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저는 문학에 기대게 되는데, 문학은 그저 어떤 현상을 보여줄 뿐 그것의 원인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때로는 증언하되, 가끔은 증언조차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종종 심리학을 앞질러가기도 하고, 심리학이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영역에 먼저 불을 밝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이해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소수의 사례에만 몰두하게 되어 전반적인 흐름을 놓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자살이라는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심리학이든 문학이든, 또 다른 어떤 학문이든간에 어떤 도구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죽음을 탐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서로 경쟁자이기보다는 협력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P10
자살 연구의 선구자 중 한 명인만큼 그가 고안한 연구방법과 용어도 많습니다. 그중 그의 이론의 핵심이자 듣는 이의 마음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심리통psychache‘이라는 개념입니다. 심리통이란, 마음이나 정신을 뜻하는 psych와 고통을 뜻하는 ache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더는 견딜 수 없을만큼 심한 마음의 고통을 뜻합니다. 슈나이드먼은 친구이자 동료 심리학자였던 헨리 머레이(Henry A. Murray, 1893~1988)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심리적인 욕구가 좌절되면 개인에게는 우울감, 불안감,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발생하는데, 만약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심리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슈나이드먼이 보기에, 자살은 견딜 수 없는 마음속 고통의 결과였으며, 모든 자살자들은 자신의 핵심적인 가치가 좌절됨으로 인해 심하게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 P21
비록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안나가 병원을 짓거나 학교를 세우는 일 등에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며 성취에 대한 욕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언제나 그녀가 진정 절박하게 원하고 바랐던 것 일 순위는 타인과 따뜻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 연인에게 사랑받고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 P24
이처럼 한순간에 사교계에서 발붙일 곳을 잃고, 그전까지 가깝게 지내던 이들과의 관계를 잃어버리면서 친밀욕구가 좌절되자,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통해 양육의존욕구를 채우는 데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하면 원할수록 브론스키는 안나의 요구가 자신의 자유를 속박한다고 여기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늘어갑니다.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식고 있다고 믿으면서 고통스러워하던 바로 그 시기, 안나는 한편으로는 "난 사랑을 원해요. 그런데 그게 없어요. 그러니 모든 게 끝이에요!"라고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낮에는 일로, 밤에는 모르핀으로" 잠재웁니다. 즉, 브론스키와 자신의 관계가 끝났다는 느낌은 이미 안나에게 모르핀의 도움을 받아 달래야 할 정도로 큰 고통의 원천이 된 것이지요. - P25
에드윈 슈나이드먼은 총 네 권의 문학 작품을 추천했는데, 케이트 쇼팽의 『각성』,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 P19
슈나이드먼은 1993년 출간된 저서에서 ‘자살 각본‘을 소개하였습니다.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살에 이르기까지 마치 어떤 각본을 따르는 것처럼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슈나이드먼의 자살 각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 이 고통은 좌절된 심리적 욕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2. 외상적 자기 경멸 및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참지 않는 자기심상. 3. 극도로 제한된 생각, 비현실적으로 좁아진 행동 범위. 4. 고독감. 자신이 버림받았으며, 중요한 타인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느낌. 5.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무망감. 어떤 일을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 6. 인생을 떠나거나, 버리거나, 멈추는 것이 견딜 수 없는심리적인 고통을 멎게 하는 유일한(혹은 가능한 것중에서 가장 나은) 방법이라는 의식적인 결정. - P27
이 ‘자살의 각본‘을 안나의 경우에 대입하여 살펴봅시다. 안나의 경우, 친밀욕구와 양육의존욕구가 모두 좌절당함으로써 심리통을 경험하게 되었지요. 이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과거 출산으로 인해 병을 앓으며 "왜 난 죽지 않았을까"라고 되뇌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러자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의식 위로 급부상하죠. 이제 안나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다른 선택지들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살 이외의 해결책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깁니다. 기차역을 향해 달리며 안나는 생각합니다. 브론스키는 날 불행하게 하고, 나는 브론스키를 불행하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모든 수를 다 써보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요. 무엇을 해도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절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살자 특유의 사고방식이 느껴지지요. 이윽고 기차역 플랫폼을 배회하던 안나는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던집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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