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세계 2차 대전이 한참이던 시기 1943년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소련 장교 자세츠키는 한 알의 총알이 뇌에 맞아 일부가 손상되면서 그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어버리는 길로 가게 된다. 그로부터 25년 동안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데.....
지워지는 기억의 편린을 쓸어 모아 온전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얻고자 몸부림친다.

책을 읽으며 책을 읽고 서평 몇 줄 끼적이면서 참,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200페이지에 가까운 내용 대부분이 자세츠키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과 그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으며 루리야 박사의 진지한 설명을 바탕으로 그의 처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 있지만 사실은 뇌와 신경학에 대한 무지한 나는 그의 어려움을 근근이 이해하는 수준이다. 뇌가 인체 내부에서 중요하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일부가 망가지므로 해서 결국 인생의 방향마저 뒤흔들고 절망의 나락으로 쉽게 내모는 현실 앞에서는 왠지 모를 분노부터 곱씹게 되곤 한다.

기억, 그것이 안고 있는 가치에 대해 살면서 종종 확인하는 경험은 누구나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전에는 그저 건망증이 심해서, 정도로 치부해 버리던 일들이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일들이 기묘하게 내 생활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순간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곤 하는 것이다. 우스운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의 특성을 잡아내서 기억하는 일에 실패할 경우 다음번에는 분간이 어렵다든가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소요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건 이런 일이 예전부터 있던 현상이 아니어서 생경하고 사실은 두렵기까지 하다. 뿐인가? 사용하는 어휘가 점점 줄어들고 기억하고 낚아 올릴 수 있는 양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뭐, 어휘수를 가지고 그러냐 하겠지만, 결국은 나의 생각의 폭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의 세계에 대한 범주가 그만큼 나의 언어로 인해서 협소해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저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극단의 남자 이야기가 있다.
기억에 얹혀 떠내려갈 인생의 조각배가 구멍이 뚫린 것이다. 망망대해 한복판에 떠 있는데도 의지해야할 나침반 같은 기억은 무력하게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기억이 존재로서의 가치를 명확히 밝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어제와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끈을 부여잡지 못하고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맴돌아야하는 한 인간의 고백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워진 기억을 쫒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5년간의 일기쓰기에 매달리면서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잊혀진 언어들을 그러모아 정립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질문을 놓지 않는 집념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가 성공했냐고는 굳이 묻지 말기 바란다.
그건 또 다른 잔인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잃지 않고 노를 저어가고 있다. 또 저어갈 것이다. 루리야 박사의 소개로 우리에게 전해진 한 남자의 얘기에 난 심각하고 진지하게 열중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엄살 같은 기억력저하에 대한 푸념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나의 희망의 그림자를 비추어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것은 성공만이 아니라 굽히지 않는 집념의 횃불을 발견하고 묵묵히 천천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라는 것을, 내가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를 따라 쫓는 이유이다.
더불어 고전하는 한 인간의 고통을 학문적 시선에서만 머물지 않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듬어 따뜻한 과학으로 승화시키는 낭만적 과학자이자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로 로마노비치 루리야 박사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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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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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몸은 사라지더라도 여행기만은 남아서 불멸하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 (p337)

혜초는 왜 떠나고 떠나서 떠나기를 멈추려 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떠나게 했을까?
작가 김탁환은 왜 떠도는 자 혜초에게 몰두하였을까?
그리고 나는 그들을 징검다리 삼아 과연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혜초? 왕오천축국전?
어릴 적 국사시간에 억지로 외어서 찍어 누르듯 기억에 박아 넣은 익숙한 이름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기계적으로 손쉽게 불어올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단편적인 역사적 인물과 작품이 오늘 내게 무엇을 얘기할 것이란 기대를 한 적은 당연하리만치 없다.
그런 점에서 난 시작부터 김탁환에게 톡톡히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상상력과 설렘이 동반한 혜초에 대한 인물을 복원하여 나에게 인도하였으니 나는 우선 낯설지만 영예로이 혜초에게 조심스럽게 악수를 청한다.

그런데 먼저 여행기록 ‘왕오천축국전’이 6000자 남짓한 적은 분량의 책이라는 사실을 소설을 접하며 알고 적이 놀랐다. 물론 그 정도로도 당시의 시대적 공간적 정보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기는 하지만, 혜초라는 승려는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자신의 고난과 역경 속에 걷어 올린 경험들을 그리도 말을 아끼고 비워냈을까?
그러니 문장 사이에 숨은 말들은 어떻게 살펴 이해하며 혜초의 숨결을 읽어내야 하는가?

처음 솔직히 고백하자면 김탁환의 소설 ‘혜초’라는 제목을 들여다보며 난 의문스러웠다.
너무나 미약한 단초를 안고 있는 혜초는 내게 막연하고 신비스러운 인물로 떠올랐는데 그런 안개 같은 인물을 제 아무리 김탁환이라도 과연 접근이 가능할 것인가?
소설이 끝없는 상상력의 산물로 활개 쳐서 빚어낸 자유로운 영역이기는 하지만 정도가 있어야 할 듯.
그것도 역사적 인물이 아니던가? 내가 모르고 누구도 모른다 한들 한 살이를 살다간, 그것도 길 위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발자취를 작가적 상상력이 근거도 미약하게 접근하려는가? 섣부른 오만과 과용이 아닐까하는 부정적인 시선이 먼저 고개를 처 들었다.
그러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챕터를 한 묶음 한 묶음 흡입해 가며 나는 모든 걸 벗어버렸다.
모든 걸 버리고 가벼이 양피지를 소중히 담은 걸낭만을 소중히 등에 지고 길을 떠났을 혜초를 따라 나는 그의 곁을 함께 했다. 가다가 또 다른 낯익은 이름, 패망한 고구려 후예로 당나라 군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이름을 널리 알렸던 인물 고선지의 젊은 날의 모습과도 만났다.
실제 고선지와 혜초가 같은 시기를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둘이 머나먼 이역 땅에서 만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모래폭풍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떠받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상상의 힘을 빌어 오긴 했지만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왔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을 들여다보듯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여행에 동참하면서 재미에 빠져 순간순간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즐겁고, 슬펐고, 아쉽고, 서럽고도 기쁜 감상 속에 젖어 헤어나기 어려웠다. 그런 도취된 상태에서도 숨길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들은 끈질기게 김탁환의 문장을 통해 내게 전해져왔다.
작가의 의문이 내게 그렇게 전이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 스스로가 던진 질퍽한 궁금증일까?
그런데 혜초 그는 왜 위험한 길을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던 것일까?
불교라는 종교적 근원적 질문으로 시작된 자기 확인 과정이었다면 돈황이며 오천축국이라는 나라의 여행에서 마침표를 찍어도 무리한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불교와 관계없는 서쪽 여정과 더불어 파밀 고원이나 대유사(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보여주듯 종교 그 이상의 의지와 관념이 엿보인다. 무엇이 그를 목숨을 걸고 걷게 하고 사막을 건너게 하며 고원을 넘게 했는가? 또한 소설에서 김탁환이 끈질기게 끈을 놓지 않았던 질문, 그것은 혜초가 온몸을 던져 발바닥으로 보고 손으로 쓰는 일에 멈추지 않았던 그 행위의 의미 또는 쓰고 남기려는 기록에 대한 집착으로 보여준 혜초의 욕구.
그리고 그것이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불교적 가르침과 상충된 또 하나의 모순을 안는 승려 혜초의 근원적 고민이자 화두임을 넌지시 얘기하는 동시에 표현과 기록이라는 혜초의 문제 너머 작가로서 김탁환 자신의 숙명적 욕망의 그림자를 슬쩍 걸치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어인 모순인가? 고민한 자의 집착물인 ‘왕오천축국전’ 그것이 혜초라는 한 승려를 오늘날로 이어져 그의 존재를 증거 하는 것을.

그래서 김탁환은 혜초를 통해 자신을 증거하고 싶었는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욕망의 산물은 실로 너무나 멋지고 근사하게 빚어져서 독자인 내 앞에 성공적으로 놓여졌다. 나는 ‘혜초’ 이 한 작품으로 김탁환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아름다운 판타지 소설이라고 평하고 싶다.
비록 역사 속의 인물들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척 했지만 그 안에는 김탁환의 혜초가 터벅터벅 걸어 나와 세상을 호령했던 당나라라는 강력한 물리적 무대를 뒤로 하고 사막과 고원이라는 강인한 대자연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 들어서기를 멈추지 않았던 약하지만 강한 인간. 종교적으로 부드럽지만 그 힘으로 역시 세상을 이해하고 품으려 했던 인물로 거듭나서 실크로드라는 대장정의 길 위에 나를 초대한다.
나는 작지만 작아지지 말아야겠다. 약하지만 약해지지 말아야겠다.

김탁환의 특징이었던 한문체의 화려한 수사가 외려 혜초에서는 옷을 벗고 김탁환만의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가 불교적인 선의 시선으로서 더 한층 눈부시게 혜초의 여행길을 표현하는데 극치를 이룬다. 특히나 역사물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이 주는 특성을 맘껏 활용하여 환상적인 은유적 표현으로 인간 내면의 아픔과 근원을 더듬어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해가 낳은 김탁환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어서 김탁환의 혜초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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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한동훈 옮김 / 하늘연못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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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를 넘어선 근 100년에 가까운 시기에 활발한 활동으로 빛을 낸 영미의 미스터리 작가 5인 중심으로 중편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실제 그 시기가 황금기로 평가받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상징적 의미로 표현한 것인지 무지한 나로선 모르겠다. 다만, 개성강한 작가들의 미스터리 작품들을 이어서 여러 가지 맛을 맛보고 즐긴다는 의미만으로 흥미롭게 재미있다.
덕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당대의 유명작가들과 그들의 뛰어난 작품들도 알게 되었고, 더불어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특성에 더욱 매력을 더하고 알리는 데 일조하였다.
그건 아마도 에드가 앨런 포의 선구적 역할이 이런 여러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해 내는데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 중 이 중편선에서 소개한 작가들 중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 봤을 때 인상 깊었던 작가는 영국의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견된다는 미국의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의 ‘버클 핸드백’과 의뭉하기까지 한 아노 형사를 앞세워 사건을 추리 해결해가는 알프레드 에드워드 우들리 메이슨의 ‘세미라미스 호텔 사건’이었다.

웬만하면 여성 작가라는 타이틀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미국에도 미스터리라는 분야에 이런 센스 있고 뛰어난 여성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미스 마플 쯤 될까? 간호사 애덤스양이 사건의 중심에서 간호사라는 특성을 십분 살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편하게 다가가면서 문제에 접근한다. 차분하게 전문직으로서 활용이라고 할까? 때로는 서스펜스 있고 스릴 있는 분위기도 함께 양념처럼 더 해져서 서서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또 하나 알프레드 에드워드 우들리 메이슨은 (음, 이름 한 번 길다. 이건 한 사람의 이름이다.) 뛰어난 프랑스 형사 아노와 영국인 리카르도가 커플(?)이 되어 범죄 사건에 뛰어드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인물이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본인들이라는 것이다. 뭔가 예리하게 사건을 꿰뚫어 파악하면서도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아노에 비해 리카르도는 사건이 일어나면 솟구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로서 쉽게 생각이 읽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인지 이런 상반되는 인물들의 조합이 가져다주는 재미는 아기자기하기까지 하다.

프랭크 보스퍼의 ‘3층 살인사건’은 그의 유일한 작품이라는데 한정된 장소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주변의 인물들의 용의자로서의 개연성을 찾아 좁혀가면서 추리의 틀을 맞춰가는 보편적 이야기 구조를 가졌다.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데드 얼라이브’는 살인이 일어났다는 판결위에 과연 진짜로 살인과 피해자와 범인 간의 진실은 무엇인지를 물으며 다양한 각도로 인물들의 심리를 접근하며 복잡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한시도 호기심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의 ‘안개 속에서’는 이야기 속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무슨 얘기냐고? 자세히는 어렵겠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짧은 이야기들은 이어서 엮여있다. 거짓과 진실이 혼재되어 그럴듯한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는데 과연 이야기의 종말은? 그렇다. 나름 반전도 기다리고 있고 이야기들은 작가가 저널리스트여서 인지 꽤 치밀한 연속된 기사를 보는 느낌이다.

이렇게 저마다 미스터리의 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표현해주는 소설들이 한번 잡으면 과연 다음은? 이란 작은 호기심들을 자극하며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하는 동시에 빠른 전개로 끌어당긴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작가들은 왜 미스터리에 이렇게 혼심을 다해 도전하는 것일까? 그리고 독자는 끊임없이 미스터리나 추리에 빠져 열중하는 것일까?
그 속에 살인이나 범죄가 있고 범인이 숨어 존재한다면 그 진실에 다가가려는 욕망이 궁금증에 싸여 우리를 자극한다. 숨겨진 진실의 얼굴이 나를 웃게 할 것인가? 최소한 진실이 밝혀진다는 사실에는 위안을 받는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거짓과 진실이 버무려진 세상에서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항상 만난다.
그래서 일까? 소설 속에서만큼은 속 시원하게 범인 하나를 파악하고 알 수 있다는 무언의 약속과 이야기 구조는 대리 만족은 안겨 준다.
특히나 이 미스터리 중편선의 작가들이 활약한 시대가 알려주듯이 근대에 이르는 이성으로서 명확한 합리성을 기반으로 문제 해결이라는 좋은 상징이 끊임없이 연출된다. 미스터리와 추리와 해결 그것이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의 이성은 직감과 함께 활발하고 시원한 문제해결의 요구로 시험받고 있다. 항상 이성으로 접근하고 풀어가는 과정 속에 다시 추리물은 탄생한다. 인간이 지닌 이성의 선물과 더불어 숙명처럼. 미스터리는 인간이 있는 그곳에 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자연계에 자리했겠지만.
두뇌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한 난 미스터리에 빠져 작가들이 던지는 문제에 몰두 할 것이다. 미스터리, 너는 내 운명이다. 이런 운명 속에 재미있는 중편들을 만나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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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팬더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 / 끌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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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넘은 얘기겠지만 인간을 정의할 때 과연 ‘욕구’, ‘욕망’을 떼어놓고 말할 수 있을까?

살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인간이 이성의 동물’이라는 문구는 조금은 과장이자 인간의 바람이 농축된 허상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오히려 ‘이성’보다는 ‘감성’내지 ‘정서적 존재’에 더 가깝고 더 나아가 그 중심에는 ‘욕구’가 회오리치며 단단히 정체성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판단될 때가 있다.

그 만큼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무형의 ‘욕구’는 원천적 힘이 나를 얘기할 때 절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태어나서 숨을 거둘때까지...

 

내 세포 속에서, 또는 내 호두 모양의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활발한 활동과 전기신호를 열심히 주고받는 신경들일지, 아니면 가슴에서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대며 붉은 피의 원활한 공급에 일익을 담당하는 심장에서일지, 욕구는 다양하게 신호들로 표출하거나 대변하며 끊임없이 내 안에서 속삭인다.

뭣 좀 해보라고, 뭣 좀 해결해 달라고, 뭣 좀 공급해달라고, 뭐가 그리 요구나 주문도 많은지 주문서대로 움직이기에도 때로는 기진맥진할 때가 있다.

뿐인가? 만약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털퍼덕~ 주저앉아 있으면 왜 그리 야멸차게 스스로에게 야유와 조롱을 해대는지 변덕스럽고 잔인할 때가 있다.

 

하튼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었음에 틀림없고 어쩔 수 없다고 투덜대면서 나를 그렇게 정의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 욕구란 녀석이 내달릴 때는 밑도 끝도 염치도 없는 속성을 가졌으니 그 꼬리를 잡으려 쫓아가다보면 꼴이 말이 아니게 돼 버린다. 어느 새 나는 벼랑 끝에 핀 한 떨기 꽃송이에 집착하며 달랑달랑 매달려 그 꽃을 기어코 따서 향기 한 번 맡아봤으면 하는 희한하고 위험한 발상과 염원에 젖어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릇없는 녀석을 양몰이 하듯 회초리로 워~워~몰며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나름대로 수양도 쌓고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종교가 아닐까 싶다. 어느 종교고 대부분 가늠하며 뚜껑 열고 보면 결국은 욕구에 대한 처신과 정의와 은유내지 투쟁의 다양한 고민이 담겨 있다.

진정한 성공과 실패도 이와 엮어 있으니 세상살이 역시 ‘욕구’와의 한 판(사실은 여러 판) 씨름하며 그렇게 좌우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다 숟가락 놓으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금단의 팬더.

미스터리 소설 한 편 얘기하는데 뭐가 이리 장황한가 싶겠지만 참아주시라.

이름하여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08년도 상을 받았단다. 아~ 물론 옆 나라 일본 얘기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대단하다는 상을 받았을까? 우선은 상 얘기에 껌뻑 죽고 넘어가면서 호기심이 발동한다.

원래 상 얘기라면 열등감이라도 숨어있는지 한 몫 접고 들어간다. 이미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확인도장을 찍어야 속이 풀리는 속성을 지녔다.

무슨 상이고 상에 걸맞는 참잘했어요 도장이라도 들고 덤빌 태세로 몰입한다.

 

맛있는 미스터리. 표지에 붙은 이 한마디가 나름 금단의 팬더와 꽤 어울린다.

작가가 원래 요리사였다는데 이 전직 요리사 재주도 좋지 글도 괜찮다.

그러니까 골자는 소설이 얼마나 미스터리하냐고 누군가는 묻고 싶을 것이다.

아쉽게도, 역자 후기에 나와있듯이 그리 미스터리하지는 않다. 대신 그 둘레를 맛있게 둘러갔다. 왜냐 음식이 소재인데 그걸 맛있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나는 미스터리에 빠지기 전에 음식에 빠지는 것이다. 어느 새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중심에 있기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아 우아하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프랑스요리를 레드 와인을 홀짝이며 눈으로 코로 혀로 열심히 탐색하기 바쁘다. 누구는 또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꽤 풍부한가보다고. 어째 문자로 음식의 냄새를 맛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냐고.

그러니까 이건 내 풍부한 상상력의 위력이 아니라 작가의 풍부한 경험과 문체가 나의 숨은 저력을 표면 위로 밀어 올려 나는 파닥파닥 활갯짓하며 맛의 세계에 유영하고 있다.

 

팬더란 원래 대나무 잎이나 질겅거리고 씹어 먹는 초식동물이 아니었단다. 이 분류가 요상하게 어려운 동물은 전직 육식동물이었다는 근거로 식욕은 없어졌지만 날카로운 이빨의 퇴화된 흔적이 남아 있단다. 모르겠다. 지금도 팬더가 사람 눈을 피해 돌아서서 고기 맛을 슬쩍 보고는 입가심으로 대나무 잎으로 이빨을 쑤시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이런 의문을 앞에 둘 수 있다.

지나간 과거에 고기 맛을 알던 팬더는 과연 육식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

잊혀진 욕구는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이 가능할까?

집요하게 유전인자에 달라붙어 유유히 함께 흘러 살아남지는 않았을까?

 

소설 속에서는 미각으로 대표되었지만 인간에게 욕구는 얼마큼 누르고 금기를 지키며 그 너머의 본성을 숨기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야유 섞인 도발적 질문이 진지하게 밑바닥에 깔려있다. 참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면 삶이, 인간이, 세상이 미스터리 그 자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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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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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만화는 ‘습지생태보고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그래서 낯섦을 조금 면한 편이다. 그림체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가 통상 갖고 있는 과장이나 그래서 거기서 파생된 웃음이 대개 큰 특징이라면 최규석의 그것은 꽤 고지식한 편이다. 특히나 이번 ‘대한민국 원주민’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작가의 자전적인 삶을 통해 과거의 생생한 삶을 복원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을 길어 올려 표현해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답게 좀 더 사실적인 그림들이 특색을 이룬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보여주는 웃음은 대개가 블랙코미디였다면 이번 ‘대한민국 원주민’은 그마저 자제한 듯하다. 이유야 당연하다. 작가의 삶을 돌아보는데 있어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의 삶 하나하나가 엮여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진지한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원주민’ 전체는 꽤 무게감이 실려 있다.
그것을 위해 작가는 무엇보다 솔직한 사실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서 내용 중에는 너무나 솔직해서 보는 내 자신이 멈칫해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우스운 반응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소설이였다면 그랬을까? 작가의 집요하고 적나라한 접근이 자전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그래서 삶이 주는 현실성이 내게 사실적으로 전이되는 요소라는 걸 무엇보다 잘 알고 또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만화에는 그런 기대를 한 수 접어두는가?
이것이 매체에 대한 나의 이중성이다.
만화란 그저 웃기면 되고, 시간때우기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치함과 저급함 언저리를 맴돈다고 보는 시선에 심히 불편한 심기를 추스르기 어려운 나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렇게 맥없이 부서져버린다.

아무리 사실이라도 가능하면 부드럽게 버무려주기를, 예쁘게 포장해주기를, 마지막에는 웃음을 파르페 꼭대기를 장식하는 젤리처럼 살짝 얹어주는 센스도 잊지 말기를 바랬던 건 아닐까? 그것이 만화가 갖고 있는 범주 내에서 포용되는 내용과 표현이 아니었을까?

최규석 역시 이런 인식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을 끄집어내 내용면에서 장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만화가 갖고 있는 고질적 고정관념을 한 치는 깨버리고 싶은 욕구가 이런 시도를 통해 표출되었을 거라 짐작된다.

내용면에서 위에서도 얘기했듯 보는 내가 조심스러워질 만큼 상당히 솔직하다.
그런 과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과거를 대중 앞에 공개한다는 것이 보통의 내공을 갖고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 내공이라는 것이 가족에 대한, 자신에 대한 끈덕진 시선으로 파고들어 포획한 이해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젊은 작가에게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자신의 가족이 살아온 삶이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의 그것처럼 이 땅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가난과 혈육으로 얘기되는 질긴 가족애로 대변된 밑바닥 사람들의 삶이라고. 대한민국이 잘 살면 언제부터 잘 살았다고 이리도 과거의 모습을 가리고 아닌 척 풍요를 얘기하는지에 대한 거부감이 깊이 배어있다.
한 치만 파고들어 들쑤시면 사실은 우리에게도 대한민국 원주민의 숨기고 싶은 척박한 삶과 사연이 팔딱팔딱 고동소리 내지르며 숨 붙어 있는데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을 뿐, 또 그래서 결국 얻어지는 것은 무엇이냐고 은근히 조롱하는 것 같다.

최규석 덕분에 나의 표류하던 유전인자의 사연을 목도해야 했다.
결코, 별로 찾고 밝히고 싶지 않았던 얘기들. 뽄데나지 않던 시절의 얘기들. 땅에 묻어둔 고구마 줄기처럼 두두둑 엮여서 함께 끄집어내면 어쩔 수 없이 딸려 나와야 하는 관계의 얘기들.
그것이 최규석이 정의한 자신의 대한민국 원주민의 사연들이고, 나의 본적에 숨어 있는 원주민의 실상과 지도였다.
쓰고 아프지만 작가의 좋은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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