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소년 7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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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년은 그리 친절하지 않다. 꽤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신뢰감을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간만에 <불가사의한 소년> 7권을 접했다. 마침 같은 작가의 <천재 유교수의 생활> 몇 권을 읽고 난 후여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비교가 가능했다. 분명 다른 맛을 간직하고 있는데 유교수에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긴 호기심, 즉 관심을 품고서 대하지만 불가사의한 소년은 한 발짝 물러선 거리감을 갖고서 전체를 보려고 한다. 그래, 그런 대로 좋다.

 

몇 년 전 불가사의한 소년을 접한 후로 간만에 읽으면서 잊혀졌던 아련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만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아쉽게도 8권은 중고조차 구할 수 없어 출판된 전부분을 읽지 못했다. 만화도 부지런히 구입해서 읽어야 하나부다. 소년의 불가사의함을 통해 인간의 불가사의한 모습을 끄집어내어 밝혀주고 있다. 환상적이면서 집요한 고집이 있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불완전함이 주는 부분에서 서로에게 배려를 배우게 된다. 반복되는 고백이지만 불가사의한 소년을 계속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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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왕 - 안데르센 동화집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5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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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 만나는 안데르센의 동화세계....

어릴 적 내가 접한 동화는 다양성에 있어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에 유독 안데르센 동화나 그림 동화는 빈약한 동화 세계를 단비처럼 적혀주었고 지금껏 나의 척박한 어린 날의 지형에 우뚝 서서 등대처럼 상상의 나래를 이끌고 비춰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푸르른 어린 날의 기억은 아름다움만을 품고 키워왔던 거 같다.
‘인어공주’의 욕망보다는 마지막 물거품이 주는 허무에 의미조차 이해가 부족한 속에서도 하염없이 슬퍼했으며, ‘성냥팔이 소녀’가 놓인 사회적 위치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으면서도 그저 성냥을 켜서 그 속에 상상을 불어 넣는 소녀의 능력이 아름답다 여겼다.

왜 내가 처음 접한 동화 ‘백설공주’는 계모라는 존재와의 갈등에서 피해자로 전락해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켜보면서 뜻 모를 공포에 떨어야 했는지......, 계모에 대한 이미지 구축은 동화 한두 편이 기여(?)한 것은 아니다.
신데렐라는 어떤가? 마지막 유리구두로 상징되는 왕자님과의 만남에서 신분상승이라는 반대급부가 주워졌으니 망정이지 계모와 새언니들의 핍박은 가히 대단한 학대의 표본이다. 거기다 ‘백조왕자’를 보면 이 사실들은 변함없이 세뇌에 가깝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계모들이 이렇게 난동(?)을 부리고 있는 동안 아버지들은 대체 무슨 생각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많은 동화 속에서 생물학적 아버지는 존재하되, 사회적인 역할로서 존재는 너무도 희미하다. 자식의 고통에도 이해는커녕 방관자로 물러서 있는 아버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갈등 구조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 희생된 거라면 분명 난 이 어처구니없는 아버지들을 꼽고 싶다. 동시에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성들의 강인한 힘이다.

안데르센. 그에게 그를 둘러싼 여성들은 대체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그가 피부로 느끼는 여성은 얼마나 가녀리고, 허공을 떠도는 물거품처럼 약한지, 허상을 비추는 성냥불에나 의지하는 동시에 눈의 여왕처럼 무지막지한 절대 권력의 차가운 존재이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지만 이런 성격의 존재들의 대척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인물들 또한 여자들이다.

그것도 약하고 착한 여자들.
눈의 여왕에게 납치되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조차 못하는 카이를 구하고자 하는 게르다. 오빠들은 속수무책으로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되었지만 그것을 풀고자 가시밭길을 걷는 소녀 엘리자.

그런가하면 안데르센 동화의 인물들은 참 슬프다.
약하고 무력하기 때문이다.
‘장난감 병정’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이팅게일’이 내몰릴 때 할 수 있는 일은 멀리 날아가는 것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노래하는 일.

뿐인가?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가져서는 안되는 것을 탐한 죄에서 시작된다.
행복도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속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그저 ‘오즈의 마법사’에서처럼 태풍에 휩싸여 머나먼 무지개 너머 세상을 꿈꾸는 도로시에게 잠시의 모험으로서 교훈을 안겨주는 애교(?)정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다.
원하거든 철저히 일대일 거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히 부서지고 만다.
물론 난 인어공주의 욕망에 무조건 한 표를 던져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름다운 바다를 저버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번밖에 본 적 없는 왕자에게 첫눈에 반해서 모든 걸 내건다. 하긴 그것이 어디 왕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겠는가? 왕자라는 표상 뒤에 숨은 자신이 갖지 못한 또 다른 조건들일 것이다.
물 속에 사는 인어에게 지느러미나 꼬리 대신 웬 다리에 대한 꿈이란 말인가?
푸른 바다보다 산과들을 꿈꾸고 300년 정도는 산다는 생명의 길이보다 인간만이 가졌다는 영원한 영혼이라니.
그러나 이런 욕망이 비극인 것은 이성적 판단의 소산물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접고 지우고 포기하고 잘라내서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지혜란 경전에나 있는 얘기라는 사실이 나의 인간됨이 갖는 또 다른 비극의 단면임을 어찌하랴.
내가 인어공주의 허황된 꿈에 질린다지만 내가 가진 또 다른 꿈은 때로는 인어공주 못지 않다는 걸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그저 도로시처럼 한 순간의 꿈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안데르센 동화집 『눈의 여왕』을 읽고 감상 대신 투덜거리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어린 날의 감상을 끄집어 내면서 어린 나를 만나고 순간 순간 향수에 젖곤 했다. 그 때는 미처 몰랐다고 못은 박지만 왜 그 때 이런 저런 날카로운 면도날의 난도질이 필요했겠는가? 작고 예쁜 감상이 어린 나의 작은 세상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모처럼 성인이 되어 읽은 안데르센 동화집은 뜻 깊은 시간의 선물이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난 첫 장을 넘기며 눈의 여왕을 읽을 때 서늘한 궁금증과 슬픔이 밀려왔다. 왜 눈의 여왕은 남자 아이 카이를 납치한 것일까? 그녀에게 카이는 어떤 존재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 역시 외로웠을 거라는 짐작만 안은 채......
화려한 삽화가 그려진 작은 책의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레 넘기며 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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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의 과부 1
존 어빙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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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다.

십대에 임신을 하고 결혼한 매리언은 남편 테디와 사이가 안 좋을 때 사랑하는 아들 둘을 교통사고로 잃는다. 시간이 흘러도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녀는 남편 일을 돕기 위한 죽은 아들들 또래의 아르바이트생 에디를 만나면서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사랑을 대신한다. 그런데 하필 둘의 잠자리 모습을 네 살배기 딸 루스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니까 꽤나 자극적인 셈인데 그렇다고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려고 작정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인물들과 상황과 사건들이 얽히면서 그들의 심리 묘사가 문장마다 촉촉이 배어나며 깊은 회한과 사랑,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물 흐르는 듯한 묘사들은 작품 속에 몰입을 불러일으키면서 작가의 이야기꾼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긴 세월을 두고 사람과 사랑을 쫓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나가면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주고받는 애정과 증오는 깊은 상처를 낳고 상처를 어루만질 상대를 그리며 욕망과 갈등 속에서 발버둥 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적나라하게 펼쳐놓는다.

 

즐거운 나의 집을 연상시켜야 마땅할 가정이 사실은 온갖 사랑과 상처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는 씁쓰름하고 떫은 맛을 떨치기 어렵다.

 

아쉽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 해야 할까 존 어빙이라는 작가를 이 작품으로 이제서 처음 만났다. 첫 만남의 감상을 얘기하자면 소설은 무척이나 재미있었고 가치는 재미를 뛰어넘는다고 해야 하겠다.

방대한 길이의 그의 장편 소설을 놓고 늘어놓는 찬사가 그저 허풍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만나 기갈 들린 한 독자로서 가뭄에 단비를 맞아 잠시 갈증을 해소하듯 즐기며 소설을 쉼 없이 읽었다.

그리고 나는 ‘존 어빙’이라는 작가와 『일년동안의 과부』라는 이 한 권의 소설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 같다.

이야기가 가진 묘미와 매력이 위력적으로 표출되어 마치 분화구 안에서 꿈틀대는 붉은 열기과 불기둥의 분출을 꿈꾸는, 내재된 욕망을 함께 흡수하는 것 같아 포만감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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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 - 엔도 슈사쿠의 인생론, 향기 가득한 교양산문의 빛나는 경지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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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헛된 것이 없었으며,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p27 ‘고통은 나의 힘’ 중에서)

사랑의 제1원칙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마냥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라면 인생에는 굳이 ‘사랑’이 필요 없다. 인생이 고달프고 추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 대한 미화가 사라지고 정열이 퇴색해진 상태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상대방의 좋은 점만이 아니라 결점이나 싫은 점을 포함해서 진정한 모습을 확인하고도 그런 상대를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연애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라.
(p167 ‘사랑과 연애는 전혀 다르다’ 중에서 )

엔도 슈사쿠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우연히 <침묵>을 읽으면서다.
‘신’과 ‘인간’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뇌가 내게 전이되어 한동안 내 안에 작은 울림으로 남아 주체할 수 없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수필집 『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을 잡을 때까지 오랫동안 그를 기억 밑바닥으로 쓸어내려 구석에 담아 두어왔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의 감상을 떠올리기에 앞서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로 혹여 종교적 설교나 원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급급한 건 아닐지 미리 속단하는 우를 범한 것도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한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폭과 깊이를 담고 인생을 관조하는 자세에서 여타종교의 좋은 말씀들도 고이 마음에 새겨 삶을 도모하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지혜로운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스스로 실천하며 경험했던 인생의 희로애락을 통해 온전히 삶으로 아로새긴 명언들이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유쾌하게 살아가자는 행간의 주문도 읽힌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점은 인생에서 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 고통마저도 당시에는 불행을 떠올리지만 결국 커다란 교훈으로 인생을 풍성하게 한다는 작가의 고백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죄와 악을 정의하는 작가의 설명을 통해 이제껏 익숙하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엔도 슈사쿠의 시선도 함께 감지되었다.
특히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여자들의 논리’에서 여성들의 비약적인 논리를 ‘톡톡 튀는 팝콘 논리’ 같다며 꼬집으면서도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여자는 역시 멋진 존재다’ (p161)라는 표현으로 결론내리며 끝맺을 때에는 그의 여유 있는 유머가 돋보였다.

작가가 일생 중 육체의 아픈 시절을 경험해서 인지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해하면서 아픈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슴으로 담아내면서 따스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문장 하나하나에는 화려한 수사대신 담담하고 수수한 어투로 고집스럽지 않고 성실하게 삶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것이 엔도 슈사쿠의 인생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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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애덤 필립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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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함은 광기의 대안을 뜻하는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멀쩡함은 굴욕을 예방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야 한다.
( p270 3부 이제 멀쩡하다 중에서 )

한 권을 책을 읽고 이렇게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선은 ‘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나만 이런 감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더니 마지막 옮긴이의 후기에서도 비슷한 고백을 발견한다.
그제야 이해가 짧은 자신만을 탓할 일은 아니라는 핑계거리를 찾은 셈이며 안도하게 된다.

‘멀쩡함’과 ‘광기’는 마치 불가분의 관계처럼 해석되는 종류의 단어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지적한 대로 참 애매모호한 정의를 안고 있었음에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이 둘을 굳이 묶어서 반대 개념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성 싶다.
그런 의식의 밑바닥을 파고들기 위해 저자는 참으로 먼 길을 돌고 돌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다방면으로 천착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꽤나 지루한 감이 없지 않은데 그 길들을 짚고 넘어가며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집요한 저자의 지적들과 질문들이 산재해 있다.
멀쩡함과 광기는 분명 다른 개념인데도 그 둘은 비슷하면서도 반대되는 운명을 갖고 있는 듯도 하다.
사람들은 멀쩡함을 희구하면서도 흥미를 갖지 못하고 광기는 거부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은근한 매력을 느끼며 이야기한다.
이런 이중적이면서도 모순에 둘러싸인 개념 앞에 과연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찾아 나서지만 저자는 어쩌면 사람들의 반응에 깔린 이중성의 본모습 또한 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책은 제 1부 의심을 품다, 제 2부 문제 제기, 제 3부 이제 멀쩡하다 등으로 나눠 있다.
특히나 문제 제기에서 아이들의 본능이 야기하는 광기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섹스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은 흥미로웠다.
섹스라는 쾌락을 통해 사람들은 분명 자신의 본능과 거리가 먼 사회적 통념을 갖게 되지만 동시에 갈등의 고리만 깊어진다. 결국 멀쩡함에 대한 요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한 일환이며 그것이 멀쩡함이 갖고 있는 통념상의 한계인 것이다.
물론 이런 지적들은 책 전체의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부분들이 멀쩡함에 대한 허상을 지적하는데 좋은 본보기인 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멀쩡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어 끝끝내 다다른 곳에서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이 멀쩡한 자신이 되는 것임을 저자의 의견으로서 만나게 된다.
비로소 멀쩡함과 광기에서 해방되는 의미를 결과로 얻게 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저자의 안내에 따라 온 길을 나는 스스로 이어가야 한다.
그가 던진 질문을 부족한 소견이나마 끝없는 질문과 해답을 향해 더듬어 가야하는 일을 과제로 싸안는다. 책의 끝과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전진의 나팔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어렵고 복잡다단한 내용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좀 더 집중력 있게 파고들지 못해 아쉬움과 자책도 잊지 않으면서 다시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는 결심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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