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 - 신재민 전 사무관이 말하는 박근혜와 문재인의 행정부 이야기
신재민 지음 / 유씨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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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폭로사건, 2018년 12월 30일부터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입니다. 기재부에서 근무한 뒤 퇴직한 신재민 전 사무관이 재직중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3가지 문제에 대해 폭로했습니다. 청와대가 KT&G와 서울신문의 사장 인사에 개입했다는 것, 그리고 정무적인 판단에 의해 적자국채를 발행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민간기업의 인사에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월권을 저질렀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국가의 채무를 늘리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청와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이죠. 기재부와 청와대는 펄쩍 뛰었습니다. 부당한 압력이 아니었으며 정당한 의사결정 과정이었다고 주장했죠. 신재민 전 사무관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몇 차례의 공방전을 주고받았지만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흐지부지 되었죠. 당시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관심있게 지켜보았습니다. 다만 어느쪽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이해관계자 각자의 주장이 각각 설득력있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이번에 저자의 책을 읽고 정보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결론 내렸냐고요? 글쎄요, 그보다 중요한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누가 옳은가, 이 사건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이 사건에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 대한민국에 공직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입니다.

책 <왜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는 신재민 전 사무관의 저서입니다. 폭로사건과 자살시도 이후 자취를 감췄던 저자는 어떻게 지내왔을까요? 그리고 1년 3개월만에 출간한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까요? 인터뷰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5kg이 빠졌다고 합니다. 유튜브에서 봤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차분하고 정돈된 어조로 근황과 책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모교 대학원에 진학해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행정을 연구하고 행정부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합니다. 사실 책을 처음 폈을 때는 그 날의 폭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에 대한 팩트를 알고 싶었죠. 그런 맥락에서 폭로 당사자의 정돈된 주장을 꼼꼼하게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난 뒤 앞서의 궁금증은 뒤로 밀려났습니다. 책을 펼쳐들고 서문과 목차를 훑어본 뒤 더더욱 그랬죠. 다른게 궁금해졌습니다. "저자는 도대체 왜 힘들게 들어간 안정된 직장에서 나오게 된 것일까?" 요즘 시대에 공무원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기재부는 고시의 꽃이라 불리우는 핵심부처이죠. 당연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리도록 만들었던 한 가지 요소를,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공직사회를 향한 '실망감'입니다. 적자국채 발행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실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누군가는 정부의 권력남용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정당한 권리행사라고 주장할 수 있듯이, 당면한 상황이 각자의 '기대' 내지는 '기준'에 못미칠 때 우리는 실망을 하고는 합니다. 정부를 바라볼때도 마찬가지죠. 더군다나 하나의 정권이 '국정농단'이라는 이유로 무너지고 난 뒤 국민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난 정부라면, 그 '기준'이 다소 높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정권에서 '공직사회'라는 세상이 바꾸지 않는다면 실망감도 배가 되겠죠.

책 <왜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에는 공직사회의 면면에 대한 신재민 전 사무관의 실망감이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3년 남짓 저자가 기획재정부 사무관으로 근무하며 겪은 체험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담겨있습니다. '1장-내각 위에 군림한 청와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비대해진 청와대 권력이죠. 청와대 비서실 인원이 400명이 넘는답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기재부의 수장은 기재부 장관입니다. 그러니 기재부의 의사결정도 기재부 장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함이 당연하죠. 하지만 기재부장관은 인사권이 없습니다. 실질적 인사권은 청와대가 쥐고있죠. 그러니 기재부 직원들은 청와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기재부 장관은 청문회를 거치는 반면 청와대 보좌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책결정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책임있는 행정도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앞서서 저자가 문제를 제기했던 '적자국채'건 역시 국가의 채무와 이자비용을 불필요하게 증가시킨다는 문제점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부총리를 건너뛴 채 청와대가 실무진에 지시를 내리는 '의사결정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대통령 집무실의 광화문 이전'이라는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 이루어지지 못한것에 매우 아쉬움을 표합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국무위원의 긴밀한 대통령 보좌가 가능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 저자는 2장부터 본격적으로 공직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봅니다. 국회, 언론, 행정부 등을 넘나들며 오로지 실무자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생생하지만 민망한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행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한 '입속의 얼음'사건은 정말이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술에 취한 간부가 입 안의 얼음을 빼서 다른 사무관의 입 안에 넣자, 그 사무관은 '성은을 입었다'고 말하며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무관이 자신은 못 먹어서 서운하다고 말했고 간부가 그 사무관에게도 입 안의 얼음을 넣어줬다는 것입니다. '승진'을 무기로 '파편화'되고 '사유화'된 행정권력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권언유착의 사례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국정홍보를 위해 언론사에 돈을 주고 인터뷰나 기획기사를 싣는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돈을 주고 지면을 샀다면 광고를 싣는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사'의 형식을 띈다면 해당 언론은 중립성을 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언론들이 과연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까요? 행정부와 언론의 유착, 그리고 미디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기로 쓰는 언론들의 사례는 저에게도 굉장한 실망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문재인대통령은 과거 신재민사무관의 폭로에 대해서 '자기가 보는 작은 세계 속의 일을 가지고 판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이에 신 전 사무관은 자신의 시야가 좁았을 수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좁은 세상에도 중요한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실망'과 '당연함'은 '무뎌짐'의 경계에서 나눠집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오래된 무뎌짐 속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직사회 곳곳의 좁은 세상을 '당연하지 않음'의 잣대로 생경하게 들여다보며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제기하다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넓은 세상도 결국에는 좋아지지 않을까요?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국민은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와 공동체를 향한 저자의 진정성을 믿으며 앞으로의 연구활동을 응원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자신이 정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에 주목한 기사'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기사를 먼저 읽어보시면 더욱 좋을것 같습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1&aid=0003479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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