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디키를 아시나요? 1974년 생으로 2012년 최고의 투수상인 사이 영 상을 수상한 미국의 야구선수입니다. 야구선수로서는 전성기를 훌쩍 넘긴 38살의 나이에 20승 6패 233⅔이닝, 230탈삼진, ERA 2.73을 기록하며 명실공히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게 된 것이죠. 여기까지만 본다면 디키의 젊은시절은 더욱 빛났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 대부분은 무명에 가까웠습니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팀을 옮겨다녔죠. 사실 그는 촉망받는 투수였습니다. 대학시절 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되기도 했고 신인 드레프트에서 18번째로 지명되었죠. 하지만 시련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신체검사 결과 오른팔 인대가 없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죠. 시속 140후반에서 150초반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였던 그는, 부상 이후 눈에 띄게 시속이 저하되었고 서른이 넘어 새로운 도전을 선택합니다. 바로 '너클볼'을 던지는 것이죠. 시속은 느리지만 어디로 날아갈지 예측할 수 없어 마구로 불리는 너클볼을 연마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노력과 배움을 향한 열정, 그리고 3명의 전설적 너클볼 투수와의 만남 덕분에 자신만의 너클볼에 눈을 뜨고, 끝내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도전'과 '성장'의 과정에서 디키가 손에 꼽는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심리상담을 통해 자신을 똑바로 마주본 것이죠. 사실 디키는 어린시절 베이비시터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적이 있습니다. 동네 불량 청소년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했죠. 어린 디키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기억을 묻어두었습니다. 상처와 수치심으로부터 회피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된다면 실망할거라고 걱정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끝내 그는 그 모든 죄책감과 수치심을 털어놓고 정면에서 마주봅니다. 오랜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게 된 것과 투수로서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게 된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우리는, 치유하는 인간입니다
누구나 삶에서 한 번 쯤은 마음같지 않은 시절을 보냅니다. 디키가 그랬듯, 오래된 상처와 수치심 때문에 고통받기도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심리상담을 통해 자유와 기쁨에 다가설 수 있을까요? 저 역시 심리상담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큰 도움을 받았죠. 주변에 상담을 고민하는 지인이 있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함께 좋은 상담기관을 찾아나설 것입니다. 하지만 상담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 부담스럽다거나, 상처와 고통에 직면하는 과정 자체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시간과 비용이 문제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우리가 직접 힐러가 되는겁니다. '치유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글쎄요, 애초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기도 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며 학대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네,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애초부터 '치유의 본능'을 지닌, '치유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화가 나면 내면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고, 창피를 당하면 세상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여기는, 비합리의 함정에 빠진다. 나를 향한 가혹한 판단을 내려놓으면, 내 안에 있는 분노나 수치심도 그저 수만 가지 느낌 중 하나로 여길 수 있게 된다. 고통과 불편함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그 농도가 옅어진다.
책 <치유하는 인간>은 우리가 가진 '치유하는 힘'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누구나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지만, 누구나 치유하고 회복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 모든 과정에서 '영적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상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입기 전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나와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야 하며,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연습해야 하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이자 심리학자인 권수영교수는 holding, empathy, epoche, acceptance, lamentation, intimacy, network, growth의 8개 챕터를 거치며, 치유를 위한 태도와 지식과 기술을 풀어놓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치유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8개 챕터의 앞글자를 따면 이 단어가 완성됩니다. 바로 HEALING이죠. 저 역시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힐링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야박하게 굴었는지를 자각했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를 온화하게 수정했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마주볼 때 진심으로 대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세 개의 키워드를 소개하며 글 마치겠습니다. 바로 공감, 수용, 성장입니다.
첫 번째 키워드: 공감 "해결하려 들지 말고, 감정과 함께 머물 것"
89 진정한 공감을 위해서는 우리가 미리 판단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상대방의 마음의 웅덩이에, 그 고통의 자리에 서서히 발을 디디려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첫 번째 키워드는 공감입니다. 저자는 '2장 empathy-감정의 웅덩이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법'에서 '동감'과 '공감'을 비교하며 공감의 의미를 선명하게 합니다. 먼저 동감은 'sympathy'에 가깝습니다. 본래의 뜻을 파고들다 보면 '고통'에 이르게 되죠. 웅덩이에 빠진 사람과 '같이 고통을 느낀다'가 sympathy의 의미입니다. 함께 고통을 느끼기에 도와주고 싶고, 막대기 같은 것을 내밀어 웅덩이에서 꺼내주고자 하는 것이 sympathy의 태도입니다.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어주다니, 물론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위에 있는 시혜자이며, 도움을 받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수혜자라는 느낌이 들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은 불편함과 거리감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반면 공감은 'empathy'에 가깝습니다. 본래의 뜻을 파고들면 '고통 안으로'라는 의미가 되죠. '동감'의 태도가 웅덩이 밖에서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반면, '공감'은 웅덩이에 직접 내려가서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경험합니다. 잠깐, 너무 비효율적인 것 아닌가요? 누군가가 웅덩이에 빠져있다면 도구를 써서 구해주는 것이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문제해결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물론 그럴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신속한 문제해결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성적이 안나와서 토라진 아이에게 "공부하면 되겠네"라고 말한다면, 마음이 풀릴까요? 연인과 헤어지고 아파하는 친구에게 "잊어버리고 다른사람 만나"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나아질까요? 본질은 공부나 이별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웅덩이에 빠져버린 우리의 '마음'이겠죠. 필요한 것은 고통 안으로 들어가 함께 머물러주는 것입니다. 수학 문제가 안풀려 불안해하는 아이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떤지 묻고, 자존심이 상함을 알아주고, 그 안의 열등감과 수치심을 털어놓고 해소할 수 있도록 함께 머물러주는 것이죠. 차근차근 함께 상대방의 마음 밑바닥까지 내려가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감'의 태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주변사람들에게 꽤나 잘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털어놓는 친구들이 많았죠. 그런데 정작 저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정적 감정이 섞인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듣는이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망설였죠. 나에게 실망할것이라는 걱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R.A 디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면 나 자신이라도 나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텐데 그마저도 못했습니다. 늘 스스로를 검열하고, 비판하고, 다그쳤죠.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을 공감해보려 애썼습니다. 웅덩이 밖에서 나를 비판하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웅덩이에 함께 머물며 차근차근 밑바닥까지 내려가보았죠. 과거의 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더군요.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속상했었더군요. 그런 나를 보니 더 이상 비판하고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공감을 통해 자연스레 이해와 수용에 이르게 되었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습니다. 과거의 내 행동과 결과를 판단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기에 앞서서, 그 날의 내 감정을 공감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나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대하며, 섣불리 동감으로 해결하려 나서기보다는, 한걸음 한걸음 마음의 바닥까지 함께 걸어가 진심으로 공감하며 치유의 손길을 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 수용 "모든 경험과 감정을 기꺼이 끌어안을 것"
132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마라. 무슨 뜻일까. 불가에서 전하는 유명한 격언인데, 첫 번째 화살을 신체적인 불쾌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은 마음의 불쾌감, 즉 심리사회적인 해석적 감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키워드는 수용입니다. '4장 accptance-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마라'에서 강조되는 키워드입니다. 배고픈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배부른 타인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에 절망하죠. 다른 한 사람은 오늘의 배고픔을 거룩한 소명으로 여기며 오히려 심리적으로 고양됩니다.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금식을 하는 수도사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행위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내적경험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너무 비교가 극단적이라구요? 배고픈 현실을 어찌 수도사의 자발적 금식중인 수도사와 비교할 수 있겠냐구요?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때때로 배고픔 그 이상으로 고통과 좌절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죠. R.A 디키가 과거의 수치심과 연이은 실패에 매몰되어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본연의 존엄을 외면했다면, 마운드에서 결코 당당하게 자신만의 공을 뿌리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겁니다. 현실만 그러한가요? 우리가 동경하는 히어로들은 어떤가요? 그들이 본래부터 강했던가요? 모두가 나름의 사연과 아픔과 좌절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나름의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극복하고 성장하고 승리하죠. 우리의 감동이 '막연히 강함'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함'에 더 극적으로 감응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현실의 삶과, 우리가 동경하는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경험할 모든 고통과 시련과 좌절을 진심으로 수용해야겠다고 말이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저는 더욱 강해지고 성장할테니까요. 그런 의미부여를 통해 나의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고, 희망과 더불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테니까요.
143 로저스는 심리치료에서 자신이 만나온 아동이나 성인 환자도 모두 소위 '조건부 자기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건 무슨 뜻일까? 한 개인이 어떤 조건을 갖추면 자신의 존재감이 올라가지만, 어떤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타인에게나 사회에서 저평가되고 말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이 챕터에서 소개된 '조건부 자기 존재감'이라는 개념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건부로, 특정한 조건을 갖춰야만 자신의 존재감이 선명해진다고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많은 돈, 좋은 차와 같은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며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 개념에 꽂혔냐하면, 저야말로 가장 강력한 '조건부 자기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 합격을 하여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 등의 '당위'에 묶여서 살아왔고 딱 그만큼 스스로를 검열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평가절하했습니다. 높은 '외적 기준'은 낮은 '내적 자아'로 이어졌습니다. 외부의 기준을 쫓다보니 나만의 기호와 취향과 신념과 가치는 모호해져갔죠. 흐릿한 자아는 회피성향으로 이어졌습니다. "하고싶다"보다는 "해도되나?"를 자문하며 쭈뼜거렸고, 망설이던 사이 새로운 경험과 만남과 인연의 기회는 멀어지고, 성장과 기쁨의 기회도 함께 놓치게 되었죠. 그런데 저는 왜 스스로를 평가하고 높은 기준을 제시했던 것일까요? 왜? 누굴 위해서? 당연히 저 자신이죠. 내가 좋은것을 얻고, 좋은 평가를 받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으로써 내가 편안한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검열하고 평가하고 비난하는 과정에서 부정적 정서를 느끼고, 기쁨의 경험을 놓치고, 성장의 기회를 빼앗음으로써 나 자신에게 '나쁜 것'을 주는것은 심각한 모순이죠. 좋은것을 주겠다며 독약과 칼날을 들이미는 셈이니까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던 겁니다. 내가 좋은것을 이룸으로써 나를 사랑하게 되는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에 나 자신에게 좋은것을 주고싶은 것입니다. 자기사랑은 이미 차고 넘칠만큼 충분했고, 그것이 머물 수 있는 나의 존재감 또한 이미 선명했죠. '조건부 자기 존재감'이 아닌 '무조건적 자기 사랑'으로, 사랑하는 나 자신에게 기쁨의 경험과 성장의 기회를 아낌없이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세 번째 키워드: 성장 "비로소, 거기서부터 시작할 것"
287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쓴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상처가 생명의 숨으로 변화되는 것이 영적 성장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키워드는 성장입니다.'8장 growth-자신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거라는 사람에게'의 중심 키워드입니다. 8번째 챕터에서 소개되는 키워드로 이 책의 종착점이기도 하죠. 저자가 미국에서 임상훈련을 받던 시절, 아내의 외도로 고통받는 남성의 상담을 맡게 되었습니다. 트라우마의 늪에 빠져 가만히 TV를 보다가도 아내의 외도가 떠올라 고통받던 남성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내가 외도를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죠? 어떻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상담을 받으면 그게 가능한가요?" 이에 저자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일단 가능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상담이 끝난 후 슈퍼바이저에게 조언을 구하며 저자가 물었습니다. "교수님, 저 대답 잘한 것 맞나요? ...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되는거죠?" 그러자 교수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해왔습니다. "무슨 소리? 당연히 못돌아가지!"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말인가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왜 애써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며 상담을 받아야 할까요? 네,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수용'과도 관계있는 이야기입니다. 슈퍼바이저가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해봐. 어떻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있어. 상담이란 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도록 돕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건을 수용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의연하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저자는 상처를 수용하고 의연하게 나아가는 것을 넘어서, '상처입은 자의 특권'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아갑니다. 역경 후에 우리는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합니다. 역경을 겪음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초월해서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진정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바뀌어갈 때 영혼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돌이켜보니 저 역시 애초부터 누군가의 고통에 잘 공감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최적의 해결방법을 찾아주려 애쓰는 편에 가까웠죠. 앞서 말한 '동감'의 태도였습니다. 그렇게 문제라는 방정식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최적해를 도출하고 나면, 잘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우쭐하기도 했었죠. 타인의 고민에 진심으로 공감했다면 느낄 수 없었을 감정니다. 하지만 오래된 교만이 꺾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찬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그 처절한 경험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죠.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누군가의 마음을 멋대로 단정짓지 않는 태도입니다. 모름지기 온 몸과 마음을 다 하는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얻을 수 없을, 소중한 영적 지혜일 것입니다.
우리의 회복과 성장을 위하여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을 치유하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상황에 흔들리고 좌절하고 상처받지만, 무력했던 스스로를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 번째 화살을 쏘아붙이죠. 그러니 나 자신에게 상처주는 것 또한, 나 자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 자신을 치유하는 것 또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조건부 자기 존재감'이 아닌 '무조건적 자기사랑'으로 나 자신을 온전하게 안아주고,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내 감정의 밑바닥에서 나와함께 울어주는 공감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된다면 잘 되는대로, 잘 되지 않는다면 잘 되지 않는대로 우리에게 경험이 되고, 의미가 되고, 치유와 성장의 기회가 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고통과 불안에 마음이 조급해진다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서툴지만 분명하게,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애초부터 우리는, 치유하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요.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성실하게 읽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