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와 필립의 아파트에 머물며 뉴욕을 걸어다녔을 때에도 늘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일들이 여기서 일어나고 그에 비하면 세계의 나머지는 공백 비슷한 거구나. 서울은, 한국은 멀리서 보면 세계의 파주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도시에 꽤 가까우면서도 어찌해도 메인 무대는 아닌 어정쩡한 땅 말이다. 유럽의 몇 도시, 미국의 몇 도시에 사는 사람들만이 그들이 사는 곳이 메인 무대라고 여기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밖의 곳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유난히 뛰어나고 특별하면 그런 도시들로 ‘진출‘해야 한다. 떠나고 옮겨서 거기서 다시 인정받아야 한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특혜임이 틀림없었다. 지지난 세기, 지난 세기에 세계가 한 쪽으로 편입되어버렸기 때문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복사본이나 분점이다. 국수 고명처럼 색깔을 맞추기 위해 가끔 포함된다. 새삼 분한 건 아니고, 세계가 세계를 삼키면 그렇게 되는 거구나 싶을 뿐이다. - P242

다트는 썩 늘지 않고, 남자친구와도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안심 같은 게 있다는 게 신기하다. 통하지 않으므로 크게 해칠 수 없다. 통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일부가 내게 옮아붙지 않는다. 통하지 않으므로 내 안의 아주 나빠진 부분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통하지 않으므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아도 된다. 통하지 않으므로 기억나는 게 없다. 통하지 않으므로 눈이 마주쳐도 아프지 않다.
심지어는 모욕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가벼운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우리 사이의 끊어진, 혹은 존재한 적 없 는 회로를 짚어 보이며 남자친구를 화나게 하고 싶었다.
너는 나한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우리는 아주 미미한 관계다, 헤어지고 몇년 지나면 이름도 얼굴도 잊을 거다••··• 내가 상대방이었으면 결코 참지 않았을 암시들마저 남자친구는 그냥 넘겨버렸다. 분개하게 될 만큼 신경줄 이 굵은 인간이었다. - P250

"좋네."
이번에는 가볍지 않은 야유가 따라왔다. 그게 뭐야, 그 말을 누가 못해, 성의 없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주연이가 말해준 적이 있다. 출판사에서 ‘예뻐‘는 디자이너들의 궁극의 평가라 예쁜지 예쁘지 않은지로 몇번이나 표지가 엎어지고, ‘좋아‘는 편집자들의 궁극의 평가라 ‘괜찮아‘는 자주 있어도 ‘좋아‘는 웬만해선 입에 올려지지 않는다는 걸. 주연이가 진심이든 아니든 기뻤다. 노출된 몸에 부드러운 가운 같은 걸 덮어준 거나 다름없었다. - P282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 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 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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