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세계 2차 대전이 한참이던 시기 1943년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소련 장교 자세츠키는 한 알의 총알이 뇌에 맞아 일부가 손상되면서 그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어버리는 길로 가게 된다. 그로부터 25년 동안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데.....
지워지는 기억의 편린을 쓸어 모아 온전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얻고자 몸부림친다.

책을 읽으며 책을 읽고 서평 몇 줄 끼적이면서 참,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200페이지에 가까운 내용 대부분이 자세츠키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과 그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으며 루리야 박사의 진지한 설명을 바탕으로 그의 처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 있지만 사실은 뇌와 신경학에 대한 무지한 나는 그의 어려움을 근근이 이해하는 수준이다. 뇌가 인체 내부에서 중요하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일부가 망가지므로 해서 결국 인생의 방향마저 뒤흔들고 절망의 나락으로 쉽게 내모는 현실 앞에서는 왠지 모를 분노부터 곱씹게 되곤 한다.

기억, 그것이 안고 있는 가치에 대해 살면서 종종 확인하는 경험은 누구나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전에는 그저 건망증이 심해서, 정도로 치부해 버리던 일들이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일들이 기묘하게 내 생활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순간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곤 하는 것이다. 우스운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의 특성을 잡아내서 기억하는 일에 실패할 경우 다음번에는 분간이 어렵다든가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소요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건 이런 일이 예전부터 있던 현상이 아니어서 생경하고 사실은 두렵기까지 하다. 뿐인가? 사용하는 어휘가 점점 줄어들고 기억하고 낚아 올릴 수 있는 양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뭐, 어휘수를 가지고 그러냐 하겠지만, 결국은 나의 생각의 폭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의 세계에 대한 범주가 그만큼 나의 언어로 인해서 협소해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저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극단의 남자 이야기가 있다.
기억에 얹혀 떠내려갈 인생의 조각배가 구멍이 뚫린 것이다. 망망대해 한복판에 떠 있는데도 의지해야할 나침반 같은 기억은 무력하게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기억이 존재로서의 가치를 명확히 밝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어제와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끈을 부여잡지 못하고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맴돌아야하는 한 인간의 고백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워진 기억을 쫒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5년간의 일기쓰기에 매달리면서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잊혀진 언어들을 그러모아 정립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질문을 놓지 않는 집념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가 성공했냐고는 굳이 묻지 말기 바란다.
그건 또 다른 잔인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잃지 않고 노를 저어가고 있다. 또 저어갈 것이다. 루리야 박사의 소개로 우리에게 전해진 한 남자의 얘기에 난 심각하고 진지하게 열중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엄살 같은 기억력저하에 대한 푸념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나의 희망의 그림자를 비추어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것은 성공만이 아니라 굽히지 않는 집념의 횃불을 발견하고 묵묵히 천천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라는 것을, 내가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를 따라 쫓는 이유이다.
더불어 고전하는 한 인간의 고통을 학문적 시선에서만 머물지 않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듬어 따뜻한 과학으로 승화시키는 낭만적 과학자이자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로 로마노비치 루리야 박사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