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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 - 엔도 슈사쿠의 인생론, 향기 가득한 교양산문의 빛나는 경지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내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헛된 것이 없었으며,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p27 ‘고통은 나의 힘’ 중에서)
사랑의 제1원칙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마냥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라면 인생에는 굳이 ‘사랑’이 필요 없다. 인생이 고달프고 추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 대한 미화가 사라지고 정열이 퇴색해진 상태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상대방의 좋은 점만이 아니라 결점이나 싫은 점을 포함해서 진정한 모습을 확인하고도 그런 상대를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연애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라.
(p167 ‘사랑과 연애는 전혀 다르다’ 중에서 )
엔도 슈사쿠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우연히 <침묵>을 읽으면서다.
‘신’과 ‘인간’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뇌가 내게 전이되어 한동안 내 안에 작은 울림으로 남아 주체할 수 없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수필집 『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을 잡을 때까지 오랫동안 그를 기억 밑바닥으로 쓸어내려 구석에 담아 두어왔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의 감상을 떠올리기에 앞서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로 혹여 종교적 설교나 원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급급한 건 아닐지 미리 속단하는 우를 범한 것도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한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폭과 깊이를 담고 인생을 관조하는 자세에서 여타종교의 좋은 말씀들도 고이 마음에 새겨 삶을 도모하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지혜로운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스스로 실천하며 경험했던 인생의 희로애락을 통해 온전히 삶으로 아로새긴 명언들이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유쾌하게 살아가자는 행간의 주문도 읽힌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점은 인생에서 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 고통마저도 당시에는 불행을 떠올리지만 결국 커다란 교훈으로 인생을 풍성하게 한다는 작가의 고백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죄와 악을 정의하는 작가의 설명을 통해 이제껏 익숙하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엔도 슈사쿠의 시선도 함께 감지되었다.
특히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여자들의 논리’에서 여성들의 비약적인 논리를 ‘톡톡 튀는 팝콘 논리’ 같다며 꼬집으면서도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여자는 역시 멋진 존재다’ (p161)라는 표현으로 결론내리며 끝맺을 때에는 그의 여유 있는 유머가 돋보였다.
작가가 일생 중 육체의 아픈 시절을 경험해서 인지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해하면서 아픈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슴으로 담아내면서 따스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문장 하나하나에는 화려한 수사대신 담담하고 수수한 어투로 고집스럽지 않고 성실하게 삶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것이 엔도 슈사쿠의 인생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