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히려 AI 이미지의 수준이 낮지 않고 사람이 그린것 혹은 진짜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적대감이 전보다 커졌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불쾌한 골짜기는 진지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신기한 구경거리 혹은 조롱거리였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아 갈 거라는 위기감 때문일까? 그렇다면 생성형 AI가 쓴 보고서는 왜 보이콧 대상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컴퓨터가 영화계 일자리를 빼앗은 것도 결코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컴퓨터 그래픽이 보급되면서 영화계에서 스톱모션 기 술을 비롯한 구식 특수효과 전문가들의 활동 영역이 크게 위축되지않았던가.
내게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의 중요한 토템을 모욕당해 화를 내는 원주민처럼 보였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창의성과 고유성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사무실에서 작성하는 보고서 중에서는 굉장히 창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도 있겠지만, 보고서라는 물건 자체가 그런 중요한 토템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구식 영화 특수효과에는 굉장한 창의성이 필요하지만 그 작업은 불행히도 우리 문화에서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고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 P186

암묵지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으로 익힌 지식이다.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아무리 상세하게 글로 적어봤자 그걸 읽고 두발자전거를 바로 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휘파람 부는 법, 수영하는 법, 바둑 두는 법도 마찬가지다. 이때 매뉴얼로 정리한 글을 형식지(形式.explicit knowledge) 혹은 명시지(明知)라고 한다.
명료한 언어로만 이뤄질 것 같은 과학 연구에서도 암묵지의 역할은 중요하다. 지도교수에게 일대일 지도를 받으면서 논문 잘쓰는 법을 배우고, 선임 연구원으로부터 사소하지만 중요한 실험 요령을 전수받는다. 과학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현대 조직들은 몇몇 구성원이 가진 암묵지를 파악해서 다른구성원에게 전파하려고 엄청 애를 쓰며, 이것이 이른바 ‘지식경영‘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된다. 내 경험을 예로 들자면 내가 10년 넘게다녔던 신문사도 이 일에 열심이었다. 기자들의 취재 노하우도 대표적인 암묵지다. 기자들의 취재력은 천차만별인데 어느 분야를 담당하든 특종을 쏟아 내는 탁월한 기자가 있는가 하면 어느 분야를 맡아도 취재가 부실한 기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경험과 훈련으로 취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주니어 기자들의 취재력을 잘 끌어올리는 시니어 기자도 있다. - P198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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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승부에 임하는 자세, 혹은 고수의 경지를 표현하는말로 ‘반전무인(前無人)‘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바둑판 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오직 바둑돌이 놓인 형세만 보고 바둑을 두라는 조언이기도 하고, 그렇게 바둑을 두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바둑판 앞에 있는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바둑돌이 놓인 형세만 보고 바둑을 두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 P87

어느 분야에서나 뛰어난 인재를 놓고 천재형이냐, 노력형이냐 따질 수 있겠지만 유독 바둑계에서는 그런 질문을 많이 하고, 기사들을 천재형과 노력형으로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젊은 기사가 정상급에 올라서면 인터뷰에서 꼭 ‘천재형이냐, 노력형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젊은 세계 챔피언이 뭐라고 대답하건 사람들은 모두 그를 천재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실제로 그가 천재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이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이창호 9단은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으나 자신을 천재라고 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형"이라고 답하고, 그마저도 "그저 조금 노력하는 기사"라고 자신을 낮췄다. 반면 이세돌 9단은 "바둑 쪽으로는 약간 천재형에 가깝긴 하다"라고 대답했다. 커제 9단은 "그렇게 노력하는 편은 아니다"라고 말했고 신진서 9단은 "재능은 있었던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 - P90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감성을 코끼리에, 이성을 기수에 비유한다. 이성은 자신이 감성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이트는 이성을 감성의 노예라기보다는 변호사라고 설명한다. 감성이 어떤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나면 이성은 그런 결정의 근거가 될 적절한 논리를 찾는다. - P102

하우절은 같은 책에서 "많은 이들이 경제적 인센티브는 뿌리칠 수 있지만 문화적, 집단적 인센티브는 더 뿌리치기 힘들다"라고도 적었다. 예술가들을 움직이는 인센티브에는 경제적 보상도 있지만, 그들은 뭔가 고상한 것, 의미 있는 것, 자신만이 만들 수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고 인정받는 것에도 강하게 끌린다. 새로운 기술이 그 인정 욕구를 위협할 때 예술가들은 예술을 재정의해야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저런 건 예술이 아니야!). 그리고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감정은 코끼리이며 이성은 자기가 그 코끼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기수에 불과하다. 코끼리가 방향을 정하고 기수는 그 방향을 합리화한다(‘저런 건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술이 아니야!‘).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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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와 필립의 아파트에 머물며 뉴욕을 걸어다녔을 때에도 늘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일들이 여기서 일어나고 그에 비하면 세계의 나머지는 공백 비슷한 거구나. 서울은, 한국은 멀리서 보면 세계의 파주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도시에 꽤 가까우면서도 어찌해도 메인 무대는 아닌 어정쩡한 땅 말이다. 유럽의 몇 도시, 미국의 몇 도시에 사는 사람들만이 그들이 사는 곳이 메인 무대라고 여기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밖의 곳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유난히 뛰어나고 특별하면 그런 도시들로 ‘진출‘해야 한다. 떠나고 옮겨서 거기서 다시 인정받아야 한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특혜임이 틀림없었다. 지지난 세기, 지난 세기에 세계가 한 쪽으로 편입되어버렸기 때문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복사본이나 분점이다. 국수 고명처럼 색깔을 맞추기 위해 가끔 포함된다. 새삼 분한 건 아니고, 세계가 세계를 삼키면 그렇게 되는 거구나 싶을 뿐이다. - P242

다트는 썩 늘지 않고, 남자친구와도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안심 같은 게 있다는 게 신기하다. 통하지 않으므로 크게 해칠 수 없다. 통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일부가 내게 옮아붙지 않는다. 통하지 않으므로 내 안의 아주 나빠진 부분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통하지 않으므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아도 된다. 통하지 않으므로 기억나는 게 없다. 통하지 않으므로 눈이 마주쳐도 아프지 않다.
심지어는 모욕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가벼운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우리 사이의 끊어진, 혹은 존재한 적 없 는 회로를 짚어 보이며 남자친구를 화나게 하고 싶었다.
너는 나한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우리는 아주 미미한 관계다, 헤어지고 몇년 지나면 이름도 얼굴도 잊을 거다••··• 내가 상대방이었으면 결코 참지 않았을 암시들마저 남자친구는 그냥 넘겨버렸다. 분개하게 될 만큼 신경줄 이 굵은 인간이었다. - P250

"좋네."
이번에는 가볍지 않은 야유가 따라왔다. 그게 뭐야, 그 말을 누가 못해, 성의 없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주연이가 말해준 적이 있다. 출판사에서 ‘예뻐‘는 디자이너들의 궁극의 평가라 예쁜지 예쁘지 않은지로 몇번이나 표지가 엎어지고, ‘좋아‘는 편집자들의 궁극의 평가라 ‘괜찮아‘는 자주 있어도 ‘좋아‘는 웬만해선 입에 올려지지 않는다는 걸. 주연이가 진심이든 아니든 기뻤다. 노출된 몸에 부드러운 가운 같은 걸 덮어준 거나 다름없었다. - P282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 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 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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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안방 문으로 아빠가 옆으로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와불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빠에겐 어디까지나 아빠 집인 것이다. 누구와 몇 개의 오피스텔을 전전하든 결국 여기로 돌아온다. 엄마가 엄마 집으로, 엄마 몫으로 믿고 있는 여기로 말이다. 집으로 돈을 벌고 성공한 세대라서 엄마 아빠의 어그러진 결혼 생활이 집을 가운데 두고 계속되는 것이겠지만, 재인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아빠와 함께 살던 여자들은 집 없이 버려지는 게 아닐까? 집을 줄 리가 없다. 저 사람이. - P111

형편없음은 다른 종류의 형편없음과 언제나 일맥상통하므로 형편없음에 대한 예방주사는 일찍을수록 좋으리라고 재인은 생각하곤 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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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장 13절

‘무지개‘는 히브리어 ‘케세트‘로 활을 의미한다. 미드라쉬는 무지개를 ‘전쟁 무기인 활을 뒤집어 벽에 걸어 두신 것‘으로 비유하며, 하나님이 심판을 중단하고 평화를 선언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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