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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탐욕의 인문학 - 그림속으로 들어간
차홍규 엮음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4월
평점 :
우리는 왜 '예술'을 만날까요? 말이 너무 거창한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이야기'를 만날까요? 영화, 드라마, 웹툰, 연극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이야기 말입니다. 박새로이가 도대체 뭐라고.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토록 이야기 속 주인공에 몰입하는 걸까요? 예술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길래, 우리를 이토록 열광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6 본질적으로 예술은 관음이다. 예술가는 대상을 엿보는 관음증자이다. 화가가 그리는 대상은 그림을 소비하는 관객의 욕망을 형상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관음과 사랑을 욕망하는 판타지의 창조자이다.
어찌보면 좀 불편한 표현일수도 있겠습니다. '관음'이라니.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관음은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음흉함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세상을 엿보는 관음입니다. 태초에 우리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태어납니다. 아기에게 세상은 호기심 천국입니다. 결코 그것을 검열하는 일은 없습니다. "연필을 입에 넣는것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따위의 질문은 절대로 하지 않죠.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부모가 달려와서 제지하고 뺐는다면 울분을 터뜨립니다. 궁금했고, 제지됐고, 화가났을 뿐, 어느 단계에서도 검토와 검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어린시절과 달리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각자의 필터를 거쳐서 세상을 인식하죠. 기준과 잣대로 검열하고 검토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사람을 때려서는 안되고, 당연히 죽여서도 안되고, 사랑은 지고지순해야 하며, 복수를 하고 싶어도 정도를 지켜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줘패고 싶은 사람이 생기며, 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뜨거운 사랑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검열의 잣대에서 벗어나 내키는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은 욕망을 품어볼 때가 있죠. 마침, 모든 사회적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법적 책임과 윤리적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와 '예술'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써보고 싶으신가요?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쑥쓰럽고 민망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체험해볼 수 있다면 어떤 소재를 다루고 싶으신가요? 저는 아마도 '사랑'일 것 같습니다.
6 예술가가 그리는 대상은 당대의 욕망과 탐욕을 투사한다. 화가가 그리는 욕망의 소재는 관객이 선호하는 영원한 주제인 '사랑'에 닿아 있다. 그 사랑은 신성하고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인 아가페도, 이상적이며 관념적인 사랑인 플라토닉도 아닌,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적인 이성간 사랑인 에로스에 닿아 있다. 예술가가 엿보는 사랑이 지고지순하고 순정적이어선 관객을 유혹할 수 없다. 그림을 엿보는 관객이 호감을 느끼는 에로스는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가 그리는 사랑은 파격이고 일탈이며 금지된 사랑이다.
책 <욕망과 탐욕의 인문학>은 46가지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일상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욕망과 탐욕의, 원초적이고 에로틱한 사랑 이야기를 다룹니다. "뭐야? 완전 야한 책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음..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야함'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특정 인물의 특정 부분이 아닌, 이야기 속 '사람'과 '상황'과 '감정'과 '삶'에 몰입하며 바라보았기에, '이해'와 '연민'의 감정이 더해져 '아름다움'에 가까운 복합적인 느낌과 감정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 담긴 이야기는 아주 생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역사속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브', '살로메', '칼립소', '키르케', 카사노바', '데릴라', '클레오파트라', '카미유 클로델', '유디트' 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 속 인물의 사랑이야기와 함께 역시 친숙한 거장들의 예술작품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와 '그림'의 조합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 그림을 '보는'재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인용문처럼 예술가가 그리는 대상은 당대의 욕망과 탐욕을 투사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도 시대에 따라, 작가에 따라 관점과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죠. 저자의 친절한 설명과 곁들여 이런 변화와 차이를 관찰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가 바로 '적장의 목을 벤 유디트' 챕터입니다. 유디트는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논개'같은 여성입니다. 유대의 산악도시인 베툴리아에 살던 정숙한 여인으로, 마을을 포위한 적장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가진 뒤 살해합니다. 굉장한 용기이며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도나텔로의 조각을 보면 그녀의 결연함과 용기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구스타브 클림트의 '유디트'를 보면.. 띠용? 이게 무슨일인가요? 그림 잘못 가져온 것 아닙니다. 같은 '유디트' 맞습니다.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클림트의 '유디트'를 어떻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연함'이나 '숭고함'이라기 보다는 관능적이며 고혹적인 느낌이 드는 그림입니다. 도나텔로의 조각이 마을을 구하기 위한 그녀의 '결기'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클림트의 그림은 적장을 유혹하는 순간의 '관능'에 주의를 기울인 것 같습니다.
하나를 더 볼까요? 카라바조의 유디트입니다. 이번에는 살인을 앞둔 한 인간의 '불안'과 '긴장감'이 그녀의 표정을 타고 전해져옵니다. 한 인물의 같은 경험을 두고도 '결연함', '관능', '불안'이라는 각각의 다른 감정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죠.(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정말이지 색다르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성향이 다른 두 언론이 다른 측면을 부각해서 보도하는 요즘의 세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유디트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이라면 나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였을까?", "하나의 관점에 갇히는 사이에 다른 무엇을 놓쳤을까?" 와 같은 생각을 떠올려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의 감각과 관점을 단정짓지 말고, 풍부하고 다채롭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열 가지 경험에서 열 가지 해석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닌, 한 가지 경험에서 열 가지 해석을 어끌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삶이 훨씬 풍성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죽음의 댄서 살로메'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의 구애를 거부한 것에 대한 댓가로 헤롯왕을 유혹하여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도록 만든 '살로메'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냥 '악녀'라고 욕을 한바가지 먹인 뒤 그냥 넘어갈 것 같은데요, 대가들의 그림을 만나보면서 훨씬 풍성하게 이 이야기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구에르치노'의 <감옥에 갇힌 요한을 찾아온 살로메>를 보면서 두 사람의 대비된 마음과 요한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스통 뷔시에르의 <일곱 베일의 춤>을 보며... 와... 말을 아끼겠습니다. 그림이 이렇게도 관능적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장 베너 2세의 <살로메와 요한의 머리>는 정말이지 신비로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림속의 살로메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굉장히 이질적이고 불편한 상황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남성의 수급이 올려져 있는 은쟁반을 가지런히 들고있는 모습입니다. 이질적인 상황에 비해 여성의 표정은 평온합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가지런한 입술은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어떤가요?" 판단하고 비난하고 싶지만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 순간 만큼은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정말이지 오묘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책 구입하시는 분들은 '살로메'편부터 찾아 읽으시기를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그림은 더 재미있습니다. 그림과 이야기를 넘나들며 작가의 해석을 유추하고 나만의 해석을 덧붙이는 과정은 더더 재미있습니다. 욕망과 탐욕이 어우러진 역사적 인물들의 원초적인 사랑 이야기, 예술과 사랑에 관심을 갖고있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