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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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살아남아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 걸로는 충분치 않죠. 여러분의 피부는 정체성의 상징이자 세상에 내보이는 이미지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여러분은 결코 아니죠. 불에 탄다고 여러분이 인간 이하, 혹은 인간 이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저 화상을 입은 것뿐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사람들 대부분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피부는 의복이지 결코 한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사회는 아름다움이란 한 꺼풀에 불과하든 관념을 입으로만 떠들어 댑니다. 하지만 누가 우리만큼 그걸 이해하겠습니까?” (1권 p214 중에서)

“사랑을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 2권 p251 중에서)

언제부턴가 세상이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낭만’을 입에 담는 게 어색하고 민망하다. 낭만을 꿈꾸고 노래하면 세상물정 모르고 또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같아 역으로 속물적인 것을 넘어서 더 속물적으로 읽힌다.
어쨌든 이리저리 심사가 꽤 배배 꼬여 있나보다.
그런 요즘 낭만적이다 못해 철철 넘치는 소설 하나를 읽었다.
그리고 의외다 싶은 건 내가 그 흘러넘치는 낭만에 젖어 달콤한 아픔을 되새기며 감상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긴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다.
자그마치 700년을 푹 묵히고 익혀온 시간이 쩐 사랑이니 그 깊은 맛 앞에 누가, 무엇이 명함을 내밀겠는가?

『가고일』. 제목부터 수상하다.
대체 가고일이 뭐지 하는 질문은 극히 솔직하고 자연스럽다 하겠다.

‘가고일은 고딕 성당의 외벽을 장식하는 괴물 형태의 물받이 조각상을 말한다.’ (옮긴이의 글 중에서)
◆가고일=중세 유럽 건축물, 주로 사원의 지붕이나 처마 등에 붙어 빗물을 모아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던 괴물 조각상.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사원의 괴물 조각상들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중세 사람들은 가고일이 악령을 쫓아낸다고 믿었다. (중앙일보 10월 18일자 작가 인터뷰 기사 중에서)

남자는 잘생기고 잘나가는 성공한 포르노배우. 마침 마약에 쩐 상태로 운전을 하다 환각에 빠져 그만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그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그는 괴물 같은 외모와 망가진 육체를 갖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그저 극적인 상황이다 싶어 넘어가겠는데 내가 점점 몰입하게 되는 것은 그 망가진 외모로 가는 화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며 남자의 고통어린 심리를 작가는 너무도 잘 잡아내고 있다. 마치 눈앞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는 석쇠 위의 오그라드는 고기 살점을 연상시키듯 아니 타는 살 냄새가 진동해 내 코를 바로 움켜쥐고 막아야 할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는 바로 막막한 주인공의 심정에 내가 눌러 붙어 병원 침대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단지 절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무력해 좀 더 적당한 단어를 찾아야 할 것 같아 안달하면서 미이라처럼 붕대를 칭칭 둘러 감은 피고름 고인 육체의 소유자가 된 기분이었다.
피부가 세상과 자아의 경계선으로서의 역할과 의미를 주인공의 독백 속에 귀 기울이며 깊은 현실과 한계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니 그런 그가 자신을 괴물로 자각한다 해도 감히 쉽게 동정의 감상에 젖는 일조차 무책임하게 생각되었다.

그런 그에게 여자가 다가왔다. 그 남자의 괴상한 외모 따위는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는 듯하다. 얼마나 대단하고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이기에?
사실은 대단한 여자의 대단한 사랑의 무게 때문이며 한순간에 가까운 현실 속에서 그의 화상으로 상처받은 육체에 매몰되기에는 너무나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가고일 조각가였다. 커다란 돌덩어리에서 비록 괴상한 몰골의 괴물 가고일을 정으로 쪼아 조각하는 작업이지만 결국 영혼 역시 생명처럼 잉태하고 간직한 또는 가둬놓은 돌덩어리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선사하는 산파로 존재한다.
그런 그녀가 괴물 가고일 형상의 살아있는 남자에게 사랑으로 영혼의 자유를 선사하는 것은 어쩌면 숙명일 것이다.
사랑! 남은 마지막 심장을 선사하고 자신은 산화하므로 마침표를 찍는 행위이자 각오가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사랑은 비극을 동반하나보다. 소설 속에 액자소설로 작은 사랑이야기들이 들려온다.
모두가 실패한 슬픈 사랑이야기.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감정의 끈으로 영혼을 사로잡는 깊이의 연가들이다. 사랑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나의 심장 너머로 상대의 영혼을 담아서 끝없는 세월의 장벽 앞에서도 흘러 흘러 갈 수 있는가? 자문해봐야 한다. 상대가 억울하게 지옥의 인질이 되어 애달프고 구슬프게 울며 그대를 기다려 지옥 속으로 기꺼이 찾아갈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도리질을 칠 것이다. 결국 이것이 나의 사랑의 한계일 것이다.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가 슬픈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랑의 크기 앞에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해져서 더없이 슬프다.

『가고일』을 읽으며 나는 차마 낭만을 잃은 내 자신으로서 세상을 탓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낭만(?) 따위에 코웃음을 치는 자신이 꽤 성숙하고 지성적인 냥 으쓱해 하는 꼴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깨달았다. 그리고 조용히 흔하디흔한 사랑 얘기가 담긴 대중가요를 한 소절 흥얼 거려본다.

결국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 아름다운 외모의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그래서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리라.
‘사랑’과 ‘인간의 본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로 이 가을의 시간을 채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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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하지 무라드 - 톨스토이의 붓끝에서 되살아난 슬픈 영웅 이야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페이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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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레프 톨스토이의 유작이라는『하지 무라드』는 패배한 영웅의 비극적 결말을 담고 있다.

그건 마치 바람에 휩쓸리듯 한 순간에 허무하리만치 스러져가는 모습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톨스토이는 꽤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왜? 왜 톨스토이는 말년에 이런 패배하는 모습의 인물을 그려나갔을까?

무엇이 젊은 날에 만났다는 인물을 끈질기게 가슴에 담고서 그의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다가 말미를 장식하게 했을까? 그것도 비록 잠시나마 러시아로 망명을 선택했지만 다시 배반을 하고 떠나는 적이었을 적장에게서 무엇을 읽어낸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에는 나의 조급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순수히 톨스토이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야 할 듯 싶다. 손가락의 의도에 목말라하기보다 달에 몰두해서 그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지름길이지 싶다.

소국의 총독 하지 무라드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에는 주변 정세가 가파른 지형을 형성하듯 굴곡진 세월과 고통으로 그를 에워싼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적의 적에게 먼저 달려가 머리를 숙이고 충성을 맹세해야 원하는 방향으로 한발 내디딜 수 있는 숙명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속에 러시아로 망명하여 목숨의 위협이 되는 상관이었던 샤밀을 적대시해야 했는데 그에 맞서 싸우기도 전에 이미 하지 무라드의 가족은 샤밀의 인질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러시아에 충성을 담보로 가족을 구하려 도움을 요청하며 애를 써보지만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러시아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결국 하지 무라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동시에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하지 무라드의 운명 속에서 어쩌면 톨스토이는 러시아라는 국가가 짊어진 현실적 비극을 투영시킨 것은 아닐까?

바람 앞에 등불 같은 현실 앞에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니콜라이 황제의 작태를 슬쩍 끼워 넣어 표현한 장면들을 보면 톨스토이의 냉소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도사리고 있다.

개인의 지혜? 개인의 용맹? 개인의 지략과 전술? 이 모든 걸 움켜쥐어도 결국 어리석은 전체의 힘, 권력의 추태 앞에서는 작아지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사실은 하지 무라드라는 상징된 인물이 뱉어내는 신음 속에 녹아 있다.

굳이 하지 무라드의 마지막을 들먹이지는 않겠다.

 

그저 처음 시작 때 말을 꺼냈듯 경험 많고 지혜로운 늙은 자로부터 그의 속삭임에 경청하고자 한다. 문장의 자간에 숨어있는 뜻을 알고도 싶다.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가 뱉어낸 일성을 움켜쥐고 싶다.

이것을 세기의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리라 믿는다.

 

소설은 들판의 피어난 꽃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아름다워 눈물 나는 만발한 야생화들에게서 약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보면서 그를 떠올린다. 인간의 야만성에도 굴복하지 않는 야생화의 자존력을 보며 톨스토이는 아마도 하지 무라드의 패배를 패배로 읽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삶과 죽음이 비극을 넘어선 영원하고 진정한 가치로 잉태한 승리한 삶으로 재해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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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플라워 -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는 비밀스런 이야기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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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런 걸 보면 현재의 우리가 되는 데에는 아주 많은 원인들이 있는 것 같아. 우리들은 그런 원인들에 대해 대부분 전혀 알 수가 없을 거야. 하지만 비록 우리들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가를 선택할 능력은 없다 해도, 태어난 곳에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선택할 수는 있어. 우린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 대해 만족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어. - (p301 에필로그 중에서)

 

어린 아기가 아프고 나면 쑥쑥 자란다는 위로의 말이 있듯이 성장하는 데는 성장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건 무형, 유형의 상태이기도 하고, 육체적, 정신적 모든 상황이 포괄적으로 포함된다.

특히 십대는 이중의 성장 속에 혼란이 가중되면서 속수무책인 시기이기도 하다.

어른도 아닌 것이 아이도 아닌 것이 안개 같은 시야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전에 십대를 벗어나 한참이나 지나온 지금도 십대를 생각하면 희망이란 단어와 동시에 아픔을 떠올린다. 그리고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긍정적인 의미의 성장통을 역설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기로만 떠올리기에는 멀미가 난다.

뿐만 아니라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성장’대신 ‘성숙’이란 단어를 선택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역시나 성숙해지는 데도 그만큼의 고비와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월플라워.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란 뜻이 있다고 하니 꽤 쓰린 말이다.

그 속에는 소외의 감정이 내비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좀 더 폭넓게 방관자로서 타의적, 자의적 시선이 깔려 있다.

아무도 주인공 찰리를 방관자로 내몰지는 않는다. 물론 아무도 그를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흔히 이 작품을 『호밀밭의 파수꾼』과 비교하나본데 주인공 찰리는 그리 냉소적이거나 반항적이지 않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를 들어가 방관자로서 주위의 환경과 친구, 가족들의 일상과 과거를 얘기하면서 스치듯 겪게 되는 성장통을 겹겹이 보여주고 있다.

어릴 적 따뜻하게 의지하던 이모의 죽음과 관련된 기억은 그가 성장하면서도 방관자로 벗어나 현실 속에서 망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찰리가 기억의 족쇄를 풀고 자유로워지는 계기는 무엇일까?

뜻하지 않았던 현실의 직시였다.

물론 고통을 감내하는 시간을 보내고 난 후였지만 스치는 바람을 감지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의 신호를 확인한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삶 속에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이며 서서히 ‘참여’하는 자신을 꿈꾸고 다짐한다.

 

나는 왜 성장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과거에 대한 회귀를 꿈꾸는 것도 아닌데......

찰리를 통해 나는 나와 관련된 무엇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이것저것 뒤섞인 감상을 뒤적이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곤 했다.

 

찰리가 무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일기가 아닌 편지는 일방적이기는 해도 상대가 있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고통스러워도 상대를 추구하는 본성은 우리를 월플라워로 머물러 있게 하는 상태를 거부한다. 어쩌면 그것이 희망과 행동의 출발점이 아닐지.

혼자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은 존재와 자유의 확인이라는 과정을 겪는 찰리와 그의 친구들, 그 속에 해답이 엿보여 다행스럽다.

내가 성장소설 속에서 확인하고 싶은 해답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장기를 거쳤다고 모든 것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미로 속에서 헤매고 벽에 부딪히고 고통을 호소해도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현실이 눈 앞에 있다.

그때 성장기의 앨범을 들추듯 확인하게 된다.

누구나 방황하고 누구나 고독해하고 누구나 서툴게 실패를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는 성장통을 겪어야 한뻠의 성장이 약속된다는 사실을 성장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 되새김질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월플라워의 비밀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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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그녀 이력서를 쓰다 -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는 여성 10인의 이야기
김병숙 지음 / 미래의창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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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이 발전하니 변화야 당연하고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요즘의 변화는 사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상대적으로 개개인이 피부로 느끼는 변화의 압박은 모든 세대를 아울러 아득한 고지를 고단하게 등정 점령해야하는 시대적 과제이자 명령과도 같아 하루하루를 버겁게 갈무리하며 마무리하기 급급하다.

 

그 중에 여자는 어떤가?

아마도 시대적 사회적 존재 가치며 요구조건이 제일 급격하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변화무쌍하니 조건에 발맞추어 나가는 것조차 단단한 각오와 독기마저 품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런데 항상 새 시대 요구에 수긍하며 나아가자는 참 멋지고(?) 도전적인 캐치프레이즈 뒤에 숨죽이고 숨어서 발목을 꼭 붙잡고 꼼짝 못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변화를 저해하고 과거의 관습으로 포장된 사회적 보수성은 발전에 있어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구구절절 허풍스럽게 떠드는 내 투덜거림은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자.

하튼 살아가기 어려운 여인네들은 이제 서른아홉에 이력서를 준비하고 써야 하는 상황에 자의든 타의든 놓여 있다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아 그 말부터 꺼내야겠다.

그럼 한참 부족하다고 주의를 듣다 갑자기 이력서를 준비하라니 기가 눌리고 더욱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 그것에 대비해 친절하게 매뉴얼을 적어 예를 들어가면서 알려주는 책까지 등장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다.

 

주인공은 전업주부. 서른아홉에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워킹맘을 이미 멋지게 해내고 있는 동창을 찾아 멘토로 삼아 준비를 하면서 겪는 고민과 과정을 쉽게 설명해 놓았다.

우선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수명연장이다.

이런, 앞으로 미래에는 백년이 넘는 수명으로 우리가 겪을 경제적인 문제로 직업은 절대적으로 다급한 수행명제가 되어버렸다. 직업도 평생 여러 개를 전전해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다. (아~한 가지 직업도 구하기 어려워 발버둥 치는데....)

그러니 늘어난 수명에 기뻐서 환호성을 질러야 하는 지까지는 아직 얼떨떨하여 모르겠지만 갑자기 긴장감이 내부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부지런히 이 책의 책장을 넘기게 한 요인이기도 한데, 다행이 이력서를 준비하는 여자들의 처지를 10인의 여성들의 본보기로 적절하게 얘기해줘서 우선은 용기를 얻는다.

제대로 알고 준비하는 것. 골자는 그것이겠지만 늦었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성 싶다.

어차피 미래에는 직업을 몇 개씩 거쳐야 하니 지금 그 중에 하나를 겪어가는 과정일 뿐임을 위로 삼아 조급해 할 건 없을 것 같다.

 

물론 『서른아홉 그녀 이력서를 쓰다』이 책이 밥을 떠먹여주지는 않는다.

또 다양한 반찬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을 맞춘 흔적은 역력하다.

직장인으로서 사용언어며 마음가짐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의사결정 훈련하기(p209)등을 보자.

당연한 듯하지만 옷 한 벌을 사도 갈팡질팡하는 나로서는 선택이라는 덫이 얼마나 진땀나는 현실임을 매번 느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데,

의사결정의 어려움 극복방법」으로 ①두려움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②우선순위를 정한다. ③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④장점과 단점을 비교한다.⑤정보를 분류한다. ⑥한 번에 한 단계씩 밟는다. ⑦자신의 감정을 살핀다. ⑧긍정적인 것에 집중한다. ⑨자신에게 관대해진다. ⑩책임을 진다.

왜 누구나 아는 뻔한 얘기를 늘어놓느냐고?

그래도 어쩌랴, 우리가 가다 걸려 넘어지는 것은 뻔한 돌부리인 것을.

이력서를 준비하는데 불안을 느낀다면 이 책도 한번 들쳐보자.

그리고 작은 용기에 기대어 앞으로 실천하며 나아가자.

그 정도라면 이 책은 무리 없이 의미 있는 속삭임으로 다가올 실용서 역할은 톡톡히 할 것이다.

물론 실천은 우리 자신들의 몫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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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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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가 곧 자신의 인생에서 삶이요, 앎이었다고 강력히 피력하는 노학자가 여기 있다.
김 열규.
난 선생의 다른 책을 읽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학문적 접근이나 관련된 그의 시선에 대해서 잘 모르고 또 그것을 전할 주변은 못 된다. 단지 한국학이라는 내 자신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된 문제들을 천착해온 명성만은 익히 들어온 터다.
특히, 이번 『독서』라는 책에서도 슬며시 내비쳤듯이 ‘고독’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고민과 관심의 흔적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그가 평소 주력해온 한국인의 삶과 죽음이라는 테마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서 주의하도록 하자.
책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여기서 말하는 독서, 즉 읽기란 책만을 주목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읽기란 세상의 모든 것이 대상화될 수 있음을 간간히 짚고 있다.
책을 넘어서 자연, 사람, 나를 둘러싼 환경 이 모든 것이 책처럼 읽히는 작업을 필요로 하며 그것도 깊이를 담아야 하는 어렵고 중요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도 이 점에 수긍하면서 역시 인생 선배다운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체험을 통한 삶과 앎의 체득을 세상의 어떤 책의 내용과 비교할 것인가?
체험을 통한 사고가 인생을 깊이로 인도하고 자아를 풍성하게 하는 넓이로의 초대라는 것임을 무엇으로 부정하겠는가?
단, 세상의 모든 걸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간접경험이자 삶의 조언자로서 책을 가까이 하는 것임을 미리 못 박고 넘어가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은 은근하고 짜릿한 재미다.
그런데 그것이 독서일기라면 어떨까? 떳떳한 호기심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다.
자기의 등장이 당연한 양 호기심은 당당하게 나에게 지시한다. 어서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라고. 그것도 남의 독서일기를.

‘김열규의 책 읽기 독서’는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독서일기 격이다.
글을 모를 때부터 귀로 듣고 읽어내던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부터 어머니의 제사와 관련된 언문 제문, 글을 읽기 시작하고 접했던 동화들과 유년기를 넘어 청소년기 때 구하기 어려웠던 책을 열심히 찾아 친구들과 돌려보던 경험들. 나라가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돌아갔을 때 버리고 간 물건 속에서 건져 올려 갈증을 해소했던 책들, 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도 미군들이 버린 것들 속에서 보석같이 여기며 찾아 읽던 책들이 그의 젊은 날 영혼의 양식이 되어 그를 키워나갔다.
끊임없는 책읽기가 그의 인생의 동반자임을 고백하는 면에서는 나의 독서에 대한 열정의 깊이를 돌아보았다.
참 보잘 것이 없구나 싶다.

또한 선생은 경험을 통한 책읽기의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장르 읽기에 따른 방법들. 또 속도와 깊이에 따른 주문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절대적인 인상을 심어준 몇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아니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우물처럼 비춰준 자화상 같은 소설이나 작품들이었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노년에 여유 있게 인생을 되돌아보며 반추하면서 동반자에 대한 고백을 하듯이 써내려간 개인적 글쓰기는 책읽기에 얹혀 그의 인생을 훑고 있었다.
어찌 책읽기가 자아의 시선과 의식과 사고에 동떨어진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철저히 자신에 대한 거울로서 책은 존재하는 것 같다.
책읽기를 통한 솔직한 경험을 얘기하므로 김열규 선생의 인생을 읽었고, 김열규 선생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책읽기의 소중함을 배워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자신의 책 더미를 들여다보았다. 재미로 읽든, 의미를 담보로 지적 허영에 들떠 들추든, 결국 그 속에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확인한다. 끊임없이 읽어나가겠지만 끊임없이 내가 그 속에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숨길 수 없을 듯싶다.
질기고 고단한 작업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책 읽기, 삶 읽기, 세상 읽기........
그러나 보물섬 발견을 꿈꾸는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과 꿈을 얹어 내 자신 그 일에 평생을 두고 매진할 수 있기를 넌지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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