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무산계급들에 사활로 걸린 문제들.



러시아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사슬에서도 가장 약한 고리였다. 극단적 후진성 때문이었다. 지금에 위기에서도 독일 자본주의는 정반대 이유로, 곧 곤경에 처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가장 약한 고리임이 드러나고 있다. 독일의 생산력이 점점 더 발전하고 그 역동성이 높아질수록, 독일에서 생산력은 유럽에 국가체계 속에서도, 질식사하고 있다. 그 체계는 가난한 지방동물원들에 있는 축사들에 체계와도 비슷하다. 사건에 대한 국면에서 바뀔 때마다 독일 자본주의는 과거에도 전쟁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바로 그런 문제들에도 부딪쳤다. 호엔촐레른 정부 시절에는 독일 지배계급으로는 '유럽에 판을 짤'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브뤼닝·쿠르티우스 시절에는 기껏해야 오스트리아에 관세동맹들을 체결하려고만 했다. 독일 지배계급들에 문제·잠재력·전망들로는 그렇게 한심한 수준으로까지도 떨어졌다는거다. 그러나 그 관세동맹조차도 실패했었다. 동화에 나오는 마녀에 집처럼 유럽에 전체 국가체계는 암탉에 두 다리 위로 세워져있었다. 몇백만 명에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로부터 단결하게되면, 위대하고, 건강한, 프랑스 패권마저도 붕괴할 위험조차도 있다. 



유럽 전체, 특히나 독일은 자본주의 길로 가면 결코 전진할 수조차도 없다. 현재에 위기로는 노동자들에 시체들 위에서도 자본주의에 힘들은 저절로 상호작용해서 일시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는 온갖 모순들로부터 훨씬 첨예하고 집중적인 형태로 되살아나는 일들을 결코 피할 수조차도 없을거다. 세계경제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들은 줄어들 수밖에는 없다. 이미 유럽에 이마에는 도스안, 영안, 미국 대통령·후버에 독일 전쟁배상금 지급정지 같은 미국에 딱지들로부터 들러붙어서는 결코 떨어지지도 않고 있다. 유럽은 철저하게도 미국에 배급식량들에만 의조하는 처지다. 자본주의에 쇠퇴로는 사회적·문화적 해체를 낳고 있다. 그래서 정상적 계급분화들에 대한 길들은 막혀 있었고, 중간계급들은 감소하면서도 무산계급들로부터 증가하는 과정들도 중단돼 있었다. 위기는 길어질수록 새로운지배계급들에게는 빈곤해지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은 한심한 룸펜무산계급들로 전락할거다. 바로 이런 위협들은 매우 첨예한 형태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에 목을 먼저 조르고 있다.



부패하고 있는 자본주의 유럽에서 가장 썩어빠진 부분들은 사민당관료집단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적 여정들을 시작했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깃발을 분명 들고 있었다. 당시로는 그들에 목표는 지배계급들에 대한 지배를 전복하는거였다. 그러나 보라 강력하게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그들을 사로잡고 개같이 질질 끌고 다녔다.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에서도 그들은 혁명들을배신했었다. 처음에는 행동으로 그랬었고, 나중에는 말로도 그랬었다. 카우츠키는 오랫동안 혁명이라는 말들을 옹호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에 개혁주의를 부속물쯤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대로 베른슈타인은 혁명포기를 요구했었다. 자본주의에는 위기마저도 없었고, 전쟁마저도 없는 평화적 발전들에 대한 시대로만 접어들었다는 이유에서였었다. 정말 대단한 예언이었다. 언뜻 보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사이에서는 해소할 수 조차도 없는 차이는 있는듯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혁주의라는 외쪽 신발이나 오른쪽 신발이라는 완벽한 대칭적인 보완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전쟁은 결국 터지고야말았다. 사민당은 미래에 대한 번영이라는 이름으로도 전쟁들을 지지해왔고, 그러나 번영만이 아니라 쇠퇴는 벌써 시작됐었다. 이제 사민당에 과제는 자본주의 결함에서도 혁명에 대한 필요성들을 추론하는거에도, 개혁들을 이용해서라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희생해서라도 지배계급들에게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건 새로운 과제였다. 그러나 이조차도 변질에 마지막 단계는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뒤흔들고 있는 현재에 위기 때문에도 사민당은 오랜 경제·정치적인 투쟁 끝에 얻은 성과들을 희생하게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현재 독일 노동자들은 그들에 아버지·할어버지·증조할아버지 대에 생활수준으로까지 후퇴하게 됐다. 개혁주의는 스스로 쟁취한 성과와 희망으로부터 모두 파괴된 잔해더미 한복판에서만 악취를 풍기고,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동시에 역겨운 역사적인 광경들도 없다. 그 극장은 현대극을 공연하고자 광분하고 있다. 그러한 극장에서도 하웁트만에 <직조공>, 곧 현대극 중에서도 매우 현대적인 이 작품을 더 자주 공연하게 해야만한다. 그리고 극장감독들에게는 관중석 맨 앞줄을 사민당 지도자들을 위해 따로 남겨두는 건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지도자들조차도 연극을 볼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 적응능력들은 한심하고 극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독일 노동계급들에게는 생활수준 하락들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되는 한계들도 있었다. 지배계급 체제는 곧 스스로 생존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서 그 한계를 인정할 기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브뤼닝에 긴급명령으로는 형세파악들을 위한 촉수들일 뿐이고, 시작들일 뿐이다. 브뤼닝 정권으로는 사민당 관료들에 비걱합고, 믿을 수 없는 지지에 그저 의존하고 있고, 또한 사민당 관료들은 무산계급들에 대한 일부에 성의 없고 시무룩한 지지들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료적 법령들에 기반을 둔 체제는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고, 일시적이다. 자본주의에는 더 결정적인 다른 정책들도 필요해진다. 자기네 노동자들을 의심하며서 지켜보는 사민당들에 지지로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도 불충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귀찮은 거마저도 돼 버렸다. 어중간한 정책들에 시대는 지나갔다. 탈출구를 찾으려면 지배계급이라는 노동자 조직들로부터 가하는 압력에서도 무조건 벗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노동자조직들을 제거하고, 파괴하고, 완전하게 분쇄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파시즘에 역사적 구실들은 시작된다. 파시즘은 무산계급들에 바로 위에 있는 계급들, 그래서 무산계급 대열로 전락하는 걸 늘 두려워하는 계급들로부터 늘 들고일어나게 만든다. 파시즘은 공식정부들에 비호를 받으면서도 금융자본에 돈으로도 그들을 조직하고 무장하게만든다. 그들을 이끌고 무산계급들에 조직들을 혁명적인 조직이든, 보수적인 조직이든, 가리지도 않고 박멸하려만 한다. 파시즘은 보복, 무자비한 폭력, 경찰테러에 체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지배계급 사회 내에서도 무산계급들에 민주주의 요소들을 모두 뿌리채로 뽑은 바탕 위에서 수립된 매우 독특한 지배체제다. 파시즘에 임무로는 우선 공산주의에 대한 전위를 파괴하는데만이 있다는데 있는게 아니다. 노동계급 전체를 강제로 원자화하는거도 있겠다. 이 목적들을 이루고자 한려면 우선 매우 혁명적인 노동자 집단들을 전멸하게하는 거만으로는 택도 부족하다. 독립적이고, 자발적이던 조직들도 죄다 분쇄해야만 하고, 무산계급들에 방어요새들도 모두 파괴해야만 하고, 사민당이나 노동조합들을 지난 75년 동안이나 이룩한 성과들마저도 완전하게 뿌리 뽑아야만 한다. 따지고보면, 공산당에서도 바로 이러한 성과들에 기반들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당은 파시즘에 승리에도 필요한 조건들을 모두 준비해줬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서 사민당 자신들에 정치적인 청산들을 위한 단계도 준비해왔다. 브뤼닝에 긴급명령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한 야만행위라는 위험으로부터도 임박해서도 모두 사민당에 책임이라는 말로는 절대로 옳다. 그렇다고 해서 사민당이나 파시즘으로부터 그저 똑같다는 말은 완전하게도 허튼소리다. 



1848년 혁명기에는 자유주의 지배계급들에 정책들은 반혁명이라는 승리를 위한 무대를 준비해왔고, 이 반혁명에 대한 승리로부터도 자유주의는 무력해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살만큼이나 날카롭게 독일에 자유주의 지배계급들을 비판했었고, 그 비판에 내용은 라살보다도 더 심오했었다. 그러나 라살 지지자들은 자유주의 지배계급들이나 봉건적 반혁명 세력들을 '반동적 한통속'이라고 싸잡아 비난했을 때조차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잘못된 초급진주의에 격분한 건 매우 옳았었다. 라살 지지자들에게는 이런 잘못된 태도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왕정들을 도와주는 구실들을 여러 차례 해왔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활동들로는 대체로 진보적인 성격들도 있었고, 그래서 자유주의에 대한 성과들보다 한없이도 더 중요하고 영향력도 더 컸지만 말이다. 사회파시즘론으로는 라살 지지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오류를 새로운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되풀이하는거다. 스탈린주의 각료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파시스트 한통속'이라고 치부하고 나서는, 히틀러에 프로이센 주민투표를 지지하는 따위에 할도응로도 앞뒤로 보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이건 라살이나 비스마르크에게도 동맹보다도 나은 건 전혀 없었다. 



현재 국면으로는 독일 공산당들은 사민당에도 맞서 투쟁할 때는 다음으로 같이 서로 다른 두 사실들에만 의지해야만 한다. 첫째로, 파시즘을 강화하게 만든 정치적 책임으로는 무조건 사민당들에게 있다. 둘째로, 사민당 자체로 의존하고 있는 노동자조직들이나 파시즘은 절대로 양립할 수조차도 없다. 현재에 독일 자본주의라는 내부모순으로는 폭발들을 피할 수 없을만큼 긴장상태는 극에 달해왔었다. 사민당도 적응능력들은 한계에 달해서 자멸할 지경들에 이르렀다. 결국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는 오류들도 한계에 달해서 재앙을 맞게됐다. 독일정세에 특징으로는 이 세공식들로부터도 표현할 수 있겠다. 현재에 모든 건 면도날 위로 놓여있듯이, 첨예한 위기상황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하는 신문들로부터도 독일 상황들을 추적할 수밖에는 없었고, 내 원고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를린까지도 가는데 또 일주일도 걸리고, 그 원고는 소책자들로 출판될 때까지도 몇 주마저 더 걸린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는 본의 하는게 '모든 건 너무 늦는게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되고, 그때마다 다음으로 같이 말해본다. 아니다.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군대들은 어마무시하게도 커서, 문제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해결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 무산계급들에 힘으로는 아직까지도 소진되지도, 될 수조차도 없었다. 그들에 능력들은 아직까지도 발휘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에 논리는 날로 갈수록 더 확연하게 드러날거다. 따라서 해야 할 말들을 덧붙이려는 내 노력으로는 설사로, 몇 주, 곧 한 역사에 한 시기쯤 늦어지더라도 정당하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나를 프린키포섬에도 가둬두면 자신들로부터도 일들을 더 조용하게는 끝마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들은 사민당에 헤르만 뮐로로부터도 이끄는 정부한테서 '멘셰비크'에게는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는 약속마저도 받아냈었다. 이 경우로는 공동전선들로부터 구축되는데 동요나 지체마저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소련에 공식출판물에서도 스탈린주의 관료들이나 퍼뜨리는 뉴스로는 내가 사민당들로부터 맺은 협정들에 따라서 브뤼닝 정부를 '방어하고' 그 대가로 사민당은 내 독일입국마저도 허용되도록 영향력들을 행사하고 있다는거다. 나는 그런 악랄한 중상모략들에 분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어리석음들을 비웃을 뿐이다. 그러나 계속 웃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 시간조차도 별로 없고, 남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태전개로는 우리들에 입장들로부터 옳았음을 입증해 준다는 거라는 점은 추호도 의심할 수 조차도 없겠다. 그러나 역사는 무슨 식으로 과연 우리들에 올바름을 입증해 줄 건가. 스탈린주의 분파들에 재앙들로부터, 아니면 마르크스주의 정책들에 승리로부터. 



현재들에 모든 문제에 핵심으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건 독일 국민들에 운명마저도 거린 문제지만, 단지 독일 국민들에 운명만이 걸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책자에서 분석하고 있는 문제들은 어제오늘 생겨난 건 절대로 아니다. 현재까지도 9년 동안이나 코민테른 지도부로부터 열심히 한 일로는 이른바 '총노선'들에 따른 온갖 전술적 소동들로부터도 혁명적 가치들을 쓸모없는 걸로 만들었고, 국제적인 무산계급들에 대한 전위를 혼란에 빠뜨리는거였었다. 소련에서는 좌익반대파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로부터 결성될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소련에 국내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문제 때문이기도 했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에 혁명적 상황들에 대한 문제들은 결코 하찮은 거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견해 차이로는 1923년까지도 올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나는 이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러차례까지 이야기해왔다. 내가 쓴 비판적 저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독일에서 출판됐다. 이 소책자는 결국 좌익반대파들에 이론적·정치적 활동들에도 기여해왔었다. 이 소책자에서도 그저 지나가듯이 언급한 많은 문제들은 내가 전에도 이미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들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들은 내가 쓴 <레닌 이후에 제3인터내셔널>, <연속혁명> 등을 꼭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이런 견해들에 차이에 기원들을 훨씬 더 분명하고, 철저하게, 평가하려면, 그걸 또한 중대한 역사적인 문제들로부터도 다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지한 혁명가들, 참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그런 탐구로는 절대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절충주의자들은 사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겨난 단편적·즉흥적 생각들로만 살아간다. 그러나 무산계급들에 혁명들을 끊임없이도 지도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자 간부들에로는 문제나 논쟁들로부터 끊임없이도 계속 연구함으로부터만 훈련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들. 



만약 이론 문제들을 대하는 빅토르 세르주의 태도가 진지하다면, 자신이 이론에 '혁신가'로 주목받게 되는 것에는 쑥쓰러워하고, 지난 세기에 칸트철학들을 마르크스주의에 접목하려 한,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에 계급투쟁을 초월한다는 원리들에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종속하려 한 베르슈타인이나 스트루베, 그 밖에 모든 수정주의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후퇴하게하는 건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칸트 자신도 그러했듯이, 그들은 의무감만을 지닌 '정언명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보편타당한 절대적 윤리 규범으로만 묘사했다. 사실 그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의무'에 문제다. 베른슈타인, 스트루베, 카를 포어렌더는 그들 나름대로 이론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사뭇 지지했었다. 그들은 칸트로 돌아가기를 공개적으로 요구했었다. 빅토르 세르주와 그에 동료들은 과학적 사상들에 대한 책임마저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인유와 암시, 기껏해야 문학적 일반화를 하는데만 그친다. 그러나 그들에 사상을 바닥까지 파헤쳐보면, 그들은 오래전부터도 불신당한 낡은 운동들에도 가담했다는 건 드러난다. 그 운동에는 칸트철학으로도 마르크스주의를 진압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지배계급들에 이해관계를 철학적으로도 일반화했을 뿐인 '절대적인' 규범들로만 사회주의 혁명들을 마비하게해왔었다. 그 규범들은 분명하게 오늘날에도 지배계급들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 자유무역들이나 민주주의 시대에 지배계급들로부터도 일반화된거다. 제국주의적 지배계급들로는 그 규범들을 그들에 선조 자유주의자들보다도 훨씬 덜 지킨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지배계급들로는 혁명적 무산계급들에 대열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교란하고, 동요하게하려는, 새로운지배계급들에 설교자들에 노력들을 호의적으로만 바라보게만 된다. 히틀러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나 민주주의자들에 주된 목적들도 볼셰비키라는 역사적 정당성들로부터도, 대중들에게도, 완전하게 분명해지려고 하던 때에는 볼셰비키주의로부터 불신에 대상으로 만든다는거다. 볼셰비키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바로 그건 적들인거다. 민주주의적 도덕들에 주창자인 '형제' 빅토르 바슈마저도, 그에 '형제'던 레몽 로젠마르크에 도움을 받아서 모스크바 재판을 그저 옹호했으면서도 위조죄를 저질렀을 때조차도, 바슈의 비윤리성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는 자신들에 거짓말들로부터 유죄판결을 받게 되자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편파적이라는 말이던가. 나는 항상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공포정치를 비난했다." 


- 오, 그들은 자신들에 하는 일조차도 모르나이다!   


바슈는 민주주의적 도덕주의자들에 내면들에 있던 주요한 동기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줬다. 곧, 그들 가운데 일부로는 모스크바 재판들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 있게됐고, 다른 일부는 비판할 수도 있었고, 또 다른 일부는 옹호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 공통적인 관심사들로는 모스크바 재판들을 이용해서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윤리', 곧 무산계급들이라는 혁명이라는 방식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던거다. 이 분야에서도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다. 


- 세상에나! 


앞서 인용했던 가증스러운 소개글들에도 불구하고, 내게도 발전할 수 있었던 윤리관들에 "토대"는 "레닌"이라고 분명하게 썼다. 왜냐하면 다른 출판물에서도 반복된 이 애매한 문구는 나도 레닌에 이론적 원칙들을 발전하게하고 있따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레닌은 윤리를 다룬 글들은 절대로 쓰지는 않았다. 빅토르 세르주는 사실 뭔가 전혀 다른 말들을 하고 싶었을거다. 곧, 내 비윤리적인 사상에는 "도덕관념마저도 없는 사람"이라는 레닌에 실천들을 일반화한 거라고 말이다. 세르주는 내 판단들을 이용해서 레닌에 인간성마저도 의심스럽게 만들었고, 레닌에 인간성들을 이용해서 내 판단들마저도 의심스럽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널리 퍼진 반동적 경향들, 곧 볼셰비키주의라는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공격하려는 경향들에도 그저 아첨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첨꾼 수바린.


옜 평화주의자, 옛 공산주의자, 옛 트로츠키주의자, 옛 민주적 공산주의자, 옛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도 자신들에 과거와 대부분은 거의 완전하게 단절한 수바린은 자신들에게 원하는게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를수록 훨씬 더 뻔뻔스럽게도 무산계급 혁명들이나 혁명가들을 그저 공격해왔다. 

이자는 인용문, 문서, 쉼표, 인용부호를 어떻게 모으는지도, 서류를 어떻게 편집하는지를 알고도, 그런 일들을 좋아한다. 게다가 그는 펜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안다. 원래 그는 평생을 이런 일들에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머지않아서 그는 생각하는 능력들도 필요하다는 사실들을 깨달을 수밖에도 없었다. 스탈린을 다룬 그에 책들에는 비록 흥미로운 인용문들이나 사실들을 많이 담고 있었지만, 수바린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여실하게도 보여준다. 그는 혁명이 뭔지조차도 몰랐고, 반혁명도 뭔지를 모른다. 그는 죄 많은 인간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분개하면서도 초라하게도 합리화하는 기준들을 역사적 과정들에도 적용해왔다. 그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들이나 창조적이던 무능들 사이에서도 불균형들은 마치 염산처럼 그를 부식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도 분노했고, 사상·사람·사건들을 평가할 때도 아주 기본적인 정직성들 마저도 없는 반면에, 그 모든 걸 메마른 윤리적 휸계들로 덮어버렸다. 사람들을 싫어했고, 매사에 부정적이기만 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수바린마저도 기질적으로 반동 쪽으로도만 이끌려왔었다. 과연 수바린은 공개적으로도 마르크스주의와도 결별했는가. 


- 얼마나 많고 많은, 혹독한 비판들을 말년에 레닌에게도 가했으면.. 


우리는 결코 그러한 얘기를 마저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얼버무리기를 좋아한다. 

그건 그에게도 타고난 성질들읻. 내 소책자를 서평하면서도 그는 다음으로 같이 썼었다. "트로츠키는 다시 한 번 계급투쟁들이라는 그에 회전목말에만 올라탄다." 어제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계급투쟁들은 그저 "트로츠키에 회전목마들"일 뿐이다. 수바린 자신에게는 영원한 윤리라는 죽은 개에 걸터앉기를 좋아한다는 건 놀라운 일마저도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들에 반대해서, 그는 "게급구분으로도 그저 무고나한 정의감" 따위만을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바탕에 "정의감" 따위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쨌든 위안만 된다. 다가오는 전쟁에서는 수바린은 거의 틀림없이 자신으로부터 발견한 사실들을 참호 속 병사들에게도 자세하게는 설명할거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지난 전쟁에서 수행했던 불구자들, 실업자들, 버려진 아이들, 성매매 여성들에게도 그럴 수 있다. 그러다가 그는 얻어맞는다면 우리 자신들에 "정의감" 따위로는 그를 편들지는 않을 거라는 걸 미리 밝혀는 둔다. "계급구분마저도 무관한" 지배계급적인 정의를 옹호하는 이 파렴치한 자들에 비판적인 언급들에는 모두 빅토르 세르주한테서 얻은 영감들로부터 그 소개글에 바탕을 둔다. 그리고 세르주 자신은 정작 '이론'을 추구할 때마저도 수바린한테서 빌려온 잡동사니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래도 수바린은 세르주도 아직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걸 과감하게는 말했다는 장점으로는 있었기 때문이다. 



수바린은 거짓 분노로, 그에게 진정한 건 무엇도 없기를 터뜨리면도 다음으로 같이 썼었다. 트로츠키는 민주주의에다, 개혁주의자, 스탈린주의자, 아나키스트들에 윤리를 비난하고 있으므로, 그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트로츠키에 정당"만이 윤리에 유일한 대변자이고 이 정당들은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윤리에 화신은 트로츠키 자신이라는거다. 이 말을 듣고 어찌해서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아하니 수바린은 존재하는 거와 존재하지 않는 걸 자신으로부터 오직 구분할 수 있다고만 믿는 듯하다. 그건 스크램블드에그나 멜빵바지들에 문제라면 매우 간단할거다. 

그러나 역사적인 과정들에 차원에서도 그런 구분들은 분명하게도 수바린에 머리로는 정작 감다할 수조차도 없겠다. "존재한다는 건" 생겨나고 있거나, 아니면 죽어가고 있거나, 발전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저 분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거와 내적경향들을 이해하는 사람들 뿐이기 때문이고. 



지난 전쟁으로 터졌을 때조차도 혁명적인 태도를 취한 사람들에 수로는 그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정치에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건 다양한 색조들에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일부인 국수주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레닌들은 무기력하고 고립된 개인들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그들에 윤리나 '신성한 연합'들에 야만적인 윤리들보다도 고상했다는 건 조금이라도 의심해볼 수나 있었을까. 리프크네히트에 혁명적인 정치는 결코 '개인주의적'이지도 않았다. 당시에 보통에 애국적인 속물들에게는 그렇게 보였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리프크네히트는, 아니 리프크네히트만이 대중들에 밑바닥 정서를 반영했고 그 징후를 보여줬다. 


- 트로츠키는 '리프크네히트'를 직접 언급했었다. 


그 뒤에 사태경과를 보면 이 점을 완전하게 확신할 수 있겠다. 내일에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권리를 얻고자 오늘 공식여론들이나 완전하게 결별한다는 건 두려워하지도 않는 태도, 이건 인습을 고수하던 새로운지배계급들에 경험적인 존재들이나 다른 독특한 존재들에 대한 방식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정당들, 모든 도덕주의자들, 모든 아첨꾼들은 임박한 재앙들에 잔해 아래로도 사라져버릴거다. 오직 세계사회주의혁명을 옹호하던 정당들은만이 살아남을거다.

물론 앞을 못 본 채 그저 합리화하기에 급급한 자들에게는 지금까지도 그 정당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 보일거다. 왜냐하면 그들ㄹ에게는 지난 전쟁 때조차도 레닌이나 리프크네히트에 정당들은 정작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염병을 옮기는 자들, 혁명가들.



엥겔스는 언젠가 마르크스와 자신들은 정작 평생 소수파였지만 "전혀 개의치는 않는다."고도 썼었다. 피억압 계급들에 운동들은 혁명에 일반적인 과제들 수준에서는 조응하는 시기로도 역사에서는 극히 드문 예외적인 사례들이다. 피억압자들이 승리하던 경우보다는 패배하는 경우는 훨씬 더 흔하기 때문이다. 피억압자들은 패배할 때마다 반동에 시기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럴 때마다 혁명가들은 엄혹한 고립상태로 내몰린다. 사이비혁명가들, 그러니까, 곧, 어느 러시아 시인들도 읊었듯이 "한 시간동안만이라도 기사도를 발휘하는 자들"에게는 그런 시기에 피억압자들에 대의를 공공현하게 배신하거나 아니면 어느 진영과도 결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구원공식들을 찾아서 종종걸음들을 친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경제학들이나 사회학 분야에서도 타협주의적 공식들을 발견한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모순들은 자유주의자들이나 민주적 개혁주의자들에 '조화' 공식들을 영원하게도 뒤집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종교와 초월적인 윤리들에 대한 영역들만 여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고. 러시아 사회혁명당에서는 교회와도 동맹해서까지 민주주의를 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마르소 피베르는 교회를 프리메이스단들로부터 대체했다. 보아하니 빅토르세르주는 아직까지도 프리메이슨들에 집회소에는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해서 피베르와 함께 쓰는 언어를 찾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들마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계급들은 현대사회에 운명들을 결정한다. 제국주의적이기만 한 지배계급들이나 무산계급들은 그들이다. 지배계급들에 마지막 자원으로는 파시즘이다. 파시즘들은 사회적·

역사적 기준들을 그저 생물학적·동물학적 기준들로만 대체해서 스스로 자본주의적 소유를 위한 투쟁들에서 아무런 제약마저도 받지 않으려고 한다. 문명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사회주의혁명들 뿐임에도 말이다. 그런 혁명적인 전복들을 이루고자 하라면 우선 무산계급에게는 모든 힘들을 어찌됐든 동원해야만 하고, 철저하게도 결단력마저도 있어야 하고, 최대한 대담하고도, 최대한 열정적이고, 최대한 무자비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무산계급들에게는 종교, 곧 '민주주의', 초월적이기만 한 윤리라는 허구들에서도 완전하게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건 무산계급들로부터 길들여서 그저 노예들로 삼고자 적들이 만들어 낸 정식적인 족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만행들로는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도 전복할 수 있게 준비한다는 건 매우 윤리적이고 나머지는 오직 아닐 뿐이다. 혁명에 안녕이야말로 가장 최고에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기본 계급들에 사생결단에 전투를 벌이는 시대에 지배계급들이나 무산계급들에 상호관계를 분병하게 이해하면서 새로운지배계급들에 도덕주의잗르에 구실들은 어떻게 객관적인 의미들마저도 있던지를 알게된다. 그들에 주된 특성들은 무기력들이다. 그러한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새로운지배계급들에 경제적 퇴보 때문에 사회적으로 무기력하고, 엄청난 계급투쟁들 앞에서도 새롭기만 한 지배계급들에 느끼는 두렴둘 때문에 사상적으로도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배웠떤 못 배웠든 새로운 지배계급들은 계급투쟁들을 억제하라고도 촉구한다. 영원한 도덕들을 이용해서는 그렇게 하는데 성공하지도 못하면 그건 결코 성공할 수조차도 없겠다. 새로운지배계급들은 곧장 파시즘들에 품으로 뛰어든다. 파시즘이라는 신화와 사형집행인들에 도끼를 사용해서까지도 계급투쟁들을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빅토르세르주와 그에 동료들에 도덕주의는 혁명에서 반동으로 벌써 건너가는 다리일 뿐이다. 수바린은 이미 이 다리 건너편으로 벌써 건너 가 있다. 이런 경향들로부터 조금이라도 양보한다는 건 반동들에 투항하는 첫 걸음들이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옮기는 이런 자들에게 히틀러, 무솔리니, 네빌체임벌린, 에두아르달라디들에게도 윤리규칙들을 주입하게 하자. 우리들에게는 무산계급들에 혁명강령들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1939년 6월 9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배반당한 혁명.



소련에 가족, 청년, 문화. 



가족 내부에서 테오르미도르 반동.



10월혁명에는 여성들에 대한 자신들에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했다. 갓 탄생한 소련 정부에는 여성에게도 남성과도 동등한 모든 정치적·법적인 권리를 부여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유사 이래로 무슨 정부들이든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도 여성에게만큼은 모든 형태에 경제적·문화적 활동들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조치를 능력들로부터도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취했다. 그러나 매우 대담한 혁명에서도 "전능한" 영국의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임신, 출산, 육아 등에 부담들을 동등하게 남성이나 여성들에게도 쉽게 나누어 줄 수는 없겠다. 혁명에는 소위 "가정"이라는 곧 노동계급들에 여성들도 나서 죽을 때까지도 노예선이나 노예노동까지도 수행해야 하는 케케묵고 답답한 제도를 파괴하고자 영웅적으로도 노력했다. 계획들에 따른다면 일종에 폐쇄된 소기업들인 가정 대신에 산부인과, 병원, 요양소, 체육단체, 영화관 등에서도 완벽한 공공서비스 체제들로부터 가정에 역할들을 대신하게 됐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관들로부터 가족들에 가사를 완전하게 소화해서 모든 세대들을 연대와 상호부조들에 틀로부터 통일할 경우에는 여성이나 사랑하는 부부들에게는 천년이나 지속된 족쇄를 진정으로 벗어던질 수 있을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문제들 가운데에서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가족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았다. 사천만 소련 가정들에서는 절대다수로부터 중세적인 반동, 여성노예제와 히스테리, 아동들에 대한 일상적인 모욕, 여성이나 아동들에 대한 미신 등으로 자라나는 어두운 소굴들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슨 환상들마저도 쉽게 품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소련에 가족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에 연속적인 변천들은 소련 사회에 실제 현실이나 소련 지배층들에 진화과정에서도 매우 특징적으로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가족제도를 단번에 일소하는 건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저 의지마저도 부족했거나 가족들로부터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너무도 확고하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정부는 창설했던 탁아소, 유치원, 등으로부터 같은 기관들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던 시기를 잠시 경과한 후에는 노동여성들로부터 이후로는 좀 더 선진적인 농민들은 가사에 대한 사회화뿐만 아니라 아동들을 집단적으로도 돌보는 제도들로부터 한없는 장점들을 인정하게 됐다. 불행하게도 소련사회는 너무도 가난하고 문화수준마저도 낙후했던 걸로 판명됐다. 국가에 대한 실제자원들은 공산당들로부터 계획이나 의도들에는 제대로 부합하지도 못했다. 가족을 "철폐"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가족은 더 좋은 다른 형태로도 대체할 수도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에 실제적인 해방으로는 그저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상황에서는 실현할 수는 없었다. 이미 80년 전에 마르크스도 정식화했던 이 엄격한 진실들에는 경험으로부터도 곧 증명했을 뿐이었다. 상황들도 아주 어려운 몇 년 동안에는 곳곳에 노동자들,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 가족들은 공장들이나 다른 공공식당에서마저도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로부터도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삶으로부터 가는 이행기적 현상으로도 간주됐다. 혁명 이후에는 각기 다른 시기들 즉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제일차오개년계획시기들에 대한 특성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논의할 필요는 전혀 없을거다. 이후로는 식량배급표도 철폐된 1935년부터는 상황마저도 좋던 노동자들은 가정들에 식탁으로도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러한 후퇴현상들로부터는 단지 사회주의 체제들에 대한 부정이라고 간주한다면 크게 부정확할거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도 사회주의 체제는 시도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정작 정말로 사태를 비관적으로만 만든 건 관료집단들도 조직한 "공공식단"들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나 부인들도 가졌던 판단들 때문이었다. 리넨 천들도 세탁되는 양보다도 찢기고 도난당하던 양들도 참 많던 공공세탁소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들을 내려질 수 있을거다. 다시 가정으로도 돌아가자! 그러나 현재 웅변가들이나 언론인들에 의해서 후안무치하게도 찬양되고 있던 가정취사와 세탁들은 노동자들에 부인들에게도 다시 자신들에 그릇이나 냄비들로도 되돌아간다는 건 곧 옛날에 노예제도로도 차마 돌아간다는 걸 뜻한다. "소련식사회주의에서 완벽하고 돌아갈 수 없는 승리"마저도 선언했던 코뮌테른들에 결의문들은 공장지대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아주 설득력들을 가질 거라는 건 기대하기는 힘들지는 않겠는가! 농촌가정에서는 가내수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밀접한 관계들도 있기 때문에 도시들에 가정들보다는 한없이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몇 안 되는 일반적으로도 지극하게 빈곤한 농촌공동체에서는 혁명에 첫 몇 년 간 공공식당이나 탁아소를 도입했다. 처음 발표된 담화문들은 농촌에 집단화들로부터 가족제도들에 대한 결정적인 변활를 가져올 조치들을 시도할 거라고 선언했다. 농민들은 소유한 닭이나 소를 괜히 징발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소련 전역에서도 공공식당들에 당당한 진군들에 대한 담화문들로는 아주 많이도 발표됐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로부터도 후되는 시작됐을 때 현실들은 이 허풍스러운 말에 대한 그림자들로부터도 갑자기도 나타났었다. 일반적으로도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도 자기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빵이 가축들에게도 먹일 사료들만을 얻을 수 있었다. 육류, 유제품, 채소 등들은 거의 완전하게도 집단농장들 옆에서도 위치했던 개인소유에 텃밭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일단 우선 가장 중요했던 생필품들로부터도, 가족들에 고립된 노력들로부터도 획득했던 이상으로부터 공공식당들에 대한 말들은 더 이상 나오지는 못했었다. 따라서 개인소유들에 소규모 농장들에서는 개인가정들에 새로운 물질적 기반들을 제공함으로 여성들에게 이중들에 부담으로도 작용했다. 



1932년에는 일상적으로 운영되던 탁아소수용인원들은 전체 육십만명들이었고 들판에서 일할 경우에만 아이를 맡는 계절적인 탁아소 수용인원들은 고작 사십만명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5년에 어린이용 침대에 수는 560만 개로 갑자기 급증해서 달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침대에 수는 전체 수에 아주 적은 비율에만 불과했었다. 더욱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 같은 대도시에서조차도 일반적인 탁아에 요구들에 대해서도 탁아소 서비스는 대체로 제대로 부응하지는 못했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는 거보다는 차라리 잣다고 느끼는 탁아소는 탁아소도 아닌 질도 나쁜 고아원에도 지나지 않는다"고 주요한 소련들에 신문들도 불평하고 있다. 상황들로부터 좀 더 좋은 노동자 가족들로부터 탁아소를 기피한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질 나쁜 고아원"도 그 수는 매우 적다. 아주 최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기아들이나 고아들에게도 개인가정에서도 양육되어야 한다는 결의문들을 채택했다. 매우 고위에 기관들로부터도 관료집단들은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적 기능들을 자신들로부터 수행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1930년부터 1935년에 오년 간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들에 수로는 37만 명에서 118만 일천 명으로도 늘어났다. 1930년 대에 수치는 너무 낮아서 두드러지는데 1935년에 수치는 소련에 가족 수에 비해서 대양에서 물 한 방울에도 지나지는 않아 보인다. 조금만 더 조사를 진행해보면 이러한 유치원들에 대다수나 심지어는 거의 모두가 행정부, 기술요원, 스타하노프 운동원 등에 자녀들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들을 밝혀내게 될거다.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얼마 전에도 "기아와 고아에 일소들에 대한 결의문마저도 제대로 실행에도 옮겨지고 있지는 않다."고 공개적으로도 증언하지는 않을 수 없었다. 이 냉정한 자백에는 과연 무슨 현실들도 숨겨져 있을까. 조그만 활자로 인쇄된 신문에 실린 발언들로부터 우연하게도 모스크바에서는 일천 명 이상에 대한 아동들은 "아주 어려운 가족상황 속에서도" 살고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수도에 고아원들에서는 대략 1,500명에 아동들도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서 거리로도 나앉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는 1935년 가을 2개월 동안 "아동들을 버린 죄로 7,500명에서 부모들도 재판장에 섰다." 이들을 재판정에 서게 한들 무슨 소용마저 있을까. 몇천 명에 부모들은 재판장을 얼마나 모면했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들 속에 놓인" 아동 중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로도 통계에도 잡혀지지는 않았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이나 그냥 어려운 상황에는 무슨 차이마저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해답마저도 찾지는 못하고 있겠다. 왜냐하면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공개되어 있던 집 없는 아이들에 대단하게 많은 숫자들로부터 과거에 가정들도 너무 빨리 해체되어서 새로운 제도들마저도 이걸로는 택도 없이 대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회적 위기들에 직접적인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신문들에 대한 발언들이나 형사사건들로부터도 독자들은 돈을 지불하는 남자들에 이해들로부터도 여성들은 극단적으로도 타락하는 현상인 매춘에 대한 존재를 소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가을ㄹ <이즈베스챠>는 독자들에게 모스크바에서 "무산계급 수도들에 대한 거리에서도 비밀리에 자신들에 몸을 파는 1,000명이나 되는 여성들도" 체포됐다고 보도했었다. 

체포된 여성들 가운데에서는 177명에 노동자들, 92명에 점원들, 5명에 대학생들도 있었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던가. 불충분한 임금, 궁핍, "옷이나 신발들을 살 약간에 돈마저도 벌기 위한" 필요 등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학에 정도들을 대충이나마 알고자 하는 놀력들은 성과마저도 없을거다. 하급관료들도 마찬가지로 통계요원들에게 그저 침묵을 지키라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만 명령한다. 그러나 이렇게 강요된 침묵으로는 소련에 매춘부, "계급"에는 그 수도 많다는 걸 오류에 대한 여지없이도 증어할 뿐이다. 이들에 존재로는 "과거에 잔재"라는 주장들은 근본적으로도 말도 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젊은 세대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적어도 이성마저도 갖추고 있었다면 문명에 대한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사회악들에 대해서는 소련체제를 비난하지는 않을거다. 그러나 매춘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건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문들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도 있는 허가를 받는 한에서는 "매춘행위는 감소하고 있다"고 물론 주장하고 있다. 기아와 피폐에 해이던 1931년부터 1933년대 사이에 상황들로부터 비교해봐도 이 말은 진실하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도 화폐경제는 충분하게 회복되었거나 직접적인 배급제도는 철폐되었으므로 집 없는 아동들이나 매춘들은 불가피하게도 새롭게 증가할거다. 특권층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버림받은 자들도 존재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집 없는 아동들에 많은 수는 의심에 여지 없이도 여성에 어려운 상황들을 매우 오류 없는 비극적으로만 보여주는 증후들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프라우다>까지 가끔 쓰디쓴 자백들을 하지 않을 수조차도 없겠다.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들은 이들에 사회적 지위들에 대한 아주 심각한 위협을 주는 요인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정부는 늘 여성들에게도 낙태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었다. 거세된 남성들이나 노처녀들은 무엇이라고 하든 궁핍이나 가족에 대한 어려움들 속에서 낙태는 여성에 가장 중요한 시민적·정치적·문화적 권리들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들에 권리이던 낙태 역시나 현재와 같은 사회적 불평들에 체제에서는 특권으로도 변질되고 말았다. 낙태들에 관행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보로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우랄지방에 어느 한 지구에 있는 농촌병원 한 곳으로부터는 1935년에 "195명에 여성들은 산파들로부터 몸을 상했었다." 이 가운데에는 33명에 노동여성들, 28명에 사무직 노동자들, 65명에 집단노동 여성들, 58명에 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구는 낙태에 대한 정보로는 언론으로도 흘러들어 갔다는 건 대부분 다른 지구들과도 차이는 많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은 현재까지도 매일 소련전역에서도 산파들에 의해서 몸을 상하고 있을까. 



필요한 의학적 도움이나 위생시설들을 갖춘 낙태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그들에게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마저 없음으로 밝혀지자 마자 국가는 방침들을 갑자기 바꾸어 놓고서는 낙태를 금지하는 쪽으로도 방침을 단독으로만 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상황에서도 필요를 강변하고 있다. 소련 대법원 판사 솔츠는 현재 결혼문제 전문가이다. 앞으로 시행될 낙태금지 정책들을 옹호하면서도 그는 실업자마저도 없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은 "엄마로 되는 기쁨"마저도 거부할 권리마저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건 경찰들에 권한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성직자들만에 철학들일 뿐이다. 바로 이전에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많은 여성들에게도 그리고 아마 절대다수에 여성들에게도 출산에 대한 "여성들에 사회적 지위들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련에 최고기관들로부터도 "고아와 기아들에 일소정책에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이 말들은 집 없는 아동들에 수는 새롭게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이 소련 대법원 판사는 "인생마저 행복한" 나라에서는 낙태는 감옥행으로만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건 그저 인생만 슬플 뿐 자본주의 국가들이나 똑같은 정책들일 뿐이다.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간수들에 손아귀에서 고생할 사람들은 주로 노동여성, 하인, 농민들에 부인 등인데 이들은 자신들에 어려움들마저도 숨기기란 참 힘들었다. 고급향수나 기타사치품들에 대한 수요들을 창출하는 고위층들로부터 "우리 여성들"은 관대한 법으로보는 바로 앞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한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한사코 모른 체하면서도 솔츠는 결론 내린다. "우리는 사람들도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아이들을 낳으시지요."라고 수백만 노동여성들은 이 고위판사양반들에게도 말할 수 있을거다. 이는 물론 관료집단들로부터도 이들에 입을 꼭 봉해서 완전하게도 침묵하도록 하지 않을 경우에만 아무래도 할 수 있을거다. 사회주의란 여성들에게도 낙태를 강요하던 원인을 제거하는 체제이지 모든 여성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정작 불한당 같은 경찰들을 동원해서 "엄마로 되는 기쁨"들을 강요하는 체제는 아니라는 사실들을 이들 높으신 양반들을 완전하게도 잊어먹은 거 같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 초안들이 소위 광범위한 대중에 논의를 위해서도 제출됐다. 그러나 소련 언론이라는 가는 체를 통과하기는 했더라도 강한 불만이나 억눌린 저항마저 터져나왔다. 그러자 토론들은 그걸 개시됐을 때만큼도 갑작스럽게 중단됐고 6월 27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들로부터도 치욕스러운 초안들도 세 배나 더 치욕스러운 법들로 전환되었다. 관료집단들에 낙태금지 변명자들도 일부는 낭패라는 빛을 보였다. 루이스 피셔는 이 법들로부터도 통탄할 정도에 오해는 존재하는 가운데 통과됐다고 선언했다. 고위관료들에 부인들을 제외한 여성들에 권리를 금지하는 이 새로운 법들은 실제로는 테르미도르 반동들로부터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루블화에 복권이나 함께 동시에도 가족과도 복권되었다. 얼마나 은총들은 가득한 우연들에 일치들이던가. 그런데도 이 복권들로부터도 국가에 물질적·문화적 파산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공개적으로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적 관계를 창출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거도 증명됐다. 우리들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은 이 목적들을 실현하는거"라고 말하는 대신에 소련에 지도자들은 깨어진 가족들에 외형들을 다시 아교로 이어붙이는 걸 강요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극심한 벌칙들에 위협을 동원해서도 가족들로부터 승리한 사회주의에 성스러운 중핵으로도 바라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로부터 가져온 사회적 후퇴를 눈으로 측정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입법자, 문학가, 법원과 민병대, 신문이나 학교교실 등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사물들로부터도, 새로운 정책 속으로도 끈에 묶인 채로 끌려 들어오고는 있다. 단순하고 정직한 어느 청년공산주의자들은 그에 신문에도 다음으로 같이 대담하게 글들을 실었다. "여성들은 가족들로부터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도에도 골몰하는 건 좋을거다." 그런데도 이 청년들은 곧 뺨을 두세 차례나 맞고 침묵들을 지킨다. 공산주의라는 기본적인 정책들은 "좌익적 노선들에 과도함"으로도 선언됐다. 문화적 소양마저도 없는 속물들에 어리석고 썩어빠진 편견들에 새로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소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끝없이도 광활한 나라들에 모든 구석구석들에는 무슨 일들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언론들은 오직 미세한 정도로만 가족 내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을 반영하고만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라는 고상한 열정으로는 죄악에 대한 증대와 함께 더 뜨거워진다. 따라서 십계명에 제7조 "간음하지말라"에는 관료지배층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련에 도덕론자들은 문구를 약간만 고치면 된다. 너무 빈번하고 쉽게 발생하는 이혼들을 반대하는 캠페인들이 지금도 시작되고는 있었다. 소련에 입법자들에 창조적인 사고로는 이혼을 신고할 때조차도 신고료를 받고 이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신고료를 인상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를 이미 발명했었다. 위에서 이미 가족들에 복권으로부터 루블화라는 교육적인 역할들에 대한 증대를 수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신고료 징수는 돈을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고를 하기를 어렵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건 당연하다. 상류층 인사들에게는 이 정도에 세금들도 하등에 어려움들도 초래하지는 않기를 우리는 더욱 희망한다. 더욱이 고급 아파트, 승용차, 기타 좋은 걸 많이 소유하고 계시는 고위인사들은 자신들에 신상을 필요로 없이도 알리지 않기 위해서 신고를 하지도 않는다. 매춘에 무겁고 모욕적인 성격에는 사회에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에만 가해진다. 소련사회에서 상류층에서는 권력에 대한 안락함으로도 결합되는데 여기서 매춘들은 소규모로 된 상호서비스라는 우아한 형태를 갖추거나 심지어는 "사회주의 가족"들에 측면들을 뒤집어쓴다. 지배층에 타락과정에서도 "승용차여자요인"들로부터 갖는 중요성들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부터, 소스노프스키로부터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정적이고 학자풍이던 서방에 대한 "소련에 친구들"은 무엇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눈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만 한다. 10월혁명으로부터는 확립된 혼인법이나 가족법들은 당당한 긍지들에 대상이었는데 이제 지배계급들에 국가들에 법률창고들로부터도 대대적인 차용들을 고쳐지거나 찢겼다. 경멸에 대한 눈빛을 보이면서도 배반이라는 도장들을 고의로도 찍기라도 하듯이 낙태와 이혼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자유를 옹호하고자 제출됐던 주장들 곧 "여성해방", "개성을 추구할 권리들에 대한 옹호", "모성보호" 등으로부터 이제는 이러한 자유들을 제한하고 완전하게 금지하고자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에 대한 후퇴는 구역질 나는 위선에 대한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필요라는 절칙들로부터 요구한는 거보다는 한없이 더 나아가고 있다. 이혼여성들에 대한 위자료 지급이나 같은 지배계급들에 법형식들로부터 회귀하는 현상들은 객관적인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관료지배층으로부터 지배계급들로부터 법들을 더욱 많이 도입해야만 하는 사회적 이해관계들로부터도 결부되고 있겠다. 현재로는 관료집단들로부터 가족들을 신성시하게 하는 매우 주요한 이유 이들로부터 사회관계에서 위계들을 안정적으로도, 정적으로도 확립해야할 필요성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위나 권력들을 지지하던 사천만 개에 기관들로부터 청년들을 현 체제로부터 요구하던 규율들로 그저 묶어버리기 위한 필요성으로도 작용해버렸다.



새로운 세대들에 교육들을 국가에 손으로만 집중하고자만 하는 희망들을 소려지배층들은 아직도 버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에서는 부모를 위시했던 "어른들"만에 권위를 지지하던 일에는 관심이나 흥미마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도 어린이들을 가족들로부터 분리하고자 하기 위해서 최선에 노력들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을 정체된 생활양식들에 대한 전통으로부터도 격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제일차오개년 계획들로부터 시행됐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나 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는 작은 어린이를 이용해서라도, 술주정뱅이 부친들이나 그저 종교를 가졌던 모친들을 폭로했고, 모욕줬고, 일반적으로도, "재교육"해놨다. 어쨌든 이 방법들로부터는 기존에 부모들에 권위를 뿌리째 흔들 수 있었다. 이 중요한 분야에서도 역시 급격한 정책전환들로부터도 일어났다. 십계명으로부터 제칠조로부터도, 함께, 제오조, "신들을 모욕하지는 말라"도 완전하게 권위마저도 회복해놨다. 그렇다고 신들을 부르는 단계까지도 도달한 건 아니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학교에서는 십계명, 제오조를 들먹이지도 않으면서도 학생들에게 보수성이나 판에 박힌 규율들을 주입할 수 있는 일에도 성공하고, 성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세대들에 권위들에 대한 관심이나 우려로는 벌써 이미 종교와 관련된 정책들에 대한 전환들을 가져왔었다. 하느님에 대한 존재, 그들에 대한 도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적들에 대한 부정들은, 혁명권력들로부터 아동이나 부모들 사이에 박은 가장 예리한 쐐기였었다. 그러나 문화들에 발전, 진지한 선전, 과학으로부터도 입각했던 교육들보다도 훨씬 앞서서 진행되던 종교에 대한 투쟁으로는 야고슬라브스키와 같은 인물들에 지도 아래에서도 종종 익살이나 장난기로도 타락했다. 이제 가족들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로도 하늘나라들에 대한 공격도 갑자기 멈추었다. 품위들에 대한 평판들을 신경쓰지는 않을 수 없는 관료집단들에서는 젊은 "무신론자들"에게도 종교들에 대한 싸움들을 멈추고 독서를 하고자 책상에도 앉기를 명령했다. 종교들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중립정책들로부터는 이제서야 확립됐다. 그러나 이건 아직 첫단계에 불과하다. 사건에 진전들로부터 관료집단들로부터는 좌지우지 된다면 두번째 단계들이나, 세번째 단계를 예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도 않겠다. 지배층들에 견해로부터 드러내는 위선들은 모든 곳에서도 그리고 언제나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도 확대판으로도 발전해왔다. 이건 대체로는 사싱이라는 역사적 법칙들이다. 사회주의들로부터 이름들에 값하려면 탐욕들로부터도 개입되지도 않던 인간관계, 시기와 술책들도 없는 우정들, 저속한 계산들도 없는 사랑들로부터도 실현되어야만 한다. 소련들에 공식적인 사상으로는 이러한 이상적인 규버들로부터 이미 벌써 실현됐다고 선언하고나 앉아있다. 이를테면 1936년 4월에 채택된 공산주의 청년동맹들에 새로운 강령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진정한 평등에 기반해서도 새로운 가족들도 등장했다. 이 새로운 가족들을 번성하게한다는 건 소련정부들에 관심사들이다." 이 강령들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으로는 강령들을 보완하고 있다: "우리 청년들은 평생 친구들인 아내들이나 남편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사랑이라는 오직 하나에 동기와 충동만을 가지고 있다. 금전적인 편의로부터 개입된 지배계급들에 대한 결혼으로는 성장하는 세대들에게는 앞으로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프라우다> 1936년 4월 4일. 일반적인 노동자들에게도 관계되는 한에서는 이건 어느 정도로도 사실들이다. 그러나 "돈들을 위한 결혼"으로는 자본주의 세계들에서도 노동자들에게도 비교적 대부분에서는 거의 알려진 바는 있지도 않겠다. 그러나 소련에 중산층들이나 상류층들로 가면 상황들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계층들은 자동적으로도 인간관계들에서도 자신들에 특성들을 반영해낸다. 권력이나 돈들로부터 이성적인 관계들에 미치는 악행들은 소련관료집단들 내에서도 아주 흔하게도 퍼지고 있겠다. 마치 이들은 이에 대해서는 서방에 지배계급들을 능가하겠다는 목적을 벌써 정한거 같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금까지도 인용된 <프라우다>에 기사내용들과는 정반대로도 "정략결혼"에는 소련언론들로부터 우연하게는 도는 피할 수 없이도 정직함들을 드러낼 때 비로소 자백하듯이, 이제는 완전하게도 부활했다. 자격요건, 임금, 고용, 계급 등들에서도 점점 더 커다란 의미마저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는 신발, 모피외투, 아파트, 욕실, 그리고, 최종적인 꿈들인 승용차구입 등에 대한 문제들로도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단칸방들을 구하고자 하는 투쟁들은 매년 모스크바에서도 적지 않은 수로도 부부들을 결합하고 있고 헤어지게들 만든다. 그리고 친척관계들에서도 결혼에 있어서도 예외적인 중요성들을 획득했다. 군사령관이나 영향력 있던 공산주의자 장인들을 두거나 높은관리들에 대한 여동생 장모를 둔다는 건 출세나 안락한 생활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마저도 없을거다. 이와는 다른 상황들에서도 도대체 소련에서는 어떻게 할 수나 있겠는가. 소련들에 대한 두꺼운 단행본들에 대한 가장 극적인 장들 중에 하나로는 소련가정에 대한 해체와 붕괴들에 대한 이야기일거다. 남편들은 당원들, 노동조합간부들, 군사령관들, 행정가들을, 역임하면서도 새로운 취향들을 개발해낸다. 그러나 부인들은 가족이라는 굴레에만 묶여서 과거에 수준들에만 여전하게 머물려 있겠다. 소련이라는 관료집단들에 두 세대로부터 걸어온 길들에는 부인들도 남편들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뒤처진 비극으로도 가득하다. 같은 현상들은 이제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나타난다. 가장 커다란 잔학행위는 아마 관료집단 상층부들에서도 볼 수 있을거다. 이들 중에 많은 비율로는 교양마저도 거의 없는 벼락출세파들이고 모든 건 자신들에게만 열려 있다고 그저 생각만한다. 언젠가 고문서 보관서에도 비치된 비밀문서나 회고록도 공개되면서부터 이들에 부인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한 추악한 범죄들도 드러날거다. 가족들에 도덕이나 강제적 "모성에 대한 기쁨"을 복음주의자처럼 외치던 이들은 여성들이나 가족들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높은 지위들로 인해서 기소마저 되지도 않는다. 아니다, 소련여성들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겠다. 법 앞에서도 완전한 평등으로는 노동자 여성들이나 농촌여성들보다도 상류층여성, 기술·관료·교육 등 일반적으로도 지식분야를 대표하는 여성 등에게는 한없이도 많은 특궐들을 부여해왔다. 사회는 가족들에 물질적 걱정들을 직접 해결하지도 못하는 이상 주부는 흰옷을 입은 노예 곧 보모, 하인, 요리사 등들을 부릴 수 있을 때에만 자신들에 사회적인 기능들을 성공적으로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사천만 가구들 중에서는 5퍼센트나 또는 10퍼센트만이 가정노예에 대한 노동들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만 의존한다. 소련에 존재하는 하인들에 대한 정확한 인구조사 통계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소련에 대한 법률체계만큼이나 소련여성들에 지위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평가에도 중요할거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소련에 통계로는 "노동여성" 또는 "기타다른사람들"이란 이름 아래에서 하인들에 존재를 숨긴다.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에 부인들은 요리사를 구비하고 상점에다 주문할 수 있는 전화를 구비하고 있으며, 심부름을 보낼 승용차 등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상점으로 뛰어가야만 하고, 저녁들을 준비해야만 하고, 유치원이 있을 경우에는, 거기까지도 걸어가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 노동여성과도 공통점은 거의 없겠다. 사회주의라는 명찰들은 이 사회적 격차를 은폐하게 할 수는 도무지도 없겠다. 이 격차는 서방에 지배계급들에 여성들이나 노동자 여성들 간에 격차만큼이나 매우 크다. 



참기도 참으로 어렵고, 모욕적이기만 한 가정생활에 대한 어려움들은 사회전체에 노력들에 의해서도, 제거된 진정한 사회주의 가족으로는 무슨 강제적 통제도 요구하지는 않을거다. 그리고 이러한 비로소 자유로운 가정들 내에서는 낙태와 이혼에 대한 법률들을 생각하는 거 자체만으로 하더라도 매춘굴이나 인간제물사원들을 생각하는거만큼이나 아마도 끔찍하게나 느껴질거다. 



10월혁명들에 대한 법률들은 이러한 가족들을 창조하기 위한 대담한 첫발들을 내딛었다. 그러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으로 잔악한 반동들마저 초래해왔다. 테르미도르 반동들에 대한 법률들은 심지어는 이제 지배계급들이라는 법 모델로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이 후퇴는 "새로운" 가족들에 성스러움들에 대한 거짓 연설들로 가려져 있겠다. 이 문제들에서도 사회주의 건설들에 실패잗르인 소련지배층들은 위선적인 품위들로도 자신들을 위장하고 있겠다. 

특히 아동문제들에 대한 높은 원칙들이나 추악한 현실들에 사이에서도 격차들로부터 충격들을 받은 진지한 관찰자들도 있겠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채택된 가혹한 형법적인 조치들은 여성이나 아동들을 옹호하는 사회주의 법률들을 조야한 위선으로 밖에는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들을 암시하기로는 더욱 더 충분해진다. 법률들이나 행정기구들에 형태로도 거짓 치장한 사상들에 대한 광범위함이나 관대함들로부터 속아버린 정반대 종류들에 대한 관찰자들도 있겠다. 궁핍한 주부, 창녀, 집 없는 아동들을 보면서도 이들 낙관주의자들은 물질적 부는 좀 더 증대하면서도 사회주의 법류들에 피와 살들을 붙게 될 거라고 스스로 말한다. 위에 두 가지 접근방식들 중 어느거도, 무엇도, 좀 더 오류들이고, 해로운지를 판단한다는 건 쉽지도 않겠다. 역사 맹인증들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적 계획들에 대한 광범위함이나 대답함, 이 계획들에 대한 실행초기단계들로부터 중요성, 그리고 이로부터 열린 엄청난 규모들에 가능성들 등을 심지어는 보지도 못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소련에서도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증대로는 눈을 감고 그저 미래를 바라보기만하면서 정작 관료집단들에게만 존경스럽게도 미래에 열쇠를 맡기는 부류들도 있겠다. 이들은 불평등한 현실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그저 위안하면서도, 그저 수동적이고, 그저 기본적으로도, 그저 무관심한, 그저 낙관론자들에 불과해진다. 이들에 대해서 분노마저도 느끼지도 않는다면 도무지도, 도대체, 이상한 일이기만 할거다. 여성들이나 남성들에 권리평등들은 관료집단들로부터 권리박탈들에 평등으로도 전화되지 않듯이, 이들은 생각마저 하고 있겠다. 무슨 성서에 지혜서에서 소련에 관료집단들은 자유를 대신해서도 새로운 억압들을 도입하지는 않을거라는 확실하게 약속되어 있듯이도, 이들은 또 생각하고 있겠다.



과연 남성들은 여성들을 어떻게 그저 노예로 만들어왔는가, 착취자와 이 양자를 어떻게 모두 지배해왔는가, 노동인민들은 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노에상태들에서 자신들을 해방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떻게 해서 하나에 쇠사슬들은 그저 다른 쇠사슬들로만 바뀌었을 뿐인가. 역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거에 대해서는 정말로 많은 애기를 들려주고, 해준다. 이건 역사들로부터 우리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전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에서는 아동, 여성, 인간들은 과연 스스로를 해방할텐가. 이 문제를 해결할 믿을만한 모델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모든 부정적이고, 부정된 역사적인 경험들은 대중들로부터도 통제되지도, 통제하지도 않던, 억압체제들에 수호자들이나 모든 특권층들에 대해서는 노동인민들은 그저 결코 지워지지도 않는 불신으로만 무장하기를 간곡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또한 요구해본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고치는 가운데.



우리는 10월 혁명들로부터 성공했다. 그러나 이 혁명에는 출판에 영역에서도 좀처럼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10월 혁명에 격동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이 혁명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조직적인 측면들을 다루고, 올바르게 부각한 저작들은 아직까지도 단 한 권도, 단 한 줄도 출판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불행한 사실도 또 있다. 혁명 준비 작업 및 혁명 그 자체에 대한 세부정보들을 담고 있는 1차 자료들이나 그 중에는 가장 중요한 공식 문서들로부터는 아직까지도 출판되지도 못하고 있다. 10월 혁명 이전까지에 혁명사 및 당사와 관계된 허다한 문서들이나 자료들은 벌써 출판됐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정작 10월 혁명들은 제대로 관심이나 흥미마저도 끌지 못하고 있다. 혁명으로부터 승리했으므로 그걸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내린 듯이 보인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연구는 미룰 수 없는 사회주의 건설 과업에서도 직저적이고 즉각적으로도 도움마저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와 관계된 실제조건들, 혁명에 대한 실제적인 완수 및 과정, 혁명 이후에도 혁명 성과를 공고하게 한 첫 몇 주일 등들에 대한 연구는 아무런 이득마저 되지도 않는다고 이미 결론내린 듯이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들에는 무의식적으로도 설령 잠재해 있다고 하더라도 굉장하게 잘못됐다. 특히나 편협하게 치우치고 일국적인 사고들에 단면들을 잘 보여줄 뿐이다. 10월 혁명들에 대한 경험들을 다시금 반복할 필요마저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러한 경험들로부터는 무엇도 배울거도 없다는 결론에는 결코 내릴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인터내셔널에 일부이고 다른 나라 노동자들도 자신들에 '10월혁명'을 성취해야 할 과제마저도 안고 있었다. 우리는 이로부터 말해준 실례들을 작년에도 많이도 접했었다. 서방에서는 매우 선진적인 공산당들조차도 10월 혁명들에 대한 교훈들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혁명들에 대한 실제 사실들을 대체로 알고 있지도 못했다. 내 주장들을 반대할 사람들도 분명 있을거다. 10월 혁명을 그저 연구했거나 그와 관계된 문서들을 출판한다는 건 과거에 대한 이견들을 다시금 부추기는 꼴만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건 아주 치졸할 뿐이다. 1917년에도 있었던 이견들로는 아주 중요한 의미마저도 담고 있었고 그저 단순하게, 우연하게 발생한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는, 당시에도 오류를 범했던 인사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때의 이견들을 들추는 더럽고 치사한 행위는 없을거다. 그러나 사소한 개인적인 고려들 때문에 10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건 더욱 인정할 수도 없겠다. 왜냐하면 10월 혁명들로부터 제기한 문제들에는 국제적인 의의마저도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불가리아에서는 혁명마저도 처참하게 패배를 당했다. 무엇보다도 불가리아 공산당에서는 숙명론이나 교조로부터 젖어 있다가도 둘도 없는 혁명에 대한 기회마저도 놓쳐버렸다. 6월 차코프 쿠데타에 이은 농민봉기로는 혁명들을 성공할 수 있었던 둘도 없는 기회였지만. 그리고선 오류를 만회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정치적·조직적인 준비들도 없이도 9월 봉기를 일으켰었다. 불가리아혁명에는 독일혁명에 대한 전주곡으로 됐어야만 한다. 불행하게도 불가리아에서는 엉터리 전주곡들은 독일에서 더 지독한 엉터리 혁명들을 불러일으켰다. 작년 하반기, 독일에서는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하고 절대적으로도 유리한 혁명에 대한 기회를 찾아왔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정작 이걸 말아먹는 방식으로 아주 모범적으로도 보여주었다. 그보다 더욱 불행한 일들도 더 있었다. 작년 불가리아와 독일에서도 실패한 혁명으로는 그러한 중요성에 비추어서도 올바르게, 또는 충분하게 평가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나는 독일에서 상황들을 개괄적으로도 묘사한 글을 쓴 바 있었다. 그리고 내 묘사는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올바르다는 건 사태에 대한 전개로도 하나하나 입증됐었다. 그런데도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설명마저도 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도, 정작 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개괄적인 묘사 이상으로도 필요하다. 작년 독일에 대한 상황에서는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실에서도 입각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이 매우 참혹한 역사적 패배에 대한 원인들을 구체적으로도 해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10월혁명을 정치적·전술적으로도 자세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리아와 독일에 사건들을 분석한다는 건 사실상 할 수 없다. 10월혁명에 성사방법이나 성과는 단 한 번도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10월혁명에 승리에 그저 열광에서는 유럽에서도 자동적으로 혁명으로 터져서 이 혁명에 대한 교훈들을 이론적으로도 되새길 시간마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 같다.

그러니 현재까지에도 사태들로는 노동계급혁명들을 지도하는 정당들 없이는 혁명 그 자체로는 할 수 없다는 걸 입증했다. 노동자들은 자생적인 봉기들로부터 국가권력들을 장악할 수 없다. 고도로 공업화되었으며 고도에 문화적인 수준마저도 누렸던 독일에서조차는 1918년 11월 노동자들에 자생적인 봉기로는 권력들을 자본가계급들에게 넘겨줬을 뿐이다. 한 유산계급들은 다른 유산게급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 자신들에 부와 문화적 수준 그리고 국가기구 내에서는 수 많은 연줄들로부터 정치적 행동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들은 자신들에 혁명정당들 없이는 절대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겠다. 1921년 중반이 되어서야 '대중들을 획득하라', '공동전선들을 수립하라' 등들에 구호를 외치면서 각국에 공산당들을 조직할 수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10월혁명들로부터 제기했던 문제들은 뒷전으로 그저 밀려났고 동시에 10월혁명들에 대한 연구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작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동계급들에 혁명에 대한 문제에도 봉착했다. 모든 관계된 문서들을 수집하고 모든 할 수 있는 자료들을 출판하고 연구에 몰두해야 할 필요는 이제 더욱 절실해졌다! 



모든 나라, 모든 계급, 심지어는 모든 당들도 가혹한 경험이란 매질들로부터만 뭔가를 배운다. 이를 우리는 당연하게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 다른 계급, 다른 당들에 대한 경험들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에 대한 경험들을 거치기는 했지만 프랑스 대혁명, 1848년에 혁명들, 파리코뮌 등을 연구하지도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10월혁명들을 쉽게 성취할 수는 없었을거다. 과거 혁명들에서 제시했던 교훈들을 연역하고 이로부터도 혁명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들에 대한 논리를 확대하고 적용해보면서 우리는 러시아 혁명들에 '일국적' 경험들을 거쳤다. 10월 혁명 이후에는 닥친 반혁명 시기 전체를 보더라도 우리는 1905년에 교훈이나 의의를 연구하면서 견뎌나갔다. 그러나 승리한 10월혁명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진행되지는 않았다. 아니, 그동안 연구들에 들인 노력에 10분에 1도 10월혁명들에 연구에 바쳐지지는 않았다. 물론 우리는 현재에도 반동에 시기를 경과하고 있거나 망명객들에 처지를 놓여 있지는 않다. 현재에도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역령이나 자원들은 과거에도 어려운 시기에도 비하면 한없이 증대했다. 다만 현재에는 우리들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건 당이나 인터내셔널로부터 된 차워에서도 명확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하도록 10월혁명들에 연구들에 대한 필요성들을 제기했던거다. 왜냐하면 10월혁명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정치노선들에 대한 최상에 시험대로 되었으며 미래로 넓은 문들을 활짝 열어서 젖혔기 때문이다. 작년에 독일혁명들에서는 10월혁명들에 혁명연구들로부터 중요성들을 심각하게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절박하게도 경고했다. 

그러나 10월혁명에 대한 과정들에서도 가장 철저한 지식마저도 독일 공산당들에 혁명승리를 결코 보장할 수는 없었을거라는 반론들로부터 물론 제기될거다. 그러나 이런 유로부터 된 극히 속물적인 논리에는 우리에게는 하등에 도움마저도 되지는 못한다. 물론 10월혁명을 연구만 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 혁명들로부터 승리들은 확실하게는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조건들로부터 무르익었으나 혁명에 대한 법칙이나 방식들을 이해하고 있는 선지적이거나 결연한 당 지도부로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경우로는 얼마든지 있겠다. 작년에 독일에도 정확하게는 이런 경우였다. 이와 비슷한 상황들로부터 다른 나라에서도 반복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노동자혁명들에 대한 법칙이나 방법들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는 10월혁명에 대한 경험들로부터도 더 중요하고 깊이 있는 연구대상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을 비판적이고 아주 세세한 연구들로부터는 10월혁명들에 역사를 소화하는 일들을 아직까지는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1차 제국주의 세계전쟁들로부터 보여준 전략적·전술적·기술적 경험들을 연구하지는 못한 채로 현재까지도 새로운 전쟁들을 준비하는 총사령관과도 같다. 총사령관들은 필시로 군대들을 패배로도 이끈다. 당에서는 노동자 혁명들에 필수적인 도구들이다. 1917년 2월부터 1918년 2월까지는 단 일년에 경험으로부터만 그리고 핀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불가리아, 독일에 보충적인 경험들로부터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혁명 준비 작업에서는 즉각적인 권력쟁취 투쟁들로부터도 노선들을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당들은 필연적으로 위기를 겪을 수밖에는 없겠다. 일반적으로 말해서는 당내 위기는 전환에 대한 시초 또는 전환에 대한 결과로는 심각한 국면으로 조성될 때마다 일어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당 발전들에 모든 시기들로부터 그 나름대로에 특징들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활동 방식들이나 습관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술로에 대한 전환들에는 이 습관들이나 방식들로부터 어느 정도 단절된다는 걸 뜻한다. 바로 이 때문에 당내에 모든 갈등들이나 위기들에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발생한다. 1917년 7월 레닌도 이렇게 말했다. "급격한 전환에 대한 시기로 봉착하게 되면 진보적 정당들도 당분간은 새로운 상황에도 적응하지는 못한다. 이 결과로 과거에는 옳았으나 이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 구호들을 외치는 경우는 너무 자주 있었다. 과거에 대한 구호들은 이 경우에도 역사에 대한 급격한 전환들로부터 '갑자기' 닥친만큼이나 빨리 그러한 뜻들을 '갑자기' 상실했다." <슬로건들에 대해서>. 따라서 이러한 전환들이 너무나 갑자기 일어날 경우에는 그리고 지난 시기에 관성들이나 보수적인 활동방식들로부터도 축적되어서 당 주요 기구들을 지배할 경우에는,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이나 준비해왔던 결정적인 혁명들에 순간들에 당들은 자신들에 지도력들을 발휘할 수는 없게 된다. 그리고 당들은 위기들로부터 파괴되어지고 혁명운동들은 당들을 내러벼두고 멀리 앞으로 나아가서 패배로도 줄달음치게 된다. 혁명정당들은 다른 정치세력들로부터도 압력을 받는다. 발전들에 매 단계마다 당들은 이 압력들에 대해서 반격하고 저항하는 방식들을 개발한다. 그런데도 전술전환들에 시기로는 당내에는 분파들로부터 모였다가 흩어지고 갈등들도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들에도 대처하는 당들에 위력들로부터 약화된다. 이로부터는 당내분파들은 전술전환들에 필요성들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원래대로에 논란수준들을 넘어서서 다양한 계급들을 지지하는 버팀대로도 발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늘 항상 제기된다. 이걸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다. 자신들에 계급들에 역사적인 과업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당들에는 다른 계급들에 간접적인 지배도구로도 전락할 위험들도 있겠다. 현재까지도 말한 바로 모든 심각한 전술전환들에 경우에 적용된다면 전략적 대전환들에 시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군사학에 대한 비유를 빌려서 말해보면 정치에서 전술이란 개별적인 작전들을 수행하는 기술들을 뜻한다. 전략들은 정치권력 장악들에 대한 기술들이다. 일차세계대전 세계전쟁으로부터 일어나기 전에는 전술이나 전략도 차이는 없었다. 두번째 인터내셔널 시기에는 우리에게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전술개념들에도 갇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건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 사회민주주의당들은 의회전술, 노동조합전술, 시의회전술, 협동조합전술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모든 역량들이나 자원들을 결합해서는 적들로부터 승리하는 문제로는 권력장악들을 위한 투쟁들을 실제로도 조직하는 임무와도 관계되어 있다. 따라서 두번째 인터내셔널 시기로는 이 문제들은 결코 제기되지도 않았다. 이로부터 오랜 시간들이 흐른 후에는 노동계급들에 권력장악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들, 즉 전략적인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건들은 바로 1905년 혁명들이었다. 따라서 1905년 혁명들에 경험들은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곧 볼셰비키들에게 엄청난 강점마저 되었다. 혁명전략들에 대한 거대한 시기로는 1917년 러시아에서 먼저, 그리고 이어서 유럽전역에서 시작됐다. 물론 전략들은 전술들을 폐기하지도 않는다. 노동조합운동, 의회활동 등에 문제들은 소멸되는 거도 아니라 권력장악들을 위한 결집된 투쟁들에서도 종속되는 하위수단으로도 새로운 뜻으로 부여받는다. 전술들은 전략에도 종속된다. 전술전환들로부터 보통에 경우에도 당내갈등들을 유발한다면 전략전환으로는 얼마나 깊고 치열한 갈등들을 낳을건가! 그리고 노동계급 정당들이 선전, 조직, 선동 등 혁명준비작업들로부터 즉각적인 권력장악 작업으로 들어갈 때 매우 급격한 전환들로 이뤄진다. 단호하지도 못하며 냉소적이고, 타협적이고, 투항적이기만 한 당내에 모든 멘셰비키 분자들은 봉기에 반대하면서 공개적으로도 자신들에 모습들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합리화할 이론적 근거들을 먼저 찾는다. 그리고는 과거에 기회주의 조류들로부터 이미 완성된 무기를 찾아낸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미래에서도 최소한 한 번 이상으로도 보게 될거다. 



결정적인 투쟁들에 앞서 모든 역량들을 검토학고 선택하는 당들에 대한 마지막 작업들은 1917년부터 2월부터 10월 사이에도 이뤄졌다. 작업들은 대중들에 대한 가장 넓은 선동들이나 조직작업들로부터 기초로 진행됐었다. 10월이나 그 이후로는 우리들에 역량으로는 거대한 역샂거인 행위라는 용광로 속에서도 시험들을 거쳤다. 10월혁명마저도 끝난지 7년이나 지난 현재들에 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특히 러시아 혁명들에 대해서도 제출된 상이한 견해들을 평가하면서도 유독 1917년들에 경험들을 회피한다는 건 메마른 현학들에 빠져드는 거와도 같다. 이건 마르크스주의에도 입각한 정치분석들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로 수영해야할 사람들은 수영방법들을 시험해볼 강물들에 대한 시선들을 두기를 끈질기게 거부하면서도 여러 수영방법들에 대해서는 말싸움을 하는 거와 같다. 수영방법들을 효력들을 매우 잘 확인하는 방법들에는 직접 물에 뛰어드는 거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혁명들로부터 전개될 당시에는 드러난 온갖 견해들은 실제로도 어떻게 현실들에 시험을 거쳐왔는지를 확인하는 거보다도 혁명이론들을 검증하는 더 좋은 방법들은 없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고치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산계급들에 독재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만들어냈다. 엥겔스는 죽기 얼마 전인 1891년에 이 개념들을 단호하게 지지했다. 이 개념들은 무산계급들에 정치적 독재야말로 무산계급들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임을 뜻한다. 



카우츠키는 10년 전에 위와 같이 썼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무산계급들이 권력을 쟁취하는 유일한 형태로는 민주적 의회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다수를 차지하는게 아니라 무산계급들에 독재였다. 분명한 사실에는, 우리에게 과제가 단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하는 거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들을 무산계급들에 손에 온전하게 집중하고 예외적인 정권들이 지배하는 이행기를 둬야한다는 거다. 이 정권에서는 지배계급들로부터 이끄는 건 오랜 세월을 걸쳐서 도출한 일반적인 원리들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정책들에 고려이다. 


부분적인 변화들만 그저 일으키는 데 머물지도 않고 지배계급들에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면 오히려 독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합의라는 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힘만이 결정적인 요인으로만 작용한다. 물론 무산계급독재가, 특히 하위중간계급과 농민들에 대해서 별도의 합의나 상당한 양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산계급들로부터 이러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권력기구를 소유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주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양보할 부분이나 고집할 부분들을 독자적으로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들을 지녀야 한다. 


현재에 카우츠키는 무산계급들에 독재들로부터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압제'라며 무조건 거부하려 든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나라의 정직한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외양을 띤 착취자들에 독재를 묘사할 때와 한결같이 제시하는 특징들을 무산계급들에 혁명 정권에서 찾아낸다. 


카우츠키는 혁명적 독재라는 갠며을 포기함으로, 무산계급들로부터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를 향후 선거 캠페인에서 사회민주당이 과반수를 득표하는 문제로 둔갑한다. 의회주의라는 합법적 허구들에 따른다면, 보통선거권들은 국가 내 모든 계급들을 아우르는 시민들만을 나타내며, 그 결과로 국민 대다수를 사회주의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이론적일 수 있지만 실현되지는 않는 한, 사회주의 소수당은 지배계급들에 다수당들에게 복종해야한다. 의회 다수당이라는 이러한 물신숭배는 무산계급 독재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모조리 거부하는 짓들이다. 이론 상으로도, 사회주의 정책들을 다수당과 소수당이라는 의회주의 신화에 종속한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로부터 전파된 나라들에서는 혁명투쟁도 마찬가지로 할 수 없다. 스위스에서 보통선거권을 토대로 선출된 다수당들은 파업을 금지하는 엄격한 법률들을 통과하거나, 미국에서 형식적으로도 다수들에 의지로 선출된 행정부들이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할 경우, 스위스와 미국에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조직하여 저항할 '권리'들마저 있을까. 대답은 분명하게 '아니요'다. 정치파업들은 보통선거권들로부터 표출된 '국가의지'들에 가할 수 있는 초의회적인 형태들에 압력이다. 분명 카우츠키마저도 새로운 입장의 논리를 끝까지 고집하기는 겸연쩍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유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보통선거권을 행동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보기에도, 의회선거는 진정한 계급투쟁과 그로 인한 갈등, 반격, 공격, 반란의 역할을 한번도 대신한 적이 없다. 선거는 이러한 투쟁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역할은 때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물론 독재 시기에는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엥겔스는 죽기 얼마전인 1891년 무산계급독재만이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카우츠키 자신도 이런 주장들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따라서 무산계급들에 독재에는 순전하게 러시아에 창작물이라는 카우츠키에 주장들은 허황된 거짓말들이다. 그러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수단을 거부할 수는 없다. 투쟁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셀지로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해야 한다. 사회주의혁명에 독재, 곧,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가 필요하다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독재를 실현해야만 한다. 독재를 논하는 소책자를 쓰는데는 잉크와 종이, 그리고 머릿 속에 몇가지 생각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독재를 실시하고 굳건하게 하려면 지배계급들이 무산계급들에 국가권력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한다. 카우츠키는 눈물 어린 소책자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교훈마저 얻지 않았는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신망을 모두 잃었다고 해서 부르주아의 신망마저 얻을 수 있던가. 노동계급들에 지배를 보장하려면, 지배하는데에 익숙한 지배계급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게 있다. 음모, 태업, 폭동을 동원하거나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서 무산계급독재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지배계급들에게 복종을 강요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 성직자들은 사후의 형벌로만 사람들을 겁주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는 그런 수단마저 없다. 하지만 성직자들의 지옥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제나 민주국가의 처벌과 함께 종교재판소의 진짜 불이 이를 뒷받침했다. 카우츼가 자신의 후기 저작에서는 성령역할을 맡는 정언명령으로 지배계급들을 굴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과연 경도될 수는 있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데니킨과 콜차크의 영토에다 칸트의 인도주의를 전도하기로 마음먹을 경우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그곳에서라면 반혁명이 반드시 지리멸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6년 동안 전쟁을 겪으며 철저하게 단련되었을테니 말이다. 백위대 병사라면 누구나 일찌감치 깨달은 단순한 진리가 있다. 카우츠키의 책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를 전향시키기보다는 차라리 그를 나무에다 매다는 게 더 쉽다는 것 말이다. 백위대 병사들은 민주주의 원리에 대해서든 지옥불에 대해서든 미신적인 두려움이 전혀 없다. 성직자와 교사가 이들과 한패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들은 오로지 볼셰비키의 머리에만 벼락을 내리니 말이다. 여기에서도 러시아 백위대는 독일 등의 백위대와도 닮았다. 이들은 설득당하지도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러니 겁을 주거나 짓밟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테러리즘, 곧 단호한 무장 반혁명들에 대한 억압이나 위협적인 조치를 거부한다는 건 노동자계급들의 정치적 지배와 혁명적 독재라는 개념들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거부한다는 건 사회주의혁명을 모두 거부하고 사회주의의 무덤을 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에게는 사회혁명 이론이 하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들에 대한 자신의 비난을 일반화하려 해봐야 조레스주의와 베른슈타인주의의 편견들을 재탕할 뿐이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썼다. "1789년 일련에 혁명들은 잔인성과 폭력성을 낳은 가장 중요한 요인들을 없앴으며, 이후의 온 혁명들을 더 온건한 형태로 수행하도록 했다." 294쪽.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물론 1848년 6월이나 코뮌이 진압될 당시 일었던 공포는 잊어야 한다. 가차 없는 테러 수단들로부터 절대왕정이나 봉건제도, 교권주의를 무너뜨린 18세기 대혁명이 실은 사회문제를 더 평화적이고 온건하게 해결할 길을 닦았다고 치자. 하지만 순전하게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이를 인정하더라도, 우리를 비난하는 이들이 완전하게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절정에 이른 러시아혁명이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벌어진 바로 그 사건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우리의 선배가 혁명적 테러리즘을 동원한 이유는 우리가 혁명을 온건하게 수행하도록 민주적인 방식들을 제시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도덕주의자 카우츠키는 이런 상황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가 비난해야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선배들이다. 하지만 카우츠키는 이 방향으로는 다소 양보를 하는 듯하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군국주의를 폭력적인 방법들만으로도 뒤엎을 수 없다는 것을 도대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사람들이 염두에 둔 것은 피비린내나는 무장투쟁보다는 프롤레타리아만이 쓸 수 있는 노동자계급들의 무기, 즉 대중파업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차지한 후에 이중 상당수가 또 다시, 18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피 비린내 나는 분노와 복수를 자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는 그때까지도 이룩한 모든 진보들을 송두리째로 부정하는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320쪽) 우리의 가장 훌륭한 이론가들 머릿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전쟁과 일련의 혁명들을 겪고 나서였다. 카우츠키는 로마노프나 호엔촐레른 왕조를 대화로 물리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군국주의는 총파업으로, 즉 팔짱을 낀 평화적 시위로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전 세계마저 이를 논의했지만, 카우츠키는 분명 총파업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를 고집했다. 20년 전 카우츠키 자신의 잡지인 <노이에차이트>에 실린 구절들을 그에게 다시금 들려주고는 싶다. 총파업은 프롤레타리아들을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의 적인 국가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파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조차 없다. 적들보다도 프롤레타리아의 역량이 더 빨리 소진되는 탓에 노동자들이 조만간 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총파업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순간은 프롤레타리아와 적의 무장세력 간에 충돌, 곧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혁명적 봉기를 준비할 때뿐이다. 혁명계급은 자신을 향한 적의 의지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권력의 문제, 곧 모든 혁명의 근본문제마저 해결할 수조차 없다. 총파업은 양측을 다 동원하며, 반혁명 저항세력의 힘을 가늠해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이다. 하지만 혁명계급이 권력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피의 대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려면 무장폭동을 거쳐서 투쟁 단계에 반드시 들어서야만 한다. 물론 그 대가로는 피로 치러야 하지만. 권력을 쟁취하고 다지기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손에 피를 묻히기도 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아무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에 생사를 건 치열한 투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들이 "그때까지 이룩한 모든 진보를 송두리째 부정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위대한 이론가들의 머리를 바늘구멍 사진기들로 치부하는 꼴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에는 물체가 거꾸로 비치니 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전통이 확립된 선진 문명국에서도 카우츠키의 역사논증이 정당하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의 논증에는 전혀 새로울 것도 없었다. 예전에 수정주의자들이 그보다 더 이론적으로 제시한 바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민주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이 성장하면서 총파업과 봉기, 프롤레타리아독재 없이도 눈에 띄지도 않게 조금씩 사회주의로의 개량주의적이고도 진화론적인 이행들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만 애썼다. 카우츠키가 자신들의 활동에서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밝힌 바에 따른다면, 민주주의체제에서도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계급모순들은 접점 더 깊어지고 이 과정은 반드시 혁명과 프롤레타리아들의 권력장악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는 없다. 물론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적 봉기와 프롤레타리아들의 독재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또 생길지를 가늠해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유산계급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하는가에 따라서도 희생자 수가 달라지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카우츠키가 자신의 책에서 민주적 교육이 부르주아의 계급 이기주의를 약화시키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4년 동안이나 지속된 제국주의전쟁들이 도덕마저 타락하고, 사람들을 폭력 수단과 행위에만 익숙하게 했으며, 부르주아계급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인류를 대량살상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면 이 또한 옳다. 얼핏 보기에는 모두가 옳은 듯하다. 하지만 투쟁은 현실의 실제 상황에서도 벌어진다. 투쟁하는 두 세력은 바그너와 카우츠키의 논쟁에서 생겨난 모조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아니다. 실제 프롤레타리아가 실제 부르주아계급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들 세력은 최후의 제국주의 학살들로부터 탄생했다. 전 세계에도 퍼지는 무자비한 내전들을 바라보면서도 카우츠키는 이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숙련된 전술'들에서 벗어나 생긴 치명적인 결과라고만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운동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도 사회주의운동들은 한번도 크나큰 패배를 겪지는 않았다. 테러를 동원해서라도 승리를 보장하려는 생각에는 사회주의진영에서도 완전하게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의 지배적인 교의가 되면서부터는 민주주의가 서유럽에도 굳게 뿌리내렸으며, 여기에는 투쟁의 목표이던 민주주의가 정치생활의 든든한 토대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큰 영향들을 미쳤다." (318쪽) 이 '진보의 공식'에서는 마르크스주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조차 없다. 민주적 조건 덕에 새롭고 '더 현명한' 질서로부터 고통 없이도 이행할 수 있다고도 떠들어대는 마르크스주의 선전에는 계급투쟁과 물질적 충돌의 실제 과정들도 빠졌다. 이것은 가장 천박한 자유주의이며 때 아닌 18세기 합리주의다. 다른 점이라고는 콩도르세의 사상 대신 통속화된 <공산당 선언>이 들어앉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무수한 인쇄물로도 남는다. 이 '인문학적인' 과정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카우츠키의 닳아빠진 책상이다. 제2인터내셔널 기간의 노동계급운동은 마르크스주의라는 깃발을 든 저항들이 한번도 큰 패배를 겪지 않은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 노동자계급운동,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전체 인류문명이 1914년 8월에 엄청난 패배를 겪지 않았던가. 역사는 그 당시 사회주의 정당의 모든 힘과 가능성들을 기록해두었다. 우리가 듣기로 여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에 선" 마르크스주의였다. 하지만 이들 정당들은 파산하고 말았다. 이들의 업적 중에서는 카우츠키가 영원한 생명마저 불어넣고 싶어하던 특징, 곧 자기적응, '불법적인' 활동 거부, 공개적인 투쟁 거부, 민주주의로부터 고통 없는 혁명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제2인터새녀널의 정당들은 패배를 두려워하고, 대중들이 정면대결을 벌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는 총파업의 논의를 무력화함으로써, 절망적인 패배를 자초했다. 이들은 내전의 폭력적인 속성을 잘 보여주는 전조이자 세계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던 4년 간에 제국주의 학살마저 피하는 일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는 못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불명예스럽게 무너지고, 이를 이끌던 독일사회민주당이 수치스럽게 파산하고, 전 세계적인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광기와 내전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지금, 우리와 반대로 제2인터내셔널의 심오함, 충실함, 평화주의, 엄숙함을 확립하겠다면 눈뿐만 아니라 코와 귀까지도 다 막아야만 할 거다.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들은 아직도 철저하게 청산되지도 않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