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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그리고 나는, 217일째 홀로 이곳에 있다. / p.8
사회파 소설을 참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만큼 보기 고통스럽기도 하다. 마치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행하지 않은 일이나 사건은 아니었겠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 살았던 사람으로서의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는 듯하다. 잊지 않아야 하기에 최대한 자주 접하려고 하지만 막상 보면 그 묘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책은 전혜진 작가님의 단편 소설집이다. 현대에 이슈가 되는 내용들을 SF와 공포 등 다양한 장르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던 책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사회파 소설들은 현대의 민낯을 비추어 사실적인 분위기를 많이 느꼈던 것 같은데 가상의 다른 장르와 결합이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다.
소설집에는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자주 접했던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이야기부터 최근 제주도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4.3사건이 배경이 된 호러 작품들, 그밖에도 비교적 최근이라고 볼 수 있는 모 기업의 정리해고사건을 모티브로 한 SF 소설과 큰 이슈로 다루어지는 전교조 탄압과 군대 내 성범죄 사건 등이 드러난 이야기들이다. 술술 읽혀짐과 동시에 깊게 고민할 내용들이 많아서 읽는 속도가 생각보다 더디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두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첫 번째 작품은 표제작인 <바늘 끝에 사람이>이다. 이는 노동자 정리해고사건을 주제로 가지고 SF 소설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사이보그로, 몸을 기계로 바꾸기를 원하는 회사의 설득에 넘어갔지만 결국 남는 것 없이 버려지는 신세가 됐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지는데 이에 부당해고 농성을 벌이기로 한다. 그렇게 217일째 지구와 떨어진 엘리베이터 카운터웨이트 끝에서 홀로 긴 싸움을 펼치고 있다.
읽으면서 뉴스에서 보았던 여러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높은 곳에서 홀로 복직을 외치던 우리의 아버지들과 천막에 모여 부당함을 말하던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들이었다. 너무나 피부에 와닿는 소재였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한 회사의 노동자로서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사이보그가 인간의 쓰임에 맞게 사용되다 버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기계 부품처럼 일하는 근로자과 겹쳐 보였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졌다.
두 번째 작품은 <창백한 눈송이들>이다. 이 작품은 공군 내 성범죄를 주제로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군으로 새로운 곳에 배치를 받았는데 처음 맞이하는 상관이 영 못마땅한 태도를 보인다. 거기에 같은 학교 선배는 아무렇지 않게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등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을 만든다. 그러던 중 짧은 머리의 한 여군을 보았는데 이를 선배에게 고했더니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심지어 욕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부대 내 고충상담관을 만나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아마 지금까지도 이슈가 되는 소재가 아닐까 한다. 뉴스에서 종종 보았지만 부끄럽게도 기사로 접할 뿐이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화가 많이 났었다. 주인공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지만 정작 그 말을 뱉은 선배는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모습들과 군대라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집단 안에서 자행되는 성범죄, 이를 정화시키려는 노력보다 감추기 급급했던 이들의 태도가 참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이러한 이슈에 거리를 두었던 스스로가 반성하게 되었다.
책을 덮으면서 관통했던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관심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된 사건을 답습하지 않고 현재의 문제들을 변화시키는 해답은 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말아야 할, 잊어서는 안 되는 어두운 그림자와 아픔들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의의가 크다고 보여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