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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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만화는 ‘습지생태보고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그래서 낯섦을 조금 면한 편이다. 그림체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가 통상 갖고 있는 과장이나 그래서 거기서 파생된 웃음이 대개 큰 특징이라면 최규석의 그것은 꽤 고지식한 편이다. 특히나 이번 ‘대한민국 원주민’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작가의 자전적인 삶을 통해 과거의 생생한 삶을 복원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을 길어 올려 표현해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답게 좀 더 사실적인 그림들이 특색을 이룬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보여주는 웃음은 대개가 블랙코미디였다면 이번 ‘대한민국 원주민’은 그마저 자제한 듯하다. 이유야 당연하다. 작가의 삶을 돌아보는데 있어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의 삶 하나하나가 엮여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진지한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원주민’ 전체는 꽤 무게감이 실려 있다.
그것을 위해 작가는 무엇보다 솔직한 사실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서 내용 중에는 너무나 솔직해서 보는 내 자신이 멈칫해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우스운 반응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소설이였다면 그랬을까? 작가의 집요하고 적나라한 접근이 자전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그래서 삶이 주는 현실성이 내게 사실적으로 전이되는 요소라는 걸 무엇보다 잘 알고 또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만화에는 그런 기대를 한 수 접어두는가?
이것이 매체에 대한 나의 이중성이다.
만화란 그저 웃기면 되고, 시간때우기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치함과 저급함 언저리를 맴돈다고 보는 시선에 심히 불편한 심기를 추스르기 어려운 나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렇게 맥없이 부서져버린다.

아무리 사실이라도 가능하면 부드럽게 버무려주기를, 예쁘게 포장해주기를, 마지막에는 웃음을 파르페 꼭대기를 장식하는 젤리처럼 살짝 얹어주는 센스도 잊지 말기를 바랬던 건 아닐까? 그것이 만화가 갖고 있는 범주 내에서 포용되는 내용과 표현이 아니었을까?

최규석 역시 이런 인식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을 끄집어내 내용면에서 장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만화가 갖고 있는 고질적 고정관념을 한 치는 깨버리고 싶은 욕구가 이런 시도를 통해 표출되었을 거라 짐작된다.

내용면에서 위에서도 얘기했듯 보는 내가 조심스러워질 만큼 상당히 솔직하다.
그런 과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과거를 대중 앞에 공개한다는 것이 보통의 내공을 갖고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 내공이라는 것이 가족에 대한, 자신에 대한 끈덕진 시선으로 파고들어 포획한 이해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젊은 작가에게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자신의 가족이 살아온 삶이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의 그것처럼 이 땅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가난과 혈육으로 얘기되는 질긴 가족애로 대변된 밑바닥 사람들의 삶이라고. 대한민국이 잘 살면 언제부터 잘 살았다고 이리도 과거의 모습을 가리고 아닌 척 풍요를 얘기하는지에 대한 거부감이 깊이 배어있다.
한 치만 파고들어 들쑤시면 사실은 우리에게도 대한민국 원주민의 숨기고 싶은 척박한 삶과 사연이 팔딱팔딱 고동소리 내지르며 숨 붙어 있는데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을 뿐, 또 그래서 결국 얻어지는 것은 무엇이냐고 은근히 조롱하는 것 같다.

최규석 덕분에 나의 표류하던 유전인자의 사연을 목도해야 했다.
결코, 별로 찾고 밝히고 싶지 않았던 얘기들. 뽄데나지 않던 시절의 얘기들. 땅에 묻어둔 고구마 줄기처럼 두두둑 엮여서 함께 끄집어내면 어쩔 수 없이 딸려 나와야 하는 관계의 얘기들.
그것이 최규석이 정의한 자신의 대한민국 원주민의 사연들이고, 나의 본적에 숨어 있는 원주민의 실상과 지도였다.
쓰고 아프지만 작가의 좋은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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