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티컬 씽킹 - 비즈니스에 날개를 달아줄 비판적 사고와 표현 기술 글로비스 MBA 시리즈 1
글로비스 경영대학원 지음, 하진수 옮김, 홍성수 감수 / 새로운제안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주기적으로 서평을 작성하기 시작한지 1년이 넘어가지만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책은 오히려 나에게 큰 울림을 준 반가운 책이다. 영감과 재미와 성장의 씨앗을 거침없이 뿌려준 고마운 책이다. 생각의 텃밭 이곳 저곳에서 싹을 틔우는 아이디어의 뿌리는 영토의 경계짓기를 난감하게 만든다.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는 아이디어의 줄기와 가지는 공간의 경계짓기를 곤란하게 만든다. 생각의 경계를 지으려다 생각에 압도된다. 이럴 때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걸 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맺어야 하나.." 글을 쓰다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흐름을 잘 탄다면 선순환이겠지만 자칫 정신을 놓았다가는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게 된다. 그동안의 글들은 그 언저리 어느 지점에선가 나름의 언어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다소 아쉽기도 창피하기도 한 글들을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의 글이 '성장'의 '과정'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 '과정'의 어느 날, 마인드맵을 만난것은 정말이지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핵심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개념과 생각과 감정과 성찰과 의지가 헤쳐모였다. 또렷한 실체가 없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사유의 무더기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경계가 그려지며 나름의 틀도 잡혔다. 마인드맵과 친해진 이후로 나의 생각도, 나의 글쓰기도 '일'로부터 '놀이'를 향해 조금씩 다가설 수 있었다.

'로지컬 씽킹'을 넘어 '크리티컬 씽킹'으로

27 논리적 사고(기법과 체제)와 올바른 사고를 위한 자세(마음가짐)를 갖춤으로써, 비즈니스에서 만사를 타당한 방법으로, 타당한 수준까지 사고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 책 <크리티컬 씽킹>은 '생각'에 관한 책이다. 당면한 문제에 맞서서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며 현명한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한, '제대로 사고하는 방법'을 담고 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주제의 책들은 이미 시장에 더러 출시되어 있다. 이른바 '로지컬 씽킹'이다. 논리적 사고는 중요하다. 주어진 조건 하에서 타당한 사고과정을 거쳐 최적해를 도출하는데 '논리'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일반적인 비즈니스 상황에서 정답은 하나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마다 사고의 전제와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중요한 것이 '객관성'이다. 저자는 '논리적 타당성'과 함께 '객관성'을 고려하는 자세가 중요하며, 이에 '로지컬 씽킹'을 넘어선 '크리티컬 씽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리티컬 씽킹의 뼈대, 세 가지 기본자세

31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몇 가지 테크닉만으로 반드시 좋은 결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자세(마음가짐)라는 뼈대가 제대로 잡혀야 비로소 테크닉의 진가가 발휘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크리티컬 씽킹의 구체적 방법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크리티컬 씽킹의 세 가지 기본자세'부터 짚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기술'에 앞서서 '태도'부터 다룬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자신과 상대의 사고 습관이 다를 수 있음을 의식하기'였다. 목적이 '내가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전제는 필요 없다. 하지만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제나 나의 생각이 최선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편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열린 마음으로 상대와 이야기하게 되고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크리티컬 씽킹의 목적은 상대를 비판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p.35)는 저자의 말은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때때로 감정이 치우쳐 편협해지곤 하는 나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알아차리며 되새기도록 만들었다.

이 책의 장점: 능동적 읽기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능동적 참여'이다. 분명하게 나눠진 목차, 구체적인 실전 사례들, 챕터별 실전테스트, 챕터별 요약, 최종 실전테스트 등의 연습 기회는 독자로 하여금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독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좋은 느낌은 오랜만에 경험해본 독서의 기쁨이었다. '크리티컬 씽킹의 세 가지 기본자세' 중 또 하나가 바로 '목적을 늘 의식하기'다. 이 태도는 책의 저술에도 일관되게 적용되었다고 느꼈다. 구조화된 서술 체계는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높였다. 분명하고 흥미로운 읽기였다.

나의 '분명한 생각'을 위하여

26 핵심은 문제가 눈앞에 닥쳤을 때 곧바로 답을 내지 말고, 차분히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어 사고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해, 타당한 방법으로 타당한 수준까지 사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듯한 느낌을 받았던 시절이 있다. 생각의 촛점을 맞추는 방법을 상실한 듯한 느낌은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나름의 극복을 이뤄낸 지금, '생각'은 나에게 있어 '분명한 생각'은, '실용'보다는 '기쁨'과 더 가까이 있다. 크리티컬 씽킹의 세 가지 기본자세와 세가지 방법론을 체득할 것을 다짐한다. '분명한 생각'이 열어줄 풍성하고 지혜로운 삶의 가능성을, 그 모든 과정 자체에서 만날 기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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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다이어리 북노트 LOGOS : 신은 죽었다의 니체 랩소디 3년 다이어리 북노트 LOGOS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 starlogo(스타로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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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는걸까? 각자의 이유로 글을 쓰겠지만 나는, 글을 쓸 때의 해방감이 좋다.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헤아려 줄 때의 따뜻함처럼, 나 스스로 나의 내면을 돌아보며 돌봐줄때의 가벼워지는 느낌이 좋다. 일기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끈적하게 들러붙어서 나를 휘두르던 경험과 감정이 글로써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더 이상 나 자신과 결합된 기억이 아니게 된다. 관조하며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지나온 삶을 담대하게 돌아보고, 다가올 삶을 강건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을 나는 '쓰기'로부터 얻고는 한다.

한 철학자가 있다.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삶은 스스로의 의지로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듯 창조해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의 격언과 함께하는 일기쓰기는 어떨까?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다듬으며 미래를 창조해가는 과정에서, 든든한 벗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 유명한 전복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하는 일기쓰기다.

<3년 다이어리 북노트-신은 죽었다의 니체 랩소디>는 보통의 다이어리와는 다른 다이어리다. monthly도 없고 weekly도 없다. 다만 하루 당 3줄의 기록공간이 주어진다. 그 아래에는 다음 해 오늘의 3줄이, 그 아에는 다다음 해 오늘의 3줄이 주어진다. 이처럼 오늘의 기록을 남기여, 1년과 2년 전 오늘의 기록을 자연스레 훑어볼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목표를 이루는 데 3년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구성이다. 이처럼 매 해의 성장을 비교해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다이어리의 가장 큰 특징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니체의 격언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니체의 격언을 필사할 수 있는 전반부와 다이어리를 기록하는 후반부로 나눠진다. 니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니체의 격언을 필사하며, 다이어리를 쓰는 과정에서 매 해의 변화를 돌아보며, '성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재미있는 다이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24시간 중 무엇을 3줄에 채우는 것이 좋을까? 역시나 '성장'이 떠오른다. 오늘의 가장 큰 도전, 성장, 변화를 1~2가지씩 기록해보려 한다.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덧붙여보려 한다. 그리고 의지가 고갈될 조짐이 보일때면 전반부의 격언을 필사하며 생의 에너지를 보충해볼 계획이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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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을 사랑하는 법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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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무력감과 허무함에 빠졌던 적이 있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속에 자신감은 곤두박질쳤고 의지는 바닥났다. 고통스러웠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 고통을 감수하고 있을까? 나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였다. 흐리멍텅한 눈에 미친 세상은 결코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나의 세계가 고통이었으므로, 고통의 필터를 거쳐 드러난 세계가 어두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고통스러웠고, 삶은 그 고통을 감수할만큼 가치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력했고 삶은 허무했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다. 고통의 무의미다

끝이 없어 보이는 터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두갈래였다. 스스로 힘을 갖추거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전자를 택하기에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남아있는 의지를 겨우겨우 긁어모아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철학에서, 종교에서, 과학에서, 사회학에서, 위대한 거인들이 손을 내밀어줬고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니체를 만났다. 그가 말했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라고. 오히려, 운명의 평탄을 바라지 말고 가혹할 것을 바라라고. 위험하게 살아가라고.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우라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했던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나 고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통을 직면하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옅어져갔다. 지금의 나는 끝이 아닌 교량이며, 오늘의 나는 극복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 길을 열어준 두 관문이 이진우 교수님의 EBS강의, 그리고 박찬국 교수님의 '초인수업'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이 초인수업의 개정판이다.

고통의 승화, 삶을 위한 철학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는 니체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철학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삶을 위한 철학, 특히 지금 이 순간 고통스러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을 모든 이들을 위한 철학책이다. 고통에 빠진 이들을 위한 책들은 사실 많다. '힐링'과 '위로'는 요즘 시대의 주류 키워드다. 그런데 왜 니체가 필요할까? 니체 그 자신이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병약한 몸은 평생동안 신체적 고통을 안겼으며, 루 살로메와의 사랑도 실패했다. 저작들 역시 살아생전에는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며 조금 유명해질 무렵, 45세의 나이에 광기에 빠져 10년동안 병상에만 누워있다가 죽게 된다. 그에게 철학은 책상머리의 이론이 아니었다. 삶 그 자체였다.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세계를 정교하게 구축해낸다. 힐링도 중요하고 위로도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품을 벗어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고통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 모두가 미워하는 그 고통이, 결국 자신을 고양시키며 심원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마주했다는 것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처럼 위대한 관점전환을 위한 10가지의 질문을 담고 있다. 삶과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모든 분들께,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진정한 자신에 이르기 위한 지혜를 얻는, 소중한 희망의 여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유? 숙명? 사랑! 운명애!

81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운명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이용하고 승화시키라는 철학입니다. 특히 그는 고난의 운명이야말로 한 인간이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절호의 조건이라고 보았습니다.

81 악-가장 생산적인 최선의 인간이나 민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자문해보라.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들이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제대로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운과 저항, 증오, 질투, 불신, 고집, 냉혹, 탐욕, 폭력은 덕의 위대한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덕의 성장을 위해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운명에 대해서 세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첫째, 극단적 자유의지의 철학이다. 운명은 존재하지 않으며 노력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얼핏 희망적이며 명랑한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니체는 이를 '단죄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잘못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의 결과에는 그보다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한다. 애초에 출발선부터 공정하지 않은 경우들도 존재한다. 이에 반대의 태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둘째, 숙명론이다. 나의 영향력은 극소로 잡고 그 외의 영향력을 압도적으로 크게 설정하는 것이다. 나의 힘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없고, 오로지 주어진 운명에 따를 뿐이라는 일종의 패배주의적 태도다. 니체의 철학은 이 둘과 다른 영역에 위치해있다. 셋째, '운명애'다.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역경과 고통이 들이닥치더라도 성장의 계기로 활용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진취적 태도다.

돌이켜보면 나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태도 사이에서 부유했던 것 같다. 강력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자신하며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다가도 나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마주할때면 "역시 난 안돼"라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치가 그렇듯이 세상은 그렇게 극단적인 곳이 아니다. 나는 전능하지 않으며 나는 무력하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것과 그렇지 못한것의 경계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 앞에서 분노하며 좌절하는 경우 무력감이나 수치심에 휩쌓여 도망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계를 인정할 경우, 내일의 극복의 가능성이 열린다. 모든 성장은 직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째, 도망치지 않아야 하고 둘째,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 직면이다. 그런데 실패를, 한계를, 고통을 직면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랑할 수 있다면? 나의 취약성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변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운명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수레바퀴는 얼마나 힘차고 아름답게 돌아가게 될까?

기꺼이, 반갑게 의심할 것. 그렇게 자유로워질 것.

167 정신의 강함, 정신의 힘과 정신의 넘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와 관련된 근본적인 모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시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확신'의 부족이었다. 보편적 가치가 붕괴된 나는 나만의 가치를 찾고자 애썼다. 해야만 '하는'일이 아닌 하고 '싶은'일을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낙타처럼 살아온 내가 자발적 의지에 불을 붙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위대한 학자들의 세계을 그대로 빌려오며 숟가락을 얹어보려고도 해봤다. 오! 하게 만드는 시선의 새로움은 잠깐의 믿음을 틔웠지만, 이내 의심으로 뒤바뀌었다. 하루가 다르게 뒤바뀌는 모래알같은 신념체계는 도저히 공고화될 수 없을것처럼 보였고, 이내 망설임과 주저함과 회피와 선택장애로 이어졌다. 회의는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약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니체는 관점을 뒤집는다.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확신이 감옥이며, 회의가 곧 해방이며 자유라고 말한다.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렇다. 준칙이 주어지고, 그 명령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해진 준칙이 없이, 내면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춤을 추듯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것 아닐까? 나는 어떤 신념을 기대했던 것일까? 누구로부터 무엇을 승인받으려고 했던 것일까? 자유의 기쁨이 아닌, 책임회피의 안전을 갈구했던 것은 아닐까? '신'이라는 종교를 믿지 않는 척 하면서도, '도덕'과 '당위'라는 종교의 우산 밑으로,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디오니소스적 삶을 위하여

197 사람들을 삶에 보다 충실하게 만들고, 모든 비극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게 만들 정도로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 비극 예술을 포함한 예술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197 니체는 "비극적 예술가가 전달하고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상태는 가공할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고귀한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비극은 "강력한 적, 커다란 재난,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용기와 침착함-이렇게 승리감으로 충만한 상태"를 표현하고 전달합니다.

199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삶에의 의지-이것이야말로 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비극 시인의 심리학에 이르는 교량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공포와 연민을 격렬하게 방출함으로써 그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해석했지만-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의 영원한 기쁨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파괴에 대한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연극을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온 몸의 신경을 끌어들이는 특유의 몰입감이 마음에 든다. 자극에 민감하고 감각에 예민한 탓에 쉽게 산만해지는 나를 온전한 몰입으로 이끄는 몇 안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연극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나의 이와같은 몰입감을 좋아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도취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특히 디오니소스적 도취는 대상과 일체가 되면서 함께 변형하는 과정을 거친다. 비극에 대한 일체적 도취를 통해서 삶을 긍정할만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견해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시기에 우연히 자그마한 낭독극을 보러갔던 경험이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던 공연의 말미에서 기대치 않은 몰입을 경험했고 굉장히 고조된 상태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뭐였을까? 좌절과 고통속에서 무력감에 빠진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의 감정을 공감받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인상적인 변화는 그 후에 나타났다. 돕고 싶었다. 주인공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어졌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의지를 북돋아주고 싶어졌다. 감정에 도취되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걸까? 아마도 그 대상은 연극의 주인공임과 동시에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고통을 무대에서 마주보는 과정에서, 나의 고통역시 곁눈질로나마 직면하고, 그런 나를 스스로 돕고 싶은 의지가 어설프게나마 피어올랐을 것이다. 고통의 정화가 아니었다. 고통을 딛고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고통은 더이상 나에게 있어 악이 아니다. 나를 강하게 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무대는 일상을 닮았지만 일상도 무대를 닮았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고 자긍심과 자부심은 쉽사리 흔들린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남들은 쉽게 처리할만한 일 앞에서 허둥지둥 헤매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삶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느리지만 분명하게 애쓰고 있는 어리숙한 누군가를 본다. 비난하거나 비웃기는 커녕 격려하고 지지하고 돕고 싶어지는 나의 마음을 본다. 그 누구라는 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춰본다. 내가 희곡작가라면, 내가 연출가라면, 결코 그를 방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의 유희가, 예술가의 권리가, 예술가의 책임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될 수 있는 최선의 자신으로 고양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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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들을 위한 진리 탐구 - 우주물리학과 불교가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
오구리 히로시.사사키 시즈카 지음, 곽범신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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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의 목록을 정리하다보면 '요즘의 나', 혹은 '본질적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을 느낀다. 이러한 작업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삶을 기쁨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힌다. 작업 그 자체만으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의 나에게 가장 의미있는 작업 중 하나다. 그런데 나의 '기쁨 목록'에서 언제나 최상단에 위치하는 기쁨이 있다. 바로 '아하!'의 기쁨이다. 호기심을 갖고, 그 호기심을 해결하고, 거기서 새로운 호기심을 뻗어나가는 지적유희의 놀이가 주는 기쁨이다. '앎'과 '기쁨'은 나에게 있어 결코 떨어트려 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나에게 하나의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는 찬스가 생긴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것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물리학자와 불교학자가 함께하는 존재론적 탐구
9 세상의 올바른 모습을 비춰준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현대물리학의 흐름과 석가의 사상은 같은 뿌리로 이어져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학과 종교의 만남'이라 하면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분도 많겠지요. 그렇지만 예를 들어 영혼의 존재나 사후세계와 같은 문제는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우리들의 고통을 없애줄 길은 그러한 문제와는 무관할 테니까요.
 '편견이나 선입관이라는 가림막을 제거하고 세계를 가능한 한 올바르게 바라봄으로써 고통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과 불교의 공통점이 아닐까 합니다.

되짚어보면 '존재론'적 탐구는 인류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늘 함께해왔다. 특히 '종교', 그리고 '과학'의 영역에서 말이다. 이 책 <지구인들을 위한 진리탐구>에서는 바로 이 과학과 종교가 만난다. 일본의 물리학자인 오구리 히로시와 불교학자인 사사키 시즈카가 대화를 나누며 각자의 진리를 풀어나간다. '1부-우주의 비밀은 어디까지 밝혀졌는가'는 물리학의 진리를 다룬다. 양자역학에서 우주론까지, 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진리의 세계를 풀어나간다. '2부-삶은 어째서 고통인가'는 불교의 진리를 다룬다. 사성제와 삼법인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에서 출발하여 윤회와 대승불교까지 범위를 넓혀간다. '3부-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앞서의 1, 2부에서 다뤘던 물리학과 불교의 이야기를 현실의 삶으로 끌어온다.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학문적 깊이를 바탕으로 두 석학이 풀어내는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의 갈증'에 빠져있는 나에게 유익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물리학+불교, 앎+재미
80 석가는 누군가의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닙니다. 석가 자신이 우주의 진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주의 법칙성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끔 언어로 표현했지요. 석가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겠습니다만,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석가는 과학자와 무척 흡사한 관점으로 살아간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익했다. 평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불교에 대해서 한층 깊이 알 수 있었다. 특히 다양한 불교 교리 중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간 점이 좋았다. '종교'를 넘어 '삶의 지혜'로서의 불교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맞춤형 불교풀이'였다. 물리학의 배움도 좋았다. 물질의 근원에서 우주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뉴턴역학과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을 만나볼 수 있었다. 블랙홀과 상대성이론을 다룬 챕터에서는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려보며 "그래서 그랬구나"라며 예기치 않은 이해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독서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앎'은 아니었다. '재미'였다. 불교와 물리학에 관한 생경한 내용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대화체의 구성을 띄고 있다. 물리학자가 이야기를 풀어갈 때는 불교학자가 끼어들어 질문을 건넨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충분히 궁금해봄직한 질문이었다. 특히 과학의 인과율과 대응대는 불교의 연기법을 다룬 챕터에서, 인간의 마음 역시 조건에 따라 결정되냐는, 즉 불교에서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보냐는 물리학자의 질문에서는 속이 다 시원해지기도 했다. 배움의 내용이 재미있었고 배움의 과정이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독서였다.

요동이 잉태한 별, 혼돈이 잉태할 별
50 이 요동은 우리들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만약 초기 우주에 양자의 요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CMV도 완벽하게 균일했다면, 별이나 은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요. 공간에 에너지가 높고 낮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높은 부분에는 더 많은 물질이 모여들어 별이나 은하와 같은 구조물이 생겨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의 요동이 별과 은하의 씨앗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별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우리들도 태어나지 못했겠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CMV)'의 발견과 의미를 다룬 부분이었다. 초기 우주의 미세한 양자 요동이 없었다면 별도, 지구도, 우리도, 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신비로우면서도 한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의 혼돈을 지녀야 한다"는 니체의 격언이 떠오르기도 했다. 양자 요동은 별을 잉태했고, 내 안의 혼돈은 새로운 별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내면의 요동이 없었다면 삶은 평화로웠겠지만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킬수도 없었을 것이다. 변화와 성장의 동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주의 요동도 내면의 혼돈도, 춤추는 별을 잉태하게 해준 감사하며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성장의 보람을 향하여
30 수행에 따라 자신을 바꿔가는 과정 자체가 자신에게는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을 갈고닦는 일이 살아가는 목적이지요.

무기력과 불안의 중턱에서 불교를 만났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생멸하고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은 당면한 고통을 마주볼 수 있는 위안과 힘이 되었다. 이제 과거를 넘어서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진리'라는 등불을 찾기 위해 앎을 쌓아오던 요즘이지만, 결국은 그 '등불' 역시 마음에 달렸음을 다시금 되짚어 본다. 나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소중한 지혜다. 바른 견해와 생각으로, 바른 말과 행동과 생활로, 바른 노력과 알차라림과 집중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보람을 찾기로 했다. 당분간은 그렇게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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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머리 만들기 - 비즈니스에서 차이를 만드는
히라이 모토유키 지음, 김소영 옮김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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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람들이 있다.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이루는, 직장에서 멋진 성과를 만들어내는. 당면한 과제에 임하며 똑같은 인풋을 투입하더라도 남다른 아웃풋을 생산해내는 사람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은 어떤 비법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까? 삶을 따라할 수 있을 것 같다. 계획에서 준비에서 실행까지. 모든 과정을 똑같이 따라한다면 그들의 성과를 복제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한 가지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드러나지 않기에 관찰할 수 없지만, 차이를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영역. 바로 '사고'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탁월한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과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있는 공통점은 뭘까? 그리고 그 결과물의 차이는 어떤 순서라는 질서로 모습을 드러낼까?

23 상사나 고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떄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논리적 사고를 활용해 비즈니스 플랜을 생각하고 메일이나 문장의 작성 시간을 단축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암기력이 향상되면 상품 지식이나 고객 정보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언어력이 향상되면 프리젠테이션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즈니스에서 차이를 만드는 논리 머리 만들기>는 논리적 사고와 관련된 책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논리사고, 언어력, 암기력이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논리사고'라고 말한다. '논리사고'를 익힘으로써 언어력과 암기력을 동시에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을 발달시킴으로써 학업과 업무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책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책의 흐름 또한 논리적이다. 1장에서 논리사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설명하며 2~4장에서 논리력, 언어력, 암기력의 발달 방법을 제안하고, 5장에서 이 세가지를 통합하고, 6장에서 모든 내용을 종합함과 동시에 구체적 적용 방향을 제시한다. 특히 독특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을 '중1수학'을 바탕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한 번 쯤 배워봤을 중1수학을 저자의 핵심 도구인 '공통점', '차이점', '순서'라는 돋보기로 다시 들여다본다. 그럼으로써 흔히 놓치고 지나갔을 수학의 묘미를 발견한다. 덕분에 기대했던 논리적 사고의 발달과 동시에 불편했던 수학과도 한결 친근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5 '공통점'이란 두 가지 사물에서 같은 점을 찾는 것입니다. 꼭 같지 않더라도 유사한 부분을 찾으면 됩니다.
 '차이점'이란 두 가지 사물의 다른 점을 찾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지, 무엇이 다른지, 어느 정도 다른지 등 'What'이나 'How'등을 덧붙여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순서'는 어느 쪽이 먼저인가(나중인가)뿐 아니라 시계열로 어느 쪽이 과거인가(미래인가), 또는 인과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도 포함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며 '아는 것'과 '설명할 수 있는 것'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아는 줄 알았지만 제대로 알고있지 못했구나." 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객관식 문제를 풀어나갈 때는 개별 개념의 덩어리만 희미하게 이해하고 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개념과 개념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개별 개념을 공통과 차이라는 기준에 따라 덩이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매끄럽고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더 나은 설명을 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하며 어렴풋이 시도하고 있던 방법들이다. 그리고 이번 독서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더 잘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알짜배기 도구들을 손에 넣은 것 같아서 든든해졌다.

268 저는 여러분이 중1 수학을 다시 공부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중1수학은 어디까지나 교재(What)일 뿐, 중요한 것은 그 배경에 있는 사고법(How)입니다.

수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학 '으로' 배우라는 저자의 말은 정말이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나에게 있어 수학은 '결과를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았다. 수학이 재미없고 불편하고 두려웠음은 두말할 것 없다. 하지만 수학은 언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야기'다. 자연이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번역해낸 선지자들의 선물이다. 그동안의 불편함을 벗어 던지고, 세상과 삶이라는 이야기를 수학 '으로' 배워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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