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을 사랑하는 법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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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무력감과 허무함에 빠졌던 적이 있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속에 자신감은 곤두박질쳤고 의지는 바닥났다. 고통스러웠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 고통을 감수하고 있을까? 나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였다. 흐리멍텅한 눈에 미친 세상은 결코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나의 세계가 고통이었으므로, 고통의 필터를 거쳐 드러난 세계가 어두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고통스러웠고, 삶은 그 고통을 감수할만큼 가치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력했고 삶은 허무했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다. 고통의 무의미다

끝이 없어 보이는 터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두갈래였다. 스스로 힘을 갖추거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전자를 택하기에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남아있는 의지를 겨우겨우 긁어모아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철학에서, 종교에서, 과학에서, 사회학에서, 위대한 거인들이 손을 내밀어줬고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니체를 만났다. 그가 말했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라고. 오히려, 운명의 평탄을 바라지 말고 가혹할 것을 바라라고. 위험하게 살아가라고.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우라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했던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나 고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통을 직면하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옅어져갔다. 지금의 나는 끝이 아닌 교량이며, 오늘의 나는 극복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 길을 열어준 두 관문이 이진우 교수님의 EBS강의, 그리고 박찬국 교수님의 '초인수업'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이 초인수업의 개정판이다.

고통의 승화, 삶을 위한 철학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는 니체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철학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삶을 위한 철학, 특히 지금 이 순간 고통스러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을 모든 이들을 위한 철학책이다. 고통에 빠진 이들을 위한 책들은 사실 많다. '힐링'과 '위로'는 요즘 시대의 주류 키워드다. 그런데 왜 니체가 필요할까? 니체 그 자신이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병약한 몸은 평생동안 신체적 고통을 안겼으며, 루 살로메와의 사랑도 실패했다. 저작들 역시 살아생전에는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며 조금 유명해질 무렵, 45세의 나이에 광기에 빠져 10년동안 병상에만 누워있다가 죽게 된다. 그에게 철학은 책상머리의 이론이 아니었다. 삶 그 자체였다.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세계를 정교하게 구축해낸다. 힐링도 중요하고 위로도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품을 벗어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고통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 모두가 미워하는 그 고통이, 결국 자신을 고양시키며 심원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마주했다는 것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처럼 위대한 관점전환을 위한 10가지의 질문을 담고 있다. 삶과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모든 분들께,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진정한 자신에 이르기 위한 지혜를 얻는, 소중한 희망의 여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유? 숙명? 사랑! 운명애!

81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운명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이용하고 승화시키라는 철학입니다. 특히 그는 고난의 운명이야말로 한 인간이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절호의 조건이라고 보았습니다.

81 악-가장 생산적인 최선의 인간이나 민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자문해보라.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들이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제대로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운과 저항, 증오, 질투, 불신, 고집, 냉혹, 탐욕, 폭력은 덕의 위대한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덕의 성장을 위해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운명에 대해서 세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첫째, 극단적 자유의지의 철학이다. 운명은 존재하지 않으며 노력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얼핏 희망적이며 명랑한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니체는 이를 '단죄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잘못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의 결과에는 그보다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한다. 애초에 출발선부터 공정하지 않은 경우들도 존재한다. 이에 반대의 태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둘째, 숙명론이다. 나의 영향력은 극소로 잡고 그 외의 영향력을 압도적으로 크게 설정하는 것이다. 나의 힘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없고, 오로지 주어진 운명에 따를 뿐이라는 일종의 패배주의적 태도다. 니체의 철학은 이 둘과 다른 영역에 위치해있다. 셋째, '운명애'다.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역경과 고통이 들이닥치더라도 성장의 계기로 활용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진취적 태도다.

돌이켜보면 나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태도 사이에서 부유했던 것 같다. 강력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자신하며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다가도 나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마주할때면 "역시 난 안돼"라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치가 그렇듯이 세상은 그렇게 극단적인 곳이 아니다. 나는 전능하지 않으며 나는 무력하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것과 그렇지 못한것의 경계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 앞에서 분노하며 좌절하는 경우 무력감이나 수치심에 휩쌓여 도망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계를 인정할 경우, 내일의 극복의 가능성이 열린다. 모든 성장은 직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째, 도망치지 않아야 하고 둘째,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 직면이다. 그런데 실패를, 한계를, 고통을 직면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랑할 수 있다면? 나의 취약성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변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운명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수레바퀴는 얼마나 힘차고 아름답게 돌아가게 될까?

기꺼이, 반갑게 의심할 것. 그렇게 자유로워질 것.

167 정신의 강함, 정신의 힘과 정신의 넘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와 관련된 근본적인 모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시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확신'의 부족이었다. 보편적 가치가 붕괴된 나는 나만의 가치를 찾고자 애썼다. 해야만 '하는'일이 아닌 하고 '싶은'일을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낙타처럼 살아온 내가 자발적 의지에 불을 붙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위대한 학자들의 세계을 그대로 빌려오며 숟가락을 얹어보려고도 해봤다. 오! 하게 만드는 시선의 새로움은 잠깐의 믿음을 틔웠지만, 이내 의심으로 뒤바뀌었다. 하루가 다르게 뒤바뀌는 모래알같은 신념체계는 도저히 공고화될 수 없을것처럼 보였고, 이내 망설임과 주저함과 회피와 선택장애로 이어졌다. 회의는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약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니체는 관점을 뒤집는다.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확신이 감옥이며, 회의가 곧 해방이며 자유라고 말한다.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렇다. 준칙이 주어지고, 그 명령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해진 준칙이 없이, 내면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춤을 추듯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것 아닐까? 나는 어떤 신념을 기대했던 것일까? 누구로부터 무엇을 승인받으려고 했던 것일까? 자유의 기쁨이 아닌, 책임회피의 안전을 갈구했던 것은 아닐까? '신'이라는 종교를 믿지 않는 척 하면서도, '도덕'과 '당위'라는 종교의 우산 밑으로,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디오니소스적 삶을 위하여

197 사람들을 삶에 보다 충실하게 만들고, 모든 비극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게 만들 정도로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 비극 예술을 포함한 예술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197 니체는 "비극적 예술가가 전달하고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상태는 가공할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고귀한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비극은 "강력한 적, 커다란 재난,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용기와 침착함-이렇게 승리감으로 충만한 상태"를 표현하고 전달합니다.

199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삶에의 의지-이것이야말로 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비극 시인의 심리학에 이르는 교량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공포와 연민을 격렬하게 방출함으로써 그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해석했지만-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의 영원한 기쁨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파괴에 대한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연극을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온 몸의 신경을 끌어들이는 특유의 몰입감이 마음에 든다. 자극에 민감하고 감각에 예민한 탓에 쉽게 산만해지는 나를 온전한 몰입으로 이끄는 몇 안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연극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나의 이와같은 몰입감을 좋아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도취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특히 디오니소스적 도취는 대상과 일체가 되면서 함께 변형하는 과정을 거친다. 비극에 대한 일체적 도취를 통해서 삶을 긍정할만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견해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시기에 우연히 자그마한 낭독극을 보러갔던 경험이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던 공연의 말미에서 기대치 않은 몰입을 경험했고 굉장히 고조된 상태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뭐였을까? 좌절과 고통속에서 무력감에 빠진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의 감정을 공감받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인상적인 변화는 그 후에 나타났다. 돕고 싶었다. 주인공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어졌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의지를 북돋아주고 싶어졌다. 감정에 도취되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걸까? 아마도 그 대상은 연극의 주인공임과 동시에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고통을 무대에서 마주보는 과정에서, 나의 고통역시 곁눈질로나마 직면하고, 그런 나를 스스로 돕고 싶은 의지가 어설프게나마 피어올랐을 것이다. 고통의 정화가 아니었다. 고통을 딛고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고통은 더이상 나에게 있어 악이 아니다. 나를 강하게 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무대는 일상을 닮았지만 일상도 무대를 닮았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고 자긍심과 자부심은 쉽사리 흔들린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남들은 쉽게 처리할만한 일 앞에서 허둥지둥 헤매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삶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느리지만 분명하게 애쓰고 있는 어리숙한 누군가를 본다. 비난하거나 비웃기는 커녕 격려하고 지지하고 돕고 싶어지는 나의 마음을 본다. 그 누구라는 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춰본다. 내가 희곡작가라면, 내가 연출가라면, 결코 그를 방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의 유희가, 예술가의 권리가, 예술가의 책임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될 수 있는 최선의 자신으로 고양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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