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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혁명.
소련에 가족, 청년, 문화.
가족 내부에서 테오르미도르 반동.
10월혁명에는 여성들에 대한 자신들에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했다. 갓 탄생한 소련 정부에는 여성에게도 남성과도 동등한 모든 정치적·법적인 권리를 부여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유사 이래로 무슨 정부들이든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도 여성에게만큼은 모든 형태에 경제적·문화적 활동들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조치를 능력들로부터도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취했다. 그러나 매우 대담한 혁명에서도 "전능한" 영국의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임신, 출산, 육아 등에 부담들을 동등하게 남성이나 여성들에게도 쉽게 나누어 줄 수는 없겠다. 혁명에는 소위 "가정"이라는 곧 노동계급들에 여성들도 나서 죽을 때까지도 노예선이나 노예노동까지도 수행해야 하는 케케묵고 답답한 제도를 파괴하고자 영웅적으로도 노력했다. 계획들에 따른다면 일종에 폐쇄된 소기업들인 가정 대신에 산부인과, 병원, 요양소, 체육단체, 영화관 등에서도 완벽한 공공서비스 체제들로부터 가정에 역할들을 대신하게 됐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관들로부터 가족들에 가사를 완전하게 소화해서 모든 세대들을 연대와 상호부조들에 틀로부터 통일할 경우에는 여성이나 사랑하는 부부들에게는 천년이나 지속된 족쇄를 진정으로 벗어던질 수 있을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문제들 가운데에서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가족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았다. 사천만 소련 가정들에서는 절대다수로부터 중세적인 반동, 여성노예제와 히스테리, 아동들에 대한 일상적인 모욕, 여성이나 아동들에 대한 미신 등으로 자라나는 어두운 소굴들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슨 환상들마저도 쉽게 품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소련에 가족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에 연속적인 변천들은 소련 사회에 실제 현실이나 소련 지배층들에 진화과정에서도 매우 특징적으로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가족제도를 단번에 일소하는 건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저 의지마저도 부족했거나 가족들로부터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너무도 확고하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정부는 창설했던 탁아소, 유치원, 등으로부터 같은 기관들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던 시기를 잠시 경과한 후에는 노동여성들로부터 이후로는 좀 더 선진적인 농민들은 가사에 대한 사회화뿐만 아니라 아동들을 집단적으로도 돌보는 제도들로부터 한없는 장점들을 인정하게 됐다. 불행하게도 소련사회는 너무도 가난하고 문화수준마저도 낙후했던 걸로 판명됐다. 국가에 대한 실제자원들은 공산당들로부터 계획이나 의도들에는 제대로 부합하지도 못했다. 가족을 "철폐"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가족은 더 좋은 다른 형태로도 대체할 수도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에 실제적인 해방으로는 그저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상황에서는 실현할 수는 없었다. 이미 80년 전에 마르크스도 정식화했던 이 엄격한 진실들에는 경험으로부터도 곧 증명했을 뿐이었다. 상황들도 아주 어려운 몇 년 동안에는 곳곳에 노동자들,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 가족들은 공장들이나 다른 공공식당에서마저도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로부터도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삶으로부터 가는 이행기적 현상으로도 간주됐다. 혁명 이후에는 각기 다른 시기들 즉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제일차오개년계획시기들에 대한 특성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논의할 필요는 전혀 없을거다. 이후로는 식량배급표도 철폐된 1935년부터는 상황마저도 좋던 노동자들은 가정들에 식탁으로도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러한 후퇴현상들로부터는 단지 사회주의 체제들에 대한 부정이라고 간주한다면 크게 부정확할거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도 사회주의 체제는 시도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정작 정말로 사태를 비관적으로만 만든 건 관료집단들도 조직한 "공공식단"들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나 부인들도 가졌던 판단들 때문이었다. 리넨 천들도 세탁되는 양보다도 찢기고 도난당하던 양들도 참 많던 공공세탁소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들을 내려질 수 있을거다. 다시 가정으로도 돌아가자! 그러나 현재 웅변가들이나 언론인들에 의해서 후안무치하게도 찬양되고 있던 가정취사와 세탁들은 노동자들에 부인들에게도 다시 자신들에 그릇이나 냄비들로도 되돌아간다는 건 곧 옛날에 노예제도로도 차마 돌아간다는 걸 뜻한다. "소련식사회주의에서 완벽하고 돌아갈 수 없는 승리"마저도 선언했던 코뮌테른들에 결의문들은 공장지대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아주 설득력들을 가질 거라는 건 기대하기는 힘들지는 않겠는가! 농촌가정에서는 가내수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밀접한 관계들도 있기 때문에 도시들에 가정들보다는 한없이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몇 안 되는 일반적으로도 지극하게 빈곤한 농촌공동체에서는 혁명에 첫 몇 년 간 공공식당이나 탁아소를 도입했다. 처음 발표된 담화문들은 농촌에 집단화들로부터 가족제도들에 대한 결정적인 변활를 가져올 조치들을 시도할 거라고 선언했다. 농민들은 소유한 닭이나 소를 괜히 징발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소련 전역에서도 공공식당들에 당당한 진군들에 대한 담화문들로는 아주 많이도 발표됐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로부터도 후되는 시작됐을 때 현실들은 이 허풍스러운 말에 대한 그림자들로부터도 갑자기도 나타났었다. 일반적으로도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도 자기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빵이 가축들에게도 먹일 사료들만을 얻을 수 있었다. 육류, 유제품, 채소 등들은 거의 완전하게도 집단농장들 옆에서도 위치했던 개인소유에 텃밭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일단 우선 가장 중요했던 생필품들로부터도, 가족들에 고립된 노력들로부터도 획득했던 이상으로부터 공공식당들에 대한 말들은 더 이상 나오지는 못했었다. 따라서 개인소유들에 소규모 농장들에서는 개인가정들에 새로운 물질적 기반들을 제공함으로 여성들에게 이중들에 부담으로도 작용했다.
1932년에는 일상적으로 운영되던 탁아소수용인원들은 전체 육십만명들이었고 들판에서 일할 경우에만 아이를 맡는 계절적인 탁아소 수용인원들은 고작 사십만명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5년에 어린이용 침대에 수는 560만 개로 갑자기 급증해서 달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침대에 수는 전체 수에 아주 적은 비율에만 불과했었다. 더욱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 같은 대도시에서조차도 일반적인 탁아에 요구들에 대해서도 탁아소 서비스는 대체로 제대로 부응하지는 못했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는 거보다는 차라리 잣다고 느끼는 탁아소는 탁아소도 아닌 질도 나쁜 고아원에도 지나지 않는다"고 주요한 소련들에 신문들도 불평하고 있다. 상황들로부터 좀 더 좋은 노동자 가족들로부터 탁아소를 기피한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질 나쁜 고아원"도 그 수는 매우 적다. 아주 최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기아들이나 고아들에게도 개인가정에서도 양육되어야 한다는 결의문들을 채택했다. 매우 고위에 기관들로부터도 관료집단들은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적 기능들을 자신들로부터 수행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1930년부터 1935년에 오년 간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들에 수로는 37만 명에서 118만 일천 명으로도 늘어났다. 1930년 대에 수치는 너무 낮아서 두드러지는데 1935년에 수치는 소련에 가족 수에 비해서 대양에서 물 한 방울에도 지나지는 않아 보인다. 조금만 더 조사를 진행해보면 이러한 유치원들에 대다수나 심지어는 거의 모두가 행정부, 기술요원, 스타하노프 운동원 등에 자녀들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들을 밝혀내게 될거다.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얼마 전에도 "기아와 고아에 일소들에 대한 결의문마저도 제대로 실행에도 옮겨지고 있지는 않다."고 공개적으로도 증언하지는 않을 수 없었다. 이 냉정한 자백에는 과연 무슨 현실들도 숨겨져 있을까. 조그만 활자로 인쇄된 신문에 실린 발언들로부터 우연하게도 모스크바에서는 일천 명 이상에 대한 아동들은 "아주 어려운 가족상황 속에서도" 살고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수도에 고아원들에서는 대략 1,500명에 아동들도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서 거리로도 나앉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는 1935년 가을 2개월 동안 "아동들을 버린 죄로 7,500명에서 부모들도 재판장에 섰다." 이들을 재판정에 서게 한들 무슨 소용마저 있을까. 몇천 명에 부모들은 재판장을 얼마나 모면했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들 속에 놓인" 아동 중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로도 통계에도 잡혀지지는 않았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이나 그냥 어려운 상황에는 무슨 차이마저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해답마저도 찾지는 못하고 있겠다. 왜냐하면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공개되어 있던 집 없는 아이들에 대단하게 많은 숫자들로부터 과거에 가정들도 너무 빨리 해체되어서 새로운 제도들마저도 이걸로는 택도 없이 대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회적 위기들에 직접적인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신문들에 대한 발언들이나 형사사건들로부터도 독자들은 돈을 지불하는 남자들에 이해들로부터도 여성들은 극단적으로도 타락하는 현상인 매춘에 대한 존재를 소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가을ㄹ <이즈베스챠>는 독자들에게 모스크바에서 "무산계급 수도들에 대한 거리에서도 비밀리에 자신들에 몸을 파는 1,000명이나 되는 여성들도" 체포됐다고 보도했었다.
체포된 여성들 가운데에서는 177명에 노동자들, 92명에 점원들, 5명에 대학생들도 있었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던가. 불충분한 임금, 궁핍, "옷이나 신발들을 살 약간에 돈마저도 벌기 위한" 필요 등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학에 정도들을 대충이나마 알고자 하는 놀력들은 성과마저도 없을거다. 하급관료들도 마찬가지로 통계요원들에게 그저 침묵을 지키라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만 명령한다. 그러나 이렇게 강요된 침묵으로는 소련에 매춘부, "계급"에는 그 수도 많다는 걸 오류에 대한 여지없이도 증어할 뿐이다. 이들에 존재로는 "과거에 잔재"라는 주장들은 근본적으로도 말도 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젊은 세대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적어도 이성마저도 갖추고 있었다면 문명에 대한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사회악들에 대해서는 소련체제를 비난하지는 않을거다. 그러나 매춘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건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문들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도 있는 허가를 받는 한에서는 "매춘행위는 감소하고 있다"고 물론 주장하고 있다. 기아와 피폐에 해이던 1931년부터 1933년대 사이에 상황들로부터 비교해봐도 이 말은 진실하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도 화폐경제는 충분하게 회복되었거나 직접적인 배급제도는 철폐되었으므로 집 없는 아동들이나 매춘들은 불가피하게도 새롭게 증가할거다. 특권층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버림받은 자들도 존재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집 없는 아동들에 많은 수는 의심에 여지 없이도 여성에 어려운 상황들을 매우 오류 없는 비극적으로만 보여주는 증후들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프라우다>까지 가끔 쓰디쓴 자백들을 하지 않을 수조차도 없겠다.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들은 이들에 사회적 지위들에 대한 아주 심각한 위협을 주는 요인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정부는 늘 여성들에게도 낙태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었다. 거세된 남성들이나 노처녀들은 무엇이라고 하든 궁핍이나 가족에 대한 어려움들 속에서 낙태는 여성에 가장 중요한 시민적·정치적·문화적 권리들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들에 권리이던 낙태 역시나 현재와 같은 사회적 불평들에 체제에서는 특권으로도 변질되고 말았다. 낙태들에 관행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보로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우랄지방에 어느 한 지구에 있는 농촌병원 한 곳으로부터는 1935년에 "195명에 여성들은 산파들로부터 몸을 상했었다." 이 가운데에는 33명에 노동여성들, 28명에 사무직 노동자들, 65명에 집단노동 여성들, 58명에 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구는 낙태에 대한 정보로는 언론으로도 흘러들어 갔다는 건 대부분 다른 지구들과도 차이는 많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은 현재까지도 매일 소련전역에서도 산파들에 의해서 몸을 상하고 있을까.
필요한 의학적 도움이나 위생시설들을 갖춘 낙태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그들에게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마저 없음으로 밝혀지자 마자 국가는 방침들을 갑자기 바꾸어 놓고서는 낙태를 금지하는 쪽으로도 방침을 단독으로만 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상황에서도 필요를 강변하고 있다. 소련 대법원 판사 솔츠는 현재 결혼문제 전문가이다. 앞으로 시행될 낙태금지 정책들을 옹호하면서도 그는 실업자마저도 없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은 "엄마로 되는 기쁨"마저도 거부할 권리마저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건 경찰들에 권한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성직자들만에 철학들일 뿐이다. 바로 이전에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많은 여성들에게도 그리고 아마 절대다수에 여성들에게도 출산에 대한 "여성들에 사회적 지위들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련에 최고기관들로부터도 "고아와 기아들에 일소정책에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이 말들은 집 없는 아동들에 수는 새롭게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이 소련 대법원 판사는 "인생마저 행복한" 나라에서는 낙태는 감옥행으로만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건 그저 인생만 슬플 뿐 자본주의 국가들이나 똑같은 정책들일 뿐이다.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간수들에 손아귀에서 고생할 사람들은 주로 노동여성, 하인, 농민들에 부인 등인데 이들은 자신들에 어려움들마저도 숨기기란 참 힘들었다. 고급향수나 기타사치품들에 대한 수요들을 창출하는 고위층들로부터 "우리 여성들"은 관대한 법으로보는 바로 앞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한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한사코 모른 체하면서도 솔츠는 결론 내린다. "우리는 사람들도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아이들을 낳으시지요."라고 수백만 노동여성들은 이 고위판사양반들에게도 말할 수 있을거다. 이는 물론 관료집단들로부터도 이들에 입을 꼭 봉해서 완전하게도 침묵하도록 하지 않을 경우에만 아무래도 할 수 있을거다. 사회주의란 여성들에게도 낙태를 강요하던 원인을 제거하는 체제이지 모든 여성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정작 불한당 같은 경찰들을 동원해서 "엄마로 되는 기쁨"들을 강요하는 체제는 아니라는 사실들을 이들 높으신 양반들을 완전하게도 잊어먹은 거 같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 초안들이 소위 광범위한 대중에 논의를 위해서도 제출됐다. 그러나 소련 언론이라는 가는 체를 통과하기는 했더라도 강한 불만이나 억눌린 저항마저 터져나왔다. 그러자 토론들은 그걸 개시됐을 때만큼도 갑작스럽게 중단됐고 6월 27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들로부터도 치욕스러운 초안들도 세 배나 더 치욕스러운 법들로 전환되었다. 관료집단들에 낙태금지 변명자들도 일부는 낭패라는 빛을 보였다. 루이스 피셔는 이 법들로부터도 통탄할 정도에 오해는 존재하는 가운데 통과됐다고 선언했다. 고위관료들에 부인들을 제외한 여성들에 권리를 금지하는 이 새로운 법들은 실제로는 테르미도르 반동들로부터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루블화에 복권이나 함께 동시에도 가족과도 복권되었다. 얼마나 은총들은 가득한 우연들에 일치들이던가. 그런데도 이 복권들로부터도 국가에 물질적·문화적 파산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공개적으로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적 관계를 창출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거도 증명됐다. 우리들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은 이 목적들을 실현하는거"라고 말하는 대신에 소련에 지도자들은 깨어진 가족들에 외형들을 다시 아교로 이어붙이는 걸 강요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극심한 벌칙들에 위협을 동원해서도 가족들로부터 승리한 사회주의에 성스러운 중핵으로도 바라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로부터 가져온 사회적 후퇴를 눈으로 측정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입법자, 문학가, 법원과 민병대, 신문이나 학교교실 등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사물들로부터도, 새로운 정책 속으로도 끈에 묶인 채로 끌려 들어오고는 있다. 단순하고 정직한 어느 청년공산주의자들은 그에 신문에도 다음으로 같이 대담하게 글들을 실었다. "여성들은 가족들로부터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도에도 골몰하는 건 좋을거다." 그런데도 이 청년들은 곧 뺨을 두세 차례나 맞고 침묵들을 지킨다. 공산주의라는 기본적인 정책들은 "좌익적 노선들에 과도함"으로도 선언됐다. 문화적 소양마저도 없는 속물들에 어리석고 썩어빠진 편견들에 새로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소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끝없이도 광활한 나라들에 모든 구석구석들에는 무슨 일들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언론들은 오직 미세한 정도로만 가족 내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을 반영하고만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라는 고상한 열정으로는 죄악에 대한 증대와 함께 더 뜨거워진다. 따라서 십계명에 제7조 "간음하지말라"에는 관료지배층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련에 도덕론자들은 문구를 약간만 고치면 된다. 너무 빈번하고 쉽게 발생하는 이혼들을 반대하는 캠페인들이 지금도 시작되고는 있었다. 소련에 입법자들에 창조적인 사고로는 이혼을 신고할 때조차도 신고료를 받고 이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신고료를 인상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를 이미 발명했었다. 위에서 이미 가족들에 복권으로부터 루블화라는 교육적인 역할들에 대한 증대를 수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신고료 징수는 돈을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고를 하기를 어렵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건 당연하다. 상류층 인사들에게는 이 정도에 세금들도 하등에 어려움들도 초래하지는 않기를 우리는 더욱 희망한다. 더욱이 고급 아파트, 승용차, 기타 좋은 걸 많이 소유하고 계시는 고위인사들은 자신들에 신상을 필요로 없이도 알리지 않기 위해서 신고를 하지도 않는다. 매춘에 무겁고 모욕적인 성격에는 사회에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에만 가해진다. 소련사회에서 상류층에서는 권력에 대한 안락함으로도 결합되는데 여기서 매춘들은 소규모로 된 상호서비스라는 우아한 형태를 갖추거나 심지어는 "사회주의 가족"들에 측면들을 뒤집어쓴다. 지배층에 타락과정에서도 "승용차여자요인"들로부터 갖는 중요성들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부터, 소스노프스키로부터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정적이고 학자풍이던 서방에 대한 "소련에 친구들"은 무엇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눈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만 한다. 10월혁명으로부터는 확립된 혼인법이나 가족법들은 당당한 긍지들에 대상이었는데 이제 지배계급들에 국가들에 법률창고들로부터도 대대적인 차용들을 고쳐지거나 찢겼다. 경멸에 대한 눈빛을 보이면서도 배반이라는 도장들을 고의로도 찍기라도 하듯이 낙태와 이혼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자유를 옹호하고자 제출됐던 주장들 곧 "여성해방", "개성을 추구할 권리들에 대한 옹호", "모성보호" 등으로부터 이제는 이러한 자유들을 제한하고 완전하게 금지하고자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에 대한 후퇴는 구역질 나는 위선에 대한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필요라는 절칙들로부터 요구한는 거보다는 한없이 더 나아가고 있다. 이혼여성들에 대한 위자료 지급이나 같은 지배계급들에 법형식들로부터 회귀하는 현상들은 객관적인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관료지배층으로부터 지배계급들로부터 법들을 더욱 많이 도입해야만 하는 사회적 이해관계들로부터도 결부되고 있겠다. 현재로는 관료집단들로부터 가족들을 신성시하게 하는 매우 주요한 이유 이들로부터 사회관계에서 위계들을 안정적으로도, 정적으로도 확립해야할 필요성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위나 권력들을 지지하던 사천만 개에 기관들로부터 청년들을 현 체제로부터 요구하던 규율들로 그저 묶어버리기 위한 필요성으로도 작용해버렸다.
새로운 세대들에 교육들을 국가에 손으로만 집중하고자만 하는 희망들을 소려지배층들은 아직도 버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에서는 부모를 위시했던 "어른들"만에 권위를 지지하던 일에는 관심이나 흥미마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도 어린이들을 가족들로부터 분리하고자 하기 위해서 최선에 노력들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을 정체된 생활양식들에 대한 전통으로부터도 격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제일차오개년 계획들로부터 시행됐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나 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는 작은 어린이를 이용해서라도, 술주정뱅이 부친들이나 그저 종교를 가졌던 모친들을 폭로했고, 모욕줬고, 일반적으로도, "재교육"해놨다. 어쨌든 이 방법들로부터는 기존에 부모들에 권위를 뿌리째 흔들 수 있었다. 이 중요한 분야에서도 역시 급격한 정책전환들로부터도 일어났다. 십계명으로부터 제칠조로부터도, 함께, 제오조, "신들을 모욕하지는 말라"도 완전하게 권위마저도 회복해놨다. 그렇다고 신들을 부르는 단계까지도 도달한 건 아니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학교에서는 십계명, 제오조를 들먹이지도 않으면서도 학생들에게 보수성이나 판에 박힌 규율들을 주입할 수 있는 일에도 성공하고, 성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세대들에 권위들에 대한 관심이나 우려로는 벌써 이미 종교와 관련된 정책들에 대한 전환들을 가져왔었다. 하느님에 대한 존재, 그들에 대한 도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적들에 대한 부정들은, 혁명권력들로부터 아동이나 부모들 사이에 박은 가장 예리한 쐐기였었다. 그러나 문화들에 발전, 진지한 선전, 과학으로부터도 입각했던 교육들보다도 훨씬 앞서서 진행되던 종교에 대한 투쟁으로는 야고슬라브스키와 같은 인물들에 지도 아래에서도 종종 익살이나 장난기로도 타락했다. 이제 가족들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로도 하늘나라들에 대한 공격도 갑자기 멈추었다. 품위들에 대한 평판들을 신경쓰지는 않을 수 없는 관료집단들에서는 젊은 "무신론자들"에게도 종교들에 대한 싸움들을 멈추고 독서를 하고자 책상에도 앉기를 명령했다. 종교들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중립정책들로부터는 이제서야 확립됐다. 그러나 이건 아직 첫단계에 불과하다. 사건에 진전들로부터 관료집단들로부터는 좌지우지 된다면 두번째 단계들이나, 세번째 단계를 예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도 않겠다. 지배층들에 견해로부터 드러내는 위선들은 모든 곳에서도 그리고 언제나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도 확대판으로도 발전해왔다. 이건 대체로는 사싱이라는 역사적 법칙들이다. 사회주의들로부터 이름들에 값하려면 탐욕들로부터도 개입되지도 않던 인간관계, 시기와 술책들도 없는 우정들, 저속한 계산들도 없는 사랑들로부터도 실현되어야만 한다. 소련들에 공식적인 사상으로는 이러한 이상적인 규버들로부터 이미 벌써 실현됐다고 선언하고나 앉아있다. 이를테면 1936년 4월에 채택된 공산주의 청년동맹들에 새로운 강령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진정한 평등에 기반해서도 새로운 가족들도 등장했다. 이 새로운 가족들을 번성하게한다는 건 소련정부들에 관심사들이다." 이 강령들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으로는 강령들을 보완하고 있다: "우리 청년들은 평생 친구들인 아내들이나 남편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사랑이라는 오직 하나에 동기와 충동만을 가지고 있다. 금전적인 편의로부터 개입된 지배계급들에 대한 결혼으로는 성장하는 세대들에게는 앞으로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프라우다> 1936년 4월 4일. 일반적인 노동자들에게도 관계되는 한에서는 이건 어느 정도로도 사실들이다. 그러나 "돈들을 위한 결혼"으로는 자본주의 세계들에서도 노동자들에게도 비교적 대부분에서는 거의 알려진 바는 있지도 않겠다. 그러나 소련에 중산층들이나 상류층들로 가면 상황들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계층들은 자동적으로도 인간관계들에서도 자신들에 특성들을 반영해낸다. 권력이나 돈들로부터 이성적인 관계들에 미치는 악행들은 소련관료집단들 내에서도 아주 흔하게도 퍼지고 있겠다. 마치 이들은 이에 대해서는 서방에 지배계급들을 능가하겠다는 목적을 벌써 정한거 같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금까지도 인용된 <프라우다>에 기사내용들과는 정반대로도 "정략결혼"에는 소련언론들로부터 우연하게는 도는 피할 수 없이도 정직함들을 드러낼 때 비로소 자백하듯이, 이제는 완전하게도 부활했다. 자격요건, 임금, 고용, 계급 등들에서도 점점 더 커다란 의미마저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는 신발, 모피외투, 아파트, 욕실, 그리고, 최종적인 꿈들인 승용차구입 등에 대한 문제들로도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단칸방들을 구하고자 하는 투쟁들은 매년 모스크바에서도 적지 않은 수로도 부부들을 결합하고 있고 헤어지게들 만든다. 그리고 친척관계들에서도 결혼에 있어서도 예외적인 중요성들을 획득했다. 군사령관이나 영향력 있던 공산주의자 장인들을 두거나 높은관리들에 대한 여동생 장모를 둔다는 건 출세나 안락한 생활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마저도 없을거다. 이와는 다른 상황들에서도 도대체 소련에서는 어떻게 할 수나 있겠는가. 소련들에 대한 두꺼운 단행본들에 대한 가장 극적인 장들 중에 하나로는 소련가정에 대한 해체와 붕괴들에 대한 이야기일거다. 남편들은 당원들, 노동조합간부들, 군사령관들, 행정가들을, 역임하면서도 새로운 취향들을 개발해낸다. 그러나 부인들은 가족이라는 굴레에만 묶여서 과거에 수준들에만 여전하게 머물려 있겠다. 소련이라는 관료집단들에 두 세대로부터 걸어온 길들에는 부인들도 남편들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뒤처진 비극으로도 가득하다. 같은 현상들은 이제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나타난다. 가장 커다란 잔학행위는 아마 관료집단 상층부들에서도 볼 수 있을거다. 이들 중에 많은 비율로는 교양마저도 거의 없는 벼락출세파들이고 모든 건 자신들에게만 열려 있다고 그저 생각만한다. 언젠가 고문서 보관서에도 비치된 비밀문서나 회고록도 공개되면서부터 이들에 부인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한 추악한 범죄들도 드러날거다. 가족들에 도덕이나 강제적 "모성에 대한 기쁨"을 복음주의자처럼 외치던 이들은 여성들이나 가족들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높은 지위들로 인해서 기소마저 되지도 않는다. 아니다, 소련여성들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겠다. 법 앞에서도 완전한 평등으로는 노동자 여성들이나 농촌여성들보다도 상류층여성, 기술·관료·교육 등 일반적으로도 지식분야를 대표하는 여성 등에게는 한없이도 많은 특궐들을 부여해왔다. 사회는 가족들에 물질적 걱정들을 직접 해결하지도 못하는 이상 주부는 흰옷을 입은 노예 곧 보모, 하인, 요리사 등들을 부릴 수 있을 때에만 자신들에 사회적인 기능들을 성공적으로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사천만 가구들 중에서는 5퍼센트나 또는 10퍼센트만이 가정노예에 대한 노동들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만 의존한다. 소련에 존재하는 하인들에 대한 정확한 인구조사 통계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소련에 대한 법률체계만큼이나 소련여성들에 지위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평가에도 중요할거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소련에 통계로는 "노동여성" 또는 "기타다른사람들"이란 이름 아래에서 하인들에 존재를 숨긴다.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에 부인들은 요리사를 구비하고 상점에다 주문할 수 있는 전화를 구비하고 있으며, 심부름을 보낼 승용차 등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상점으로 뛰어가야만 하고, 저녁들을 준비해야만 하고, 유치원이 있을 경우에는, 거기까지도 걸어가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 노동여성과도 공통점은 거의 없겠다. 사회주의라는 명찰들은 이 사회적 격차를 은폐하게 할 수는 도무지도 없겠다. 이 격차는 서방에 지배계급들에 여성들이나 노동자 여성들 간에 격차만큼이나 매우 크다.
참기도 참으로 어렵고, 모욕적이기만 한 가정생활에 대한 어려움들은 사회전체에 노력들에 의해서도, 제거된 진정한 사회주의 가족으로는 무슨 강제적 통제도 요구하지는 않을거다. 그리고 이러한 비로소 자유로운 가정들 내에서는 낙태와 이혼에 대한 법률들을 생각하는 거 자체만으로 하더라도 매춘굴이나 인간제물사원들을 생각하는거만큼이나 아마도 끔찍하게나 느껴질거다.
10월혁명들에 대한 법률들은 이러한 가족들을 창조하기 위한 대담한 첫발들을 내딛었다. 그러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으로 잔악한 반동들마저 초래해왔다. 테르미도르 반동들에 대한 법률들은 심지어는 이제 지배계급들이라는 법 모델로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이 후퇴는 "새로운" 가족들에 성스러움들에 대한 거짓 연설들로 가려져 있겠다. 이 문제들에서도 사회주의 건설들에 실패잗르인 소련지배층들은 위선적인 품위들로도 자신들을 위장하고 있겠다.
특히 아동문제들에 대한 높은 원칙들이나 추악한 현실들에 사이에서도 격차들로부터 충격들을 받은 진지한 관찰자들도 있겠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채택된 가혹한 형법적인 조치들은 여성이나 아동들을 옹호하는 사회주의 법률들을 조야한 위선으로 밖에는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들을 암시하기로는 더욱 더 충분해진다. 법률들이나 행정기구들에 형태로도 거짓 치장한 사상들에 대한 광범위함이나 관대함들로부터 속아버린 정반대 종류들에 대한 관찰자들도 있겠다. 궁핍한 주부, 창녀, 집 없는 아동들을 보면서도 이들 낙관주의자들은 물질적 부는 좀 더 증대하면서도 사회주의 법류들에 피와 살들을 붙게 될 거라고 스스로 말한다. 위에 두 가지 접근방식들 중 어느거도, 무엇도, 좀 더 오류들이고, 해로운지를 판단한다는 건 쉽지도 않겠다. 역사 맹인증들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적 계획들에 대한 광범위함이나 대답함, 이 계획들에 대한 실행초기단계들로부터 중요성, 그리고 이로부터 열린 엄청난 규모들에 가능성들 등을 심지어는 보지도 못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소련에서도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증대로는 눈을 감고 그저 미래를 바라보기만하면서 정작 관료집단들에게만 존경스럽게도 미래에 열쇠를 맡기는 부류들도 있겠다. 이들은 불평등한 현실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그저 위안하면서도, 그저 수동적이고, 그저 기본적으로도, 그저 무관심한, 그저 낙관론자들에 불과해진다. 이들에 대해서 분노마저도 느끼지도 않는다면 도무지도, 도대체, 이상한 일이기만 할거다. 여성들이나 남성들에 권리평등들은 관료집단들로부터 권리박탈들에 평등으로도 전화되지 않듯이, 이들은 생각마저 하고 있겠다. 무슨 성서에 지혜서에서 소련에 관료집단들은 자유를 대신해서도 새로운 억압들을 도입하지는 않을거라는 확실하게 약속되어 있듯이도, 이들은 또 생각하고 있겠다.
과연 남성들은 여성들을 어떻게 그저 노예로 만들어왔는가, 착취자와 이 양자를 어떻게 모두 지배해왔는가, 노동인민들은 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노에상태들에서 자신들을 해방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떻게 해서 하나에 쇠사슬들은 그저 다른 쇠사슬들로만 바뀌었을 뿐인가. 역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거에 대해서는 정말로 많은 애기를 들려주고, 해준다. 이건 역사들로부터 우리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전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에서는 아동, 여성, 인간들은 과연 스스로를 해방할텐가. 이 문제를 해결할 믿을만한 모델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모든 부정적이고, 부정된 역사적인 경험들은 대중들로부터도 통제되지도, 통제하지도 않던, 억압체제들에 수호자들이나 모든 특권층들에 대해서는 노동인민들은 그저 결코 지워지지도 않는 불신으로만 무장하기를 간곡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또한 요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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