊은 구절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p 439)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되는데 말이야."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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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영혼 1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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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종교적 자신만의 판타지를 쫓아 탐욕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난도질하는 냉혈한 연쇄살인범이 있다.

그가 흩뿌리고 사라진 잔인한 살해현장에는, 피해여성의 공포와 지옥을 방불케 하는 무참한 살육으로 노골적인 악의 기운이 감돌뿐이다.

검붉은 피가 범인의 살의에 젖어 펼쳐진 현장을 찾을 때마다 프로파일러로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형사 조슈아 브롤린은 살인범의 퍼포먼스 속 부유하는 희미한 흔적과 증거를 건져

범행 과정과 심리를 추정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소설은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하나 프랑스적인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좀더 침울하고 음산한 프랑스적 분위기, 인물, 사건, 배경 등을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표현의 경계는 사라지고 의미도 없어진 것일까?

스릴러 영화처럼 시각적인 이미지가 빠르게 전개되어 대중소설답게 지루할 틈도 없이 사건과 추적은 가쁘게 흘러간다.

덕분에 두툼한 두 권의 책을 붙들고 이 무더운 여름, 미국의 어느 한적한 도시, 특히나 숲이 풍성한 지역 (그것은 저주처럼 되돌아와) ‘살인의 숲’으로 옷을 갈아입고 내 앞에 버티고  있어 나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더듬어 나아가는 상상 속에서 한기마저 느끼곤 했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잔인한 새디즘적 공격성을 감추고 살아간다. 물론 정도의 차이일 뿐.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도 공포로 얼룩진 잔인한 행태에 눈을 떼지 않고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이 일면 어느 정도 희석될 수 있는 효과를 발휘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처참한 공격성을 품고 있는 것치고 인간은 꽤 유연하게 자신을 조절하는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런 조절을 거부하는 꽤 위험한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근래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건 단순히 종교적, 윤리적 비유의 측면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훌쩍 뛰어넘어 야생의 맹수보다 더욱 독특하고 잔인한 속성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악이라면 그런 인간들을 지칭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 사이코패스가 세상에 제대로 설명되고 진단되는 것조차 아직도 깊은 연구가 절실하다는 사실에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쇄살인이라는 끔찍한 소재의 소설과 영화 등은 강력하게 우리의 시선을 끄는지 모른다.




프랑스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책 띠지의 카피가 암시하듯 꽤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악의 영혼’은 의외로 내용면에서 프랑스적인 문화적 정취는 맡을 수없지만, 미국 한 지역 경찰청을 중심으로 사건해결을 위한 급박한 호흡을 유지하면서도 현장감 있는 과학수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작가는 사실성에 충실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래서 살인은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지고 사건 해결의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역량을 발휘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쉽게 아쉬움을 접을 수 없는 것은 왠지 난 이 프랑스 젊은 작가의 눈을 통해 저 세느강이 흐르는 파리의 어느 으쓱한 골목에서 그들 특유의 끈적끈적한 땀과 피가 뒤섞인 조금은 엽기적인 냄새가 풍기는 살인현장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프랑스인 특유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감각으로 유럽의 고풍적 도시의 향취가 짙게 묻어난 사건과 인물과 배경을 기반으로 한 악의 대면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또 하나 평소 살인자에 대한 프로파일링의 작업과정이 무척 궁금했는데 소설 속에서나마 잠시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나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작가의 예리한 경험과 조사를 바탕으로 과학 수사의 단면들을 자세하게 표현해서 색다른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앞선 수사기법을 자랑하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범인을 검거했을 우리는 악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

악의 얼굴을 통해 내면에 비친 영혼을 바라보며 나는 공포가 깃든 작은 좌절을 맛본다.

찌는 여름 이제 막바지라고 하지만 더위의 기승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

시원한 한기가 그리울 때 악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도 은근하고 효과적인 피서법이 되지 않을까?

단, 악의 영혼을 들여다보되 악의 영혼이 나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일은 없도록 주의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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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벤트 상품, 악의 영혼 도착
    from Pell's seer Blog 2008-07-17 21:22 
    몇주전에 이벤틍 당첨글을 올렸는데( "2008/07/08 - [날마다 늘 있는] - 경축!! 월간 판타스틱과 노블마인이 함께하는 완간 기념 이벤트 당첨" ) 드디어 오늘 책을 받을수 있게 되었다. 지금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을 읽고 있는데 빨리 마무리 짖고 "악의 영혼"을 시작하고픈 맘이다.
 
 
비로그인 2007-08-1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나게 읽었던 책입니다. 막심 샤탕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마음속에 깊이 각인시켜준 책이었어요. 앞으로 이어질 두편의 이야기가 기다려 지는군요.^^
마직막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지요.
 
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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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몇 편의 일본소설들을 쭉 읽어왔지만 이런 몇 대가 함께 사는 가족 소설은 처음이다. 4대의 가족과 고양이 네 마리, 그것도 모자라 길에서 강아지 두 마리를 주워 와도 크게 부담을 갖지 않고 곧 가족 내 구성원으로 합류시키는 데 거리낌이 없다.




대대로 모여 살다보니 가훈이 버젓이 권위를 갖추고 가정 내 질서유지의 근간이 되기도 한가 본데 실상 내용을 파고들어 보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식사는 가족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게 먹는다.’

훗타 가는 이를 실천하는 데 열성을 다하는 눈치다. 그 결과 식사시간이면 대화는 그야말로 멀티가 되고 '왁자지껄'을 넘어서 중구난방처럼 보이지만 뭐, 대화는 서로 궁금증을 잘도 해소하고 나름 효과적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 복잡하고 정신없는 가족들에게 흥미로운 것은 한 사람이라도 식구를 늘리는 데 열심이기는 해도 어째 빠져 나갈 궁리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일사불란한 통일을 강요하거나 목매지 않아도 각자 자기 역할과 위치가 확고하고 개성이 존중되며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기에 반목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사건은 쉴 새 없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이 오지랖 넓은 훗타 가족에겐 사건은 가족들이 살아가는 에너지의 확인이자 기폭제이며 더욱 단단한 결속력을 다지는데 한 몫 톡톡히 하는 듯 하다.




사실 난 대가족이라는 시스템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위계질서가 무게를 더 해 누군가는 짓눌리고 존중보다 간섭이 횡횡하는 다수의 집단 살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언제부턴가 강하게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가운데, - 예를 들어 밥상에서 여든을 바라보는 칸이치 할아버지에게 가족 누군가가 잔소리를 한다. 그 연세에 그렇게 잡수시면 건강에 해롭다는 둥. 이 때 이 대장 할아버지 발끈해서 “먹는 것 정도는 내 맘대로 하게 냅 둬 ”하고 대꾸한다. -

이 즈음에서 나는 피식 웃게 되는데 왠지 이 칸이치 할아버지가 가련(?)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귀엽(?)게 느껴지는 건 또 뭔지.




결국 한 권의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의 화자 곧 칸이지 할아버지의 죽은 아내 사치 할머니 영혼의 자상한 안내로 나는 어느 새 훗타 가의 일원이 되어 함께 식탁에 앉아 정신없이 수다도 떨고 듣다 일 년의 시간 속에 묻혀 흘러 간 기분이 들었다.

대가족도 구성원간의 신뢰와 애정 속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꽤 즐겁고 유익한 시간과 관계를 만들어 나가겠는 걸?




고독에 매몰되는 현대 대중 소설의 소재나 주제로는 드물게 훈훈한 가족의 정이 따끈따끈한 호빵처럼 뭉치고 버무려져 배를 채우고 두둑해지는 바람에 두 손바닥으로 남몰래 슬쩍 퉁퉁  기분 좋게 두드려 보게 된다.

덤으로 나의 정신은 도쿄 외곽의 ‘도쿄밴드 왜건’이란 헌책방으로 날아가 헌책더미를 뒤지다 옆에 자리한 카페에도 들려 시원한 아이스커피로 목을 축이며 한적한 여유를 누리는 상상 속에서 벗어나기 싫어 고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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