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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하였으니 - SF작가들의 유사과학 앤솔러지
문이소 외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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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하였다. / p.9
친한 선배 부부 내외와 유사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편 되시는 분께서 MBTI나 혈액형은 똑같은 부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속으로는 조금은 다른 결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툴 정도의 큰 이슈는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다. 혈액형은 아예 안 믿는 편이지만 그래도 MBTI는 그것보다는 그나마 신빙성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혈액형으로는 예전부터 모진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 이골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 MBTI 성향이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선비나 재미가 없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혈액형보다는 나름 납득이 간다고 생각하는데 가족 구성원이 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음에도 성격이 전부 다르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신뢰를 잃은 유사과학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열 명의 작가님께서 참여하신 앤솔로지 소설집이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띄었고, 그 다음에는 사회의 큰 이슈들을 개성 있는 소재로 터트렸던 전혜진 작가님의 작품이 보여 바로 선택하게 된 책이다. 그밖에도 SF 앤솔로지 작품을 많이 읽게 되면서 너무 친근한 작가님들의 성함이 보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큰 기대가 되었다.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열 명의 작가님의 열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사이비 종교의 이야기가 되었고, MBTI, 사주, 미신 등 SF 작가님의 유사과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작품은 참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유사과학이었고, 또 나름 크게 공감이 되었던 작품도 있었다. 아마 스스로 유사과학을 어느 정도 믿는지에 따라 관심도와 몰입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최의택 작가님의 <유사 기를 불어넣어드립니다>와 문이소 작가님의 <정지유의 화양연화>라는 작품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유사 기를 불어넣어드립니다>의 주인공은 외계인 해수이다. 해수는 어느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다. 마을에 있는 할머니인 복순이 급체를 하자 밤새 팔과 다리를 주물어 주었는데 낫게 되는 것을 계기로 적어도 복순에게만큼은 큰 신뢰를 얻은 듯하다. 어느 날, 안양에서 아이를 등에 업고 온 한 여성이 해수를 찾아온다. 아이는 걷는 것이 불편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치료해 달라는 것이었다. 해수는 분명히 치료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의료 능력이 없음에도 아이를 주물어 주면서 곧 나을 것이라고 용기를 준다.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초반에는 크게 흥미를 못 느꼈는데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와닿았던 작품이었다. 오히려 외계인보다는 기 치료에 초점을 맞추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급체는 어느 누가 주물어도 될 일이었겠지만 인간 여부를 떠나 해수의 진심과 정성이 복순에게 닿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결말에서 여성의 이야기가 큰 공감이 되었다. 진실성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가끔은 선의의 거짓말 역시도 사회를 살아가면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유의 화양연화>는 사주를 믿는 정지유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친구의 추천으로 사주를 보러 갔는데 그곳에서 건강의 적신호를 듣는다. 실제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던, 어떻게 보면 혼란스러운 시기의 정지유는 개명을 할 정도로 사주에 신뢰를 가지고 유료 사주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매일 보는 것이 하루의 루틴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이직하게 된 곳에서 점을 보는 건물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누가 봐도 좋은 인상이 아닌 듯한 건물주 할머니와 거리를 두고자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정지유는 가까워진다.
이 작품 역시도 현실적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가끔 포털 사이트의 오늘 운세를 보는 편인데 공감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 운세가 매일 달랐음에도 하나의 동아줄처럼 그것을 신뢰하는 일도 있었다. 아마 주인공의 입장에서 몰랐던 신체의 혹을 알게 된다거나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더욱 믿게 되지 않았을까. 이입해서 읽으니 더욱 크게 와닿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건물주 할머니의 말은 뭔가 머리를 딱 때려맞는 느낌이 들었다. 속이 알차면 사주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는 것. 생각이 많아졌다.
그밖에도 화성으로 여행가는 한 커플의 이야기, 숯을 먹어야 한다는 민간요법의 이야기 등이 내내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유사과학에 큰 관심이 없음에도 읽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었던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학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님들의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유사과학 작품들이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이야기들이어서 너무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