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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팬더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 / 끌림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주제넘은 얘기겠지만 인간을 정의할 때 과연 ‘욕구’, ‘욕망’을 떼어놓고 말할 수 있을까?
살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인간이 이성의 동물’이라는 문구는 조금은 과장이자 인간의 바람이 농축된 허상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오히려 ‘이성’보다는 ‘감성’내지 ‘정서적 존재’에 더 가깝고 더 나아가 그 중심에는 ‘욕구’가 회오리치며 단단히 정체성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판단될 때가 있다.
그 만큼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무형의 ‘욕구’는 원천적 힘이 나를 얘기할 때 절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태어나서 숨을 거둘때까지...
내 세포 속에서, 또는 내 호두 모양의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활발한 활동과 전기신호를 열심히 주고받는 신경들일지, 아니면 가슴에서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대며 붉은 피의 원활한 공급에 일익을 담당하는 심장에서일지, 욕구는 다양하게 신호들로 표출하거나 대변하며 끊임없이 내 안에서 속삭인다.
뭣 좀 해보라고, 뭣 좀 해결해 달라고, 뭣 좀 공급해달라고, 뭐가 그리 요구나 주문도 많은지 주문서대로 움직이기에도 때로는 기진맥진할 때가 있다.
뿐인가? 만약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털퍼덕~ 주저앉아 있으면 왜 그리 야멸차게 스스로에게 야유와 조롱을 해대는지 변덕스럽고 잔인할 때가 있다.
하튼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었음에 틀림없고 어쩔 수 없다고 투덜대면서 나를 그렇게 정의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 욕구란 녀석이 내달릴 때는 밑도 끝도 염치도 없는 속성을 가졌으니 그 꼬리를 잡으려 쫓아가다보면 꼴이 말이 아니게 돼 버린다. 어느 새 나는 벼랑 끝에 핀 한 떨기 꽃송이에 집착하며 달랑달랑 매달려 그 꽃을 기어코 따서 향기 한 번 맡아봤으면 하는 희한하고 위험한 발상과 염원에 젖어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릇없는 녀석을 양몰이 하듯 회초리로 워~워~몰며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나름대로 수양도 쌓고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종교가 아닐까 싶다. 어느 종교고 대부분 가늠하며 뚜껑 열고 보면 결국은 욕구에 대한 처신과 정의와 은유내지 투쟁의 다양한 고민이 담겨 있다.
진정한 성공과 실패도 이와 엮어 있으니 세상살이 역시 ‘욕구’와의 한 판(사실은 여러 판) 씨름하며 그렇게 좌우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다 숟가락 놓으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금단의 팬더.
미스터리 소설 한 편 얘기하는데 뭐가 이리 장황한가 싶겠지만 참아주시라.
이름하여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08년도 상을 받았단다. 아~ 물론 옆 나라 일본 얘기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대단하다는 상을 받았을까? 우선은 상 얘기에 껌뻑 죽고 넘어가면서 호기심이 발동한다.
원래 상 얘기라면 열등감이라도 숨어있는지 한 몫 접고 들어간다. 이미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확인도장을 찍어야 속이 풀리는 속성을 지녔다.
무슨 상이고 상에 걸맞는 참잘했어요 도장이라도 들고 덤빌 태세로 몰입한다.
맛있는 미스터리. 표지에 붙은 이 한마디가 나름 금단의 팬더와 꽤 어울린다.
작가가 원래 요리사였다는데 이 전직 요리사 재주도 좋지 글도 괜찮다.
그러니까 골자는 소설이 얼마나 미스터리하냐고 누군가는 묻고 싶을 것이다.
아쉽게도, 역자 후기에 나와있듯이 그리 미스터리하지는 않다. 대신 그 둘레를 맛있게 둘러갔다. 왜냐 음식이 소재인데 그걸 맛있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나는 미스터리에 빠지기 전에 음식에 빠지는 것이다. 어느 새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중심에 있기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아 우아하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프랑스요리를 레드 와인을 홀짝이며 눈으로 코로 혀로 열심히 탐색하기 바쁘다. 누구는 또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꽤 풍부한가보다고. 어째 문자로 음식의 냄새를 맛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냐고.
그러니까 이건 내 풍부한 상상력의 위력이 아니라 작가의 풍부한 경험과 문체가 나의 숨은 저력을 표면 위로 밀어 올려 나는 파닥파닥 활갯짓하며 맛의 세계에 유영하고 있다.
팬더란 원래 대나무 잎이나 질겅거리고 씹어 먹는 초식동물이 아니었단다. 이 분류가 요상하게 어려운 동물은 전직 육식동물이었다는 근거로 식욕은 없어졌지만 날카로운 이빨의 퇴화된 흔적이 남아 있단다. 모르겠다. 지금도 팬더가 사람 눈을 피해 돌아서서 고기 맛을 슬쩍 보고는 입가심으로 대나무 잎으로 이빨을 쑤시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이런 의문을 앞에 둘 수 있다.
지나간 과거에 고기 맛을 알던 팬더는 과연 육식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
잊혀진 욕구는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이 가능할까?
집요하게 유전인자에 달라붙어 유유히 함께 흘러 살아남지는 않았을까?
소설 속에서는 미각으로 대표되었지만 인간에게 욕구는 얼마큼 누르고 금기를 지키며 그 너머의 본성을 숨기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야유 섞인 도발적 질문이 진지하게 밑바닥에 깔려있다. 참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면 삶이, 인간이, 세상이 미스터리 그 자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