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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법철학 - 상식에 대항하는 사고 수업
스미요시 마사미 지음, 책/사/소 옮김 / 들녘 / 2020년 12월
평점 :
목숨을 파는 것도 자유일까?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목숨을 팝니다>에는 자신의 목숨을 판매하려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추악함과 삶의 허무함에 환멸을 느끼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이후, 신문에 광고를 게재합니다. "목숨을 팝니다. 좋은 목적에 사용해주세요."라고 말이죠. 그러자 각가지 사연을 지난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목숨을 팔지만, 운없게도(?) 연달아 맡은일에 실패하게 되어 돈이 쌓여가고,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독특한 발상이죠? 현실에서 이런일이 가능할까요? 목숨계약은 커녕 신문사에서 부터 거절당할 것입니다. 복잡한 법적 문제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판매하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을 때의 사회적 파급도 고려해야죠. 이런 식상한 근거들 말고, 새로운 접근은 어떨까요? 이를테면 "현재의 자신은 장래의 자신에게 타자이기 때문이다."처럼 말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함부로 제약할 수 없듯,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있어 타인이라면, '미래의 나'의 자유를 제약하고 목숨을 끊는 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요?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다르다고요? 그렇습니다. 오늘의 결심은 하루가 멀다하고 흔들립니다. 뱃살과 몸무게가 이를 증명하죠. 논리적 비약이라고요? 그렇다면 기간을 길게 잡아보면 어떨까요? 한 달, 1년, 10년. 몸과 생각과 가치관과 신념이 달라졌을 오늘의 여러분을, 10년 전의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타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언제든 생각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결심만으로 목숨을 파는 계약을 맺는 것은, 타인의 목숨을 놓고 멋대로 계약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 데이빗 흄, 막스 슈티르너 등의 철학자들은 "자기동일성은 환상이다."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므로 어제 빌린 돈을 오늘 갚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했던 철학자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어때요, 그럴싸한가요? 그렇다면 위험한 법철학의 세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철학이라는 돋보기로 법을 들여다보기
8 본래 철학이란 기존의 앎을 철저히 의심하고 '존재하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사고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상식을 다시 묻고, 확신을 따져 묻고, 진리의 탐구로 향해 간다. 법철학은 법률에 대해 그러한 사고를 들이댄다.
<위험한 법철학>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철학'이라는 돋보기로 '법'을 들여다보며 의심하고 탐구하고 비판합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지켜져야 할까요? 자발적인 매춘은 해도 될까요? 클론인간을 만들어선 안되는 이유는 뭘까요? 고소득자의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은 정의로울까요? 법률에 따를 '도덕적 의무'는 존재할까요? 자유의사로 장기를 파는 것은 금지되어야 할까요? 이처럼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들을 날카롭게 파고들며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 당연한거 맞아?" 때로는 냉철하고, 때로는 재치있고 법의 상식을 파고드는 과정은 독자에게 '사유'와 '성장'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법을 의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자유'입니다. 법은 사회 문제의 최종적 해결수단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 훨씬 변칙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죠. 법을 의심하고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살아가는 힘'을 갖출 수 있습니다. 무작정 규칙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의 머리로 직접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더욱 강력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같은 존엄성, 다른 결론?
가장 인상적이었던 파트는 '제2장.클론인간의 제작은 NG인가?-자연법론 vs 실증주의' 중 '인간의 존엄'을 다룬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헌법 제10조를 참 좋아합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조문입니다. 저의 존엄이 존중받기를 바라고,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따라서 타이인의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존중하고 존엄을 지켜주려고 노력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존엄'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소 모호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죠.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법철학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같은 '존엄'에서 어떤 의미를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해석과 판단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책 68페이지에서는 '자발적인 매춘은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라는 주제로 법에 철학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먼저 매춘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춘 행위가 신체를 성적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깎아내리는 것이며 이는 인간 안에 있는 '존엄'이라는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매춘을 해도 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역시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존엄하므로 타인에게 간섭당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으로 사고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존엄이라는 가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에 인간이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인간이 존엄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기에 주체성을 갖고 행동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전자는 존엄을 지켜야 하기에 매춘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후자는 인간은 존엄하기에 스스로 자유롭게 매춘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같은 개념에서 다른 의미를 도출하고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이쯤에서 떠오른 사건이 있었는데요,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입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문에서 발견한 위험한 법철학
곧장 판결문 검색해 보았고 어렵지 않게 전문을 내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컨트롤+F를 누르고 빈칸에 두 글자를 입력해 넣었습니다. 존엄. 역시나 그랬습니다. 25개가 뜨더군요. 그리고 역시 흥미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헌법불합치 판결의 근거 첫 줄입니다. 헌법 제10조 1문의 '존엄성'으로부터 '자기결정권'을 도출합니다. 낙태죄가 여성의 존엄성,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해당 법률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반대의 주장도 살펴볼까요? 합헌 판결의 근거를 서술하는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고유한 가치를 가지며,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역시 존엄입니다. 이번에는 태아의 존엄, 생명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달랐죠.
<위험한 법철학>의 존엄이 하나의 개념에서 다른 해석을 펼쳤다면, 헌재 판결문은 하나의 개념을 다른 주체에게 무게중심을 둠으로써 다른 판단을 이끌어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전문을 천천히 읽다보면 위험한 법철학에서 보았던 접근법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헌법불합치의 경우 존엄에서 자기결정권을 이끌어내 강조하고, 합헌의 경우 존엄에서 생명권을 이끌어내 강조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래저래 책에서 읽은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고 발견하는 과정이 참 흥미롭고 신선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 힘'을 위하여
<위험한 법철학>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상식을 철학의 논리로 뒤집어보는 '새로운 관점'의 발견이었습니다. 흥미롭고 신선했죠. 한편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저의 이성과 논리도 조금은 성장한 것 같아서 기쁩니다. 법은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 당연히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법이 영원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마땅한 논거를 갖추지 못하거 있거나, 마땅히 폐지 및 수정되어야 할 근거가 있다면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겠죠. 나의 권리가 옳지 않은 법률에 의해 침해받는 일이 발생한다면 철학과 논리의 칼을 빼들고 맞서 싸울 필요도 있을것입니다. 한편 꼭 법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태도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관습'과 '질서'의 이름으로 부조리한 규범을 강요당할 때 입니다. 언제나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의심이 무기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자유의 힘'을 갖추기를 바라는 분들께 <위험한 법철학>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