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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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정신은 아래로, 지옥으로 묻힙니다. / p.45

보통 생각을 했을 때 사람이라는 동물은 적어도 가시적으로 보이는 형체로 존재한다. 물론, 다른 동물과 식물들도 그렇다. 안 보이는 작은 미생물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형체하지 않는 사람은 곧 귀신이나 유령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예시로 든 두 물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알도 팔라체스키의 장편소설이다. 소재가 독특하게 다가와 선택하게 된 작품이다.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은 늘 형체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연기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설정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과연 연기 인간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행하는 먹는 것과 자는 것, 그리고 위생과 욕구 등 다양한 무언가를 어떻게 해결할까. 보다 근본적인 호기심에 상상력을 달아 줄 것만 같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피렐라라는 이름의 연기 인간이다. 굴뚝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다 세 명의 노파가 피운 불로 세상에 나온다. 그러다 도시에서 피렐라를 본 사람들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렇게 나라의 왕에게 초대된 피렐라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를 신성시한 존재로 여기기까지 한다. 심지어 국가의 중책을 맡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피렐라의 모습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사람의 죽음으로 여론이 뒤바뀌게 된다. 신성시했던 분위기는 곧 원인을 그에게 돌리고 책임을 묻는다.

읽으면서 두 가지 지점이 인상적이었으며, 반대로 난해한 느낌을 받았다. 첫 번째는 문체이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들과 다르게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점이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사실 종종 대본집도 읽기는 했었는데 그것과는 또 다르게 보였다. 지문이나 나레이션 등이 표시가 되는 대본집과 다르게 그저 큰 따옴표로 대화만 쭉 나열이 되어 있어 어떤 인물이 말하는지 인지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읽다 보니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 색다른 문체가 매력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는 등장 인물들의 이중성이다. 줄거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중반에 이르러 여론이 바뀐다. 초반에는 피렐라의 모습을 보면서 신기함을 넘어 특별한 존재로서 대우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신뢰가 쌓인 이후에 국가의 중책을 맡길 텐데 마치 신이 만든 하나의 특이한 현상으로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쉽게 피렐라를 대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보면 뭘 이렇게까지 신봉하는지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었으며, 종교의 색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사람의 믿음은 이렇게 난해하고도 가볍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무지함이 보였다.

연기로 이루어져 있기에 세상에서 가벼운 사람이라고 칭했겠지만 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벼운 사람은 피렐라가 아닌 군중이었으며, 그들이 진짜 변덕과 가벼움을 모두 가진 이들이 아니었을까. 연기처럼 가벼우면서도 쉽게 섞여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군중들 속에서 그저 피렐라는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연기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

결론적으로 읽고 나니 인간의 악함을 정면으로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을 믿는 편이기에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어서 군중의 심리가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기도 했었다. 묘하게 찝찝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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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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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얼마나 길지는 악마만 알겠지. 이 시궁창에서. / p.266

적어도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입장에서는 북유럽의 국가는 꿈의 국가처럼 느껴진다. 전공에서 복지 국가로 대표되는 나라가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가 지향하는 지점은 복지 국가이다. 세금을 많이 걷지만 그만큼 복지로 누릴 수 있는 국가. 그리고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느끼는 국민성을 가진 국가.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는 북유럽에 대한 이미지는 좋다.

이 책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장편소설이다. 경찰 살해자라는 제목이 조금은 특이하게 다가왔다. 경찰이 살해를 했다는 것인지 경찰을 살해한 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인지 궁금했다. 추리 소설이면서도 스릴러 장르가 무엇보다 진하게 느껴졌는데 그 지점을 보고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됐다.

소설의 주요 배경은 스웨덴이다. 처음은 한 여성이 남자의 차에 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여자는 위험에 처한 듯 보였고, 이후에 경찰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여자의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마르틴 베크라는 인물이 이를 수사한다. 베크는 그 지역의 경찰인 뇌이드와 함께 사건을 탐색하면서 여자의 전 남편을 만났고, 자신이 잡았던 사건의 범인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 그를 용의자로 의심했다.

그러던 중 빈집을 터는 도둑들과 경찰 사이에서 육탄전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도둑 한 명과 경찰이 사망하게 된다. 경찰 내에서는 뒤숭숭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도둑은 의도하지 않게 절도가 아닌 억울한 일로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전체적으로 실종 사건과 더불어, 경찰에게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추리 소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베크의 시선에 따라 여성을 납치했던 의문의 남성이 누구인지 의심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고, 또 많이 어려웠다. 그동안 읽었던 추리 소설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긴장감보다는 답답함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가장 강하게 관통했던 생각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회의감이다. 우선, 작가인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마르크스 주의자라고 한다. 그래서 초반에 실린 서문에서부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까지 정치적인 시선과 색이 많이 묻어난다. 특히, 전 세계에서 복지 국가로 스웨덴을 언급하지만 이 나라는 오물과 같다며 이를 한탄하는 내용과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꽤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동안 배웠던 스웨덴에 대한 이미지와 괴리감이 느껴졌던 부분이다.

추리 소설의 선구자라고 하지만 사회고발에 대한 향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실종 사건과 강도와 경찰의 대치는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지만 베크의 신세한탄과 콜베리의 회의감이 더욱 무겁게 와닿았다.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던, 심지어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독자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서문에서 동시대를 가장 선명하게 재현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의 묘미에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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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마을 -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
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임명주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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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물에 대해 말한다. / p.71

가상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치 그 사람의 인생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는 느낌이 들고, 당사자가 된 느낌도 든다. 일정한 사건과 시기를 다룬 이야기들도 좋지만 탄생과 죽음까지 모든 시대의 이야기들을 더욱 선호한다.

이 책은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사실 처음에 큰 착각을 하고 읽게 되었는데 소설인 줄 알았다.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가상 이야기라는 착각. 제목부터가 뭔가 호기심을 주었고, 주인공이 사는 비밀의 집이라는 내용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읽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미국의 시인으로 개인주의자로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겉으로 보면 바다의 잔잔한 물결과 같은 삶을,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거친 파도와 같은 삶을 살았는데 책에서는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를 관찰자의 시점으로 일대기를 말한다.

약간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에밀리 디킨슨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시라는 장르 자체가 워낙에 장벽이 높은 탓에 상상력이 부족한 편인 나는 그렇게 즐겨서 보는 편이 아니다. 조금씩 읽고 있기는 해도 다른 장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읽는 내내 에밀리 디킨슨이 말하는 시와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표현이 마치 미술 작품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었기 때문에 에세이나 소설보다는 긴 호흡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물론, 에밀리 디킨슨이 직접 적은 자서전이 아닌 관찰자의 다른 대상의 입을 빌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외부에서 보는 잔잔한 물결과 내면에서의 거친 파도가 너무나 잘 느껴졌다. 내용만 본다면 그렇게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심지어 에밀리 디킨슨은 알려진 것과 같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의 소통이 많지 않았기에 더욱 인생에 크게 떠올릴만한 사건들이 없었다. 기억에 남는다면 여자 학교를 다녔다는 것과 유일하게 만난 남자가 있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게 또 특별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반대로 내면의 거친 파도는 너무 인상 깊었다. 주님의 구원을 받고 싶은 사람 손을 들라는 학교 교장 선생님의 질문에 반기를 들고, 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삶에 대한 고뇌 등 뭔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고립을 택하면서도 외롭지 않은, 오히려 평온하게 보이는 삶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시에 몰입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모습들이 참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또한, 자신만의 린든을 만들고자 했던 내용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제목에 등장하는 종이로 만든 마을과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이 있었기에 거친 파도와 세상 안에서 평온하게 살지 않았을까. 그게 원동력처럼 느껴졌다.

많은 것을 표현하고 싶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이 조금 더 해박했더라면 책을 읽으면서 오는 감동의 파도가 더 크지 않았을까. 문장들이 마음에 와닿았지만 독자로서의 능력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해 개인적인 아쉬움이 들었던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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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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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충분하다. / p.185

직장에 근무하면서 생각보다 복 받았다 느꼈던 점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었다. 정책이 좋다거나 인권이 높아서도 아니다. 어려운 언어 중 하나인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물론, 성조를 사용하는 중국어나 베트남어도 어렵기는 하지만 한국어는 진짜 어려운 언어 중 하나라는 사실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맡았던 업무가 이용인분들의 한국어교육을 담당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문지혁 작가님의 장편소설이다. 출판사 유튜브에서 최신작의 문구를 들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오죽하면 메모장에 적어 배경화면으로 저장할 정도였는데 그게 이 작품의 후속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기회에 출판사의 북클럽으로 세 권의 도서를 고를 수 있었기에 기대가 되는 작품으로서 이 작품과 신작, 그리고 다른 작품까지 전부 젊은 작가 장편소설 안에서 선택했다. 보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터라 바로 읽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지혁은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 강사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 첫 수업에서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Are you in peace?"로 적자 수강생들은 바로 웃음을 터트린다. 어떻게 초면에 평화를 빈다는 인사를 하냐는 것이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는 거룩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혁은 거기에서 안녕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느냐고 독자에게 되묻는다. 또한, 지혁은 미국에서 강사 일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오고 있는데 그 안에 담긴 고뇌, 한국에 있는 가족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이 한국어 수업과 맞물려 전개된다.

처음에 지혁과 수강생 사이의 오해나 편견, 그리고 수업에 대한 에피소드로 흘러갈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지혁이 가지고 있는 내부의 감정과 생각, 미국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으로서의 이야기들이 중심적으로 나타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상과 벗어나는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부분에서의 감정이다. 전체적으로 술술 읽혀졌으며, 중간중간 저자 특유의 유머나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흔히 겪는 실수나 말투들은 공감이 되어 재미있었다.

어느 인상 깊은 점을 딱 하나 고르기에는 전체적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다. 사실 소설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를 뽑는다면 지혁의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생사를 오가셨다는 일 정도일 뿐이다. 하나하나 벌어진 일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사소하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익숙하고, 또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혁의 심정과 생각에 더욱 공감이 되었고, 몰입했고, 인상이 깊었다. 서툴게 구술 평가에 응시하고, 할머니께 배워 중간마다 '인자'라는 말을 붙이는 수강생의 모습은 참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특히, 지혁이 작가가 되고 싶지만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떨어지고, 동생인 지혜는 이를 두고 독설을 날리기도 한다. 대학교 교수님이나 뉴욕에서의 교수님은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거나 부럽다는 말을 하지만 말이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그 안에서 느끼는 지혁의 고뇌와 절망이 무엇보다 강하게 와닿았다. 마치 내가 지혁이 되어 상처를 받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용은 더할나위없이 만족스러웠지만 가장 마음을 울렸던 문장은 작가의 말이었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버튼을 누르는 행위이며,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과 소설은 둘로 갈라져 다른 이름으로 저장된다고 말한다. 이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을 잘 인식시켜주는 듯했는데 묘하게 머리에 각인이 되었던 문장이었다. 우리 삶도 하나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지점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던 작품이었다. 이후에 읽을 <중급 한국어>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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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어의 기쁨과 슬픔 - 한 언어심리학자의 자아 상실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
줄리 세디비 지음, 김혜림 옮김 / 지와사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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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허공에 뜬 기분이 들었다. / p.12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다른 국가에 정착할 일 없이 살다 보니 언어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일이 있다면 그 지역 방언의 적응이라든지 조금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기회가 있었을 텐데 이사도 거의 같은 방언을 사용하는 지역 내로만 다니다 보니 비교적 언어적인 어려움은 없이 살아온 축에 속하다.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이상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줄리 세디비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언어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 왜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두 번째로 다녔던 직장에서 생각을 깼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많이 언급했던 것처럼 다문화가정과 결혼이민자 관련 기관에서 근무했었는데 그때 이중언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엄마 나라의 언어를 자녀가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단순하게 언어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또는 소통 그 이상으로 큰 의미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하게 되었다. 그때 생각이 났기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체코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이주민 가정이다. 아버지께서는 체코어를 자녀들이 사용하기를 바라셨으나 저자를 비롯한 자녀들은 영어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온 듯하다. 그렇다 보니 체코어는 문맥에 맞지 않게 드문드문 사용할 정도였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언어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언어심리학자인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이중언어의 중요성, 그리고 이중언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는 책이다.

처음에는 저자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보니 술술 읽었지만 불어나 체코어 등 조금은 낯선 언어들에 대한 문법과 단어 이야기가 나오면서 조금 속도가 더디게 읽혀졌다. 그나마 영어는 학교를 다닐 때 오래 배웠기에 어느 정도 읽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수능을 위한 공부였을 뿐이어서 그 부분들은 그냥 머릿속에 담는 느낌으로만 책장을 넘겼다. 전체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주제이다 보니 읽는 것이 어려움은 있었으나 몰랐던 부분이어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지점이 인상적이다. 첫 번째는 한국어의 등장이다. 다른 언어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중간에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가 한 문단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주된 내용은 언어에 관습이 나온다는 이야기인데 예시가 한국어였던 것이다. 저자는 한국어는 위계와 공손함에 대한 집착이 언어의 뼛속까지 깊이 자리잡았다고 표현했다. 상대의 위치나 권위에 따라 수도 없이 많은 높임말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언어적인 표현이 세분화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했던 언어인데 다른 나라에서 본 생각을 이렇게 활자로 보는 게 새로웠다.

두 번째는 고유 모국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단어이다. 책에서는 예시로 체코어인 '리토스트'라는 단어를 예시로 든다. 영어로 말하면 Regret, 한국어로 말하면 유감이라는 단어인데 체코 국적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단순하게 유감이라는 단어로는 리토스트를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하나의 스토리로 설명해 주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그 감정이 와닿지 않았다는 점은 의아했다. 아마도 체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밖에도 저자가 체코에 있는 삼촌과 친척을 만났을 때의 그 감정, 캐나다에서는 매년 이중언어를 위한 세금이 투여되지만 정작 사람들의 관심은 크지 않다는 점 등의 이야기도 꽤 기억에 오래 남았다.

서두에 언급했던 개인적으로 겪었던 이중언어는 결혼이민자라는 한 개인과 대한민국 국적의 자녀 관계에서 이야기가 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온전히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이중언어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게 다가왔던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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