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서사 없이 나아가는 이야기, 말없는 주인공. 작가님은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는 건가요. (웃음)

A. 제가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도 어떤 서사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보는 게 아니라 그 배우가 좋아서, 인물이 좋아서 보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적인 인간, ‘저거 진짜다‘ 싶은 표정과 말투를 보여주는 인물을 그리고 싶어요. 가끔 기계적인 캐릭터를 보게 될 때, 아마 대본이 기계적으로 흘렀기 때문에 연기도 대사도 기계적으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왜 그렇게 됐을까? 서사를 먼저 잡고 시작해서, 정해진 서사에 인간을 돌려버렸기 때문에 기계적인 얘기가 나온 게 아닐까. 인간을 먼저 잡고 쓰면 그 인간이 갈수 있는 만큼만 나아가기 때문에 기계적인 이야기로는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죠. 최근 <더 웨일>을 보고도 느꼈는데 영화나 드라마는 배우의 예술이더라고요. 결국 배우가 상황에 얼마나 몰입하는지, 어떤 인간을 제대로 보여주는지가 중요한데 작가는 그 베이스가 되어줘야 하잖아요. 배우가 꽃을 피운다. 그 꽃의 자양분을 대자. 저에게는 이 생각이 가장 크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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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글이 막힐 때 돌파하는 요령이 있을까요.

A. (단호하게) 안 써야 돼요. 일단 멈추고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글이 안 써진다는 건 지금 구조적으로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신호니까요. 하나에 몰두하다 보면 전체 구조가 안 보일 때가 있어요.
중요한 건 전체적인 설계예요. 부실 공사인데 끝까지 몰아붙인다면결국엔 균열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캐스팅이 엉망이라서, 재미가 없어서 등등 드라마가 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초기 설계와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가 딱데뷔 20주년이었는데 되돌아보니 이제껏 마감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은 상상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마감 이후의 시간에 대한 상상력 말이에요. 글이 막힐 땐 우선 마감일에 맞춰 호텔 예약을 해놓습니다. 마감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언제 하는지는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탈고한 후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버티는거죠. 한번은 동료 작가들과 "우리는 언제쯤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한 적이 있는데, 결론은 이 일을관두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거였어요. 어차피 해결할 수 없다면 친해질 수밖에 없는 이 친구를 잘 다독이면서 가야죠.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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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에서는 부끄러울 만큼 과장된 연기를 해야 한다. 왠지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연습실에서 내내 움츠러든 나의 태도 정도다. 하지만 거기서 부끄럽다고 그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좋은 연극을 만들어서 관객을 기쁘게 하려는, 출연 배우들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의 열의를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다. - P128

평소에 인터뷰 자리 같은 데서 이런저런 질문 끝에 "고바야시씨는 맡으신 배역의 성격을 그때그때 실생활에도 반영하는 타입이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니요, 그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럴 리가요." 같은 건방진 대답을 하곤 한다. 그야 말할 것도없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하며 맡았던 간호사라거나 선생님, 점술사, 카메라맨, 검사, 오이시 구라노스케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살다가 복수를 이루고 죽은 무사로, 그 아내는 조용히 내조하는 전형적인 일본 여성상으로 그려짐)의 아내 같은 배역을 실생활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는, 피차 모를 노릇이니까. 집에다 점집을 차릴 수도 없는 거고, 다른 사람도 아난 오이시 구라 노스케의 아내로 지내는 것도 어째 좀 이상하지않느냔 말이다. 실제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한 가지 역할로 지내는 시간이 비교적 짧기 때문에, 맡은 역에 정이 샘솟을지언정 집에서까지 그 역할로 지내는 일은 좀처럼 없다.
하지만 연극은! 아, 뭐 사실 지금 맡은 역할도 집까지 끌고 들어가기는 좀 그렇지만, 준비시간이 긴만큼(연습 기간은 약 한 달정도) 미션, 숙제, 좌절, 반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보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 역할과 나눈 이야기가 깊어지고 깊어지는 작업인 것이다. 하아, 이게연극의 참맛이겠지, 분명 드라마라면 그날 촬영한 장면은 그날로 끝, 일단 찍은 다음에는 아무리 반성해도 뒷북일 뿐이다. 그런데 연극은 그날 연습한 걸 다음 날 또 하게 된다. 집에 돌아와서헤매던 대사를 다시 확인하기도 하고, 대본을 뒤적이며 아아, 이건 그런 의미였구나 하고 깨닫기도 하며, 무슨 무슨 영화를 참고삼아 조금 봐볼까 같은 생각도 한다. 유난 떠는 듯 보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종일 연극에 대해 생각 안 하는 때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래봐야 고작 이 정도의 연기라니! 한심해, 한심하다. - P129

언제던가, 연극 무대를 기본으로 활동하는 대선배격의 여배우와 함께 영화를 찍고 있을 때였다.
"아, 영화는 정말 긴장되네. 연극이라면 말이야, 뭐 이제는 생활의 일부 나 마찬가지로 양치질을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을 텐데."
(중략)
양치질을 경지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멀지만….. 오긴 오는 걸까? 그런 날이? 어떨까, 양치질이라니. 그러니까 양치질 같은 거란 말이지 그것 참. - P131

이그런, 약간 모자란 선배 포지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배 기질의 소심한 내가 진땀을 흘릴 만한 일이 최근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명.
확실히 텔레비전과 영화 현장에서 조명 효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조명 스태프의 기분을 건드리면 촬영이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건방진 배우 바로 옆으로 조명 기구가 떨어졌다‘든가 하는(물론 그런 무서운 사태는 현실에서는 본 적 없지만) 조명 스태프의무용담도 가끔 주워듣는다. 카메라가 없으면 영상을 볼 수 없을테고, 녹음 스태프가 없다면 대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없다면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의상 스태프나 소품 스태프를 비롯해 누구 하나 없어서는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기에하나같이 다 소중하다. 하지만 스튜디오에 모인 모든 것(배우를포함해)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일은 조명 스태프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배우가 이야기 속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조명 스태프에 의해 절반 이상좌우된다.
실제로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때는 촬영 전에 장면 분할이나조명의 적정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배우를 대신해 조감독들을제자리에 세워놓고 모니터로 체크하곤 하는데, 수면 부족이 드러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조감독도 - P149

조명 스태프의 도움을 받으면 ‘엄청난 드라마를 짊어진 영웅‘으로 보이게 된다. 눈에 반짝반짝 별이 박힌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조명 스태프는 조명을 비추는 각도, 빛의 세기 등다양한 기술을 구사해 배우들을 매력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야기속에 담기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눈 밑 다크 서클이나 턱에살짝 올라온 뾰루지, 또는 기미나 주근깨 같은 잡티도 조명만으로 감출 수 있다. 정말이지 놀랄 일이다. 일반적으로는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한테 조명을 더 많이 비추는 것 같은데, 그건스스로 빛을 내는 젊은이보다 겉보기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은연장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뭐 그런 거겠지. 확실히 여러 모로 손이 더 가는 만큼 실제 내 모습의 몇 배로 아름답게 촬영된 적이여러 번이라,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이 더 가게만드는 탓에 주눅이 들어버리는 건 역시, 선배 배우로서 경력을쌓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감정이겠지.
벌써부터도 때로는 집중적으로 내게 조명이 쏟아지는지라, 반사판을 양손에 든 스태프들한테 둘러싸이곤 한다. 그것도, 얼굴바로 옆에서 그러고 있다. 다시 말해 스태프들의 시선이 모두 내얼굴에 쏟아지게 된다는 얘기다. 반사판을 든 스태프는 "아, 좀더 가까이 가봐." 하는 지시를 조명 감독한테 받는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배우 중에는 ‘자기한테 조명이 많이 비춰져서 행복하다‘라거나 - P150

‘더 비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런 기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보다는 ‘손이 가게해서 미안하다‘는 심정이 더 크다. 하긴 뭐 조명 스태프 입장에서도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매단 인간이 화면 속에 있는 것보다는말끔한 얼굴을 내보내는 쪽이 작품을 위해서도 분명 더 낫다고판단해서 그렇게 해준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죄송합니다!
그런 소극적인 기분을 촬영 중간에 메이크업 담당에게 털어놓으니 "좋잖아요, 예쁘게 찍히면. 게다가 반사판 차원을 넘어서- 기술도 있다고요. 이제 ‘선생님‘ 레벨이 되면 바닥에 아예 하얀 천을 깔아버리거든요." 하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잿빛 아스팔트나 갈색 마루보다는, 바닥이 하얀 쪽이 훨씬 아름답게 찍힐것이다. 아, 스키장에서 만났을 때는 멋있었는데, 또는 예뻤는데,
뭐 이런 것도 바닥의 눈이 반사판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어쨌든 그 자리에서는 반사판을 넘어서 그렇게까지 손이 가게 하다니 더욱 미안한 일이라느니, 그 지경이면 은퇴해야겠다느니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며칠 뒤 충격적인 현장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는 와중에 광고를 찍을 일이 있었다. 봄에 내보낼 광고라 그런지, 선풍기 바람으로 소품으로 가져다둔나무가 살랑이는 장면을 연출하고, 조명으로 살짝 눈부신 봄 햇 - P151

살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상큼한 인상의 세트였다. 그리고 모든준비를 마치고 내가 세트에 들어서자・・・・・… 내가 설 바로 그 자리에 무려 ‘선생님‘ 전용인 눈부시게 하얀 천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거듭, 죄송합니다.
손이 가게 해서, 죄송합니다.
은퇴 같은 말을 떠벌이기는 했지만, 하얀 천 덕분에 상큼한광고가 완성되었습니다.
어쨌든, 부디, 나에게 빛을 비춰주세요. 비춰주시는 대로 다 받겠습니다. 보채지 않고 주시는 만큼만 받을게요. 빛을 비춰주시고자 하는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앞으로도 손발을 맞춰서 좋은작품을 만들어갑시다. 모자란 선배지만 노력할게요.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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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뒤 드디어 에피소드 ‘해 뜨는 집(House of the Rising Sun)‘의 대본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빨리 대본을 넘겨보았다. 하지만 대사는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방송사에서 당연히 반대했겠지.
미국 사람들은 특히 자막 읽는 걸 싫어하는데………….
그때 굵은 글씨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한국어로 말하는 선‘
순간 모든 게 멈췄다. 거실에 켜져 있는 TV 소리가 귓등에서 멀어지면서내 눈에는 오로지 대본만 들어왔다. 나는 다시 확인했다.
‘신넘버 24. 한국의 아파트, 욕실, 플래시백, 한국어로 말하는 선 ‘
분명히 서울에서 벌어지는 회상 신이었다. 내 눈으로 읽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대본이 들어 있던 봉투를 다시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한국어 번역 대본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믿기지가 않아 잭 벤더(Jack Bender)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웃으면서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다니!!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소리도 못 질렀다. 미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전체 대사의 50퍼센트를 다른 나라 말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한국말이!
나는 데이먼을 포함한 <로스트> 프로듀서들의 실험정신에 감탄했다.
ABC 사장 스티븐 맥퍼슨(Steven McPherson)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무심코 던진 나의 질문 한마디가 이런 자랑스러운 일을 이뤄냈는지, 데이먼이미리 염두에 두었던 아이디어를 내가 정확히 짚어낸 것인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성공이건 그 시초는 우연한 발견과 기본에 충실한 생각이 아니던가! 확실한 것은 나로 인해 한국인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말을 하고 영어 자막처리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 P181

"선이 들고 있어야 하는 여권!"
소품팀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 여권은 빨간색이 아니라 진한 녹색이라고요! 빨리 바꿔다줘요."
"이런…………."
이번에는 소품팀이 나보다 더 놀라며 당황스러워했다. 조감독과 소품팀은 서로 상의를 했지만 당장 한국 여권을 구해올 수는 없었다. 조감독은 스케줄 때문에 촬영을 지체할 수 없으니 여권을 가방 속에 넣고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그 정도도 구별을 못하다니! 여권을 준비할 때는 당연히 국적부터 확인해야 할 게 아닌가. 속상하고 답답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감정 신이 연달아 있어 눈물 흘리는 컷을 몰아서 찍어야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달리샷(dolly shot, 레일 위에서 카메라를 이동하며 찍는 장면)이 많아 NG가 잦았다. 펑펑 우는 장면만 해도 열다섯 번을 넘게 찍었다. 얼굴은 점점 푸석하게 부어올랐다. 잠시 진수 단독 신을 찍는 참에 얼음찜질을 하며 마음을달랬다.
"액션!"
이번에는 선이 진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고 울면서 다가가는 장면이었다. 바로 그때 진의 손에 들려 있는 빨간 여권이 눈에 들어왔다.
"스톱! 여권을 보이게 찍으면 안 돼. 그건 중국 여권이야, 댄"
나도 모르게 촬영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제야 "컷!"이 떨어졌다. 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많이 찍혔을 텐데………. 어떡하지?" - P187

또다른 거대한 숙제가 펼쳐졌다. <로스트>에서 내 생명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 〈로스트〉의 생존자로 살아남는 것. 드라마가 현실이 되어 우리 안에서도 서바이벌이 시작된 것이다.
"<로스트>에 관한 기사에서 프로듀서들이 자꾸 48명의 생존자 얘기라고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13명인데 말이야. 이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우리는 내 트레일러 안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건 엑스트라를 포함해서 48명이라는 얘기 아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안은 내 말을 단호히 잘랐다.
"아냐, 프로듀서들이 말해줬어. 생존자를 한 명씩 죽일 거래. 그러고는다른 인물들을 캐스팅해 배우들을 서서히 교체해 갈 거야. 이해는 돼. 스토리를 봐서는 우리가 다 안전하게 살아남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재미를 위해서라도 극적인 장치를 두어야겠지. 하지만 솔직히 해고당하는 건 너무 싫어.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도 너무 슬퍼!" - P205

아까와는 다르게 슬퍼하는 이안을 보자 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불과 1년 전, 7년짜리 출연계약서를 두고 계약연수를 줄일 수는 없냐고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지금은 내 역할이 빨리 죽을까봐 걱정하고 있다.
과연 선이란 인물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풀 수 있는 숙제도 아닌데 벌써부터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만약꼭 정리를 해야 한다면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늘 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한다.
그날 촬영장은 발칵 뒤집혔다. 이안이 모두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마침 다 함께 나오는 장면을 찍는 날이라 출연 배우들이 다들 모여 있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모여 수군거렸다. 왜 이안이 첫 희생자인지에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처음부터 이런 내용이었으면 <로스트>에 출연하지 않았을 거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오며 더러는 화를 내기도 하고 또 더러는 자신이 이안의 뒤를잇게 될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촬영장은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어색했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들은 다음은 누가 죽을까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거야. 그러면 이야기 구조도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만 집중되겠지."
경험이 없는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모르는 편이 속편했다.
"대단한 제작자들이야. 배우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천재적인 기법이네. 칼자루는 이제 그들 손에 쥐어져 있어. 이러면 우리가 재계약을 할 때도 문제가 될 수 있어." - P203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말하는데 다 맞는 이야기 같았다. 드라마가 히트하면 배우들의 힘이 세지는 게 현실이다. 미국 드라마의 특성상 시즌제를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배우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문제 때문에 방송사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말도 있었다. 시청률이안정권에 들어가는 드라마는 대부분 3년 후 배우들이 재계약을 하면서 출연료를 올린다. 그 배우들이 필요한 방송사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어쩌다 있는 연장방송에서나생기는 일이지만, 미국은 한 번 시작한 드라마는 3~5년씩 계속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프렌즈> 배우들은 끝날 무렵 편당10억 원을 받았다. <로스트>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주요인물들이 하나씩죽어가야 한다면, <로스트>에서 생존하기 위해 배우들은 방송사에 많은 금액을 요구할 수 없다. 돈을 떠나서, <로스트>가 아직 방송되고 있는데 자기역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시즌마다 한 명씩 잘리는 거야?"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모두들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들 <로스트>전에도 활발하게 활동해 온 배우들이고 <로스트> 이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배우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들 불안해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릴 스트립 같은 대배우도 영화를 찍을 때마다 ‘이게 내 마지막 영화야 라고 생각하면서 촬영한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캐스팅이 되어야 연기를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
"아냐, 다음 시즌에는 더 많이 죽을 거야."
뒤에 서 있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 P204

"내년 초반에 한 명이 더 희생되고 후반에도 몇 명 더 죽는대. 나도 거기까지밖에 몰라."
우리는 드라마 안의 캐릭터들처럼 내일의 생존을 걱정하면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시즌2가 시작되면서 나는 집을 구입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전에는 렌트를 해서 살았지만 이젠 집을 사서 장기전에 돌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내 마음에 쏙 들 만한 집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기분 좋게 촬영장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촬영장이 다시 술렁이고 있었다. 또다른 희생자가 나온 것이었다. 두 번째 희생자는 새넌 역할의 메기 그레이스였다. 메기는 시즌2 초반에 총을 맞고 죽는다고 했다. 우리는 〈로스트>의 현실을 분명하게 깨달아갔다.
그리고 이안의 말처럼, 새로운 배우 세 명이 캐스팅되었다. 아나 역할에미셀 로드리게즈(Michelle Rodriguez), 리비 역할에 신시아 와트로스(Cynthia M. Watros) 그리고 미스터 에코 역할에는 아데왈리 아키뉴오예악바제(Adewale Akinnuoye-Agbaje)가 새로 들어왔다. 이 캐릭터들은 추락한 비행기 뒷부분에 앉아 있던 생존자로 설정되었다.
촬영하러 나올 때마다 드라마와 관계없는 루머에 골치가 아팠고, 다음 희생자를 추측하느라 도저히 촬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화를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도 늘 수군거리는 배우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때로는 제작진을 욕하고, 때로는 드라마 내용을 비난하고, 서로를의심하기도 했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상처가 덧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엔 지독한 고름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나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라 서성여야 했다. - P206

‘오늘은 무슨 얘기를 들어도 꿈쩍 안 할 거야!‘
집을 나설 때마다 마음을 다졌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뉴욕에서 같이 연극을 했던 작가에게 이메일이 날아왔다. 연극 <야치오의 발라드>를 함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미국 연극계에 동양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표현하는 필립 칸 고탄다(Philip Kan Gotanda, 일본계 미국인 극작가)처럼 연극을 해보자며 대본을 보내주었다.
"최근에 쓴 연극(Play) 대본이야."
‘Play‘ 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연극은 영어로 ‘Play‘ 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플레이는 ‘놀다, 장난하다‘는 뜻도 있다. 연극 연습을 할때나 공연을 코앞에 둔 배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리고 대본 속의 세계에 빠져 목숨을 걸고 혼신을 다한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료 배우들이 농담 삼아 하던 말이 떠올랐다.
"It‘s only a Play, so let‘s play! (이건 연극일 뿐이야. 그러니까 놀자고!)"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로스트>가 더 이상 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나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작품을 통해 더 좋은 기회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날 나는 하와이에 집을 구입하고 발코니에 앉아 아름다운 일몰을 즐겼다. - P207

촬영 8일째, 상대역 칼 펜과 함께 나오는 장면을 찍던 이날, 마거릿은 감독으로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산드라는 커피 파는 커트를 보자마자 좋은 느낌을 받는다. 칼과 대사를 맞추고 있을 때 마거릿이 다가왔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알아? 내가 캐스팅을 너무 잘한 것 같아. 둘이 진짜로 사귀면 너무 예쁜 커플이 될 거야!"
멀쩡히 연습하던 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들어놓고 갔다. 칼과 나는 어색한 순간을 웃음으로 넘기고 곧 촬영에 들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눈을 쳐다보자마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산드라하고 커트가 아니라 윤진과 칼이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컷!" 소리를 듣고 둘 다다시 한 번 가자고 부탁했다.
"왜? 나는 너무 좋았는데!"
마거릿은 정말 만족한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이 고비를 넘겼다. 쉬는 동안에도 아무 말 못하고 어색하게 주변만 맴돌았다.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서로 눈을 피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진짜로 좋아하는 사이처럼! 다음 장면을 찍으려고 준비를 하는데 마거릿이다시 와서 한마디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동공이 커진대. 신기하지 않아? 눈동자가 커지는걸 화면에서 보고 싶어."
황당한 주문에 우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액션!"
내가 칼에게 다가가 대사를 해야 했다.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칼과 눈이 마주치자 감당이 안 되어 피하기까지 했다. - P263

겨우 장면을 끝내고 나는 응석을 피웠다.
"이건 아니잖아!"
칼도 참고 있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너무 좋았어!"
마거릿은 완벽했다며 박수까지 쳤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했다.
"칼 너무 귀엽지 않아? 널 좋아하는 거 같아!"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바로 그때 우리 귀여운 감독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마거릿은 마치 내가 연기를 공부하는 학생인 듯 지도해 주었다. 초보 연기자들에게서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고 진짜 상황을 만들어주는 연기 선생님처럼.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적당한 테크닉을 쓰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던 내게 다시 접하는 이 방법은 오히려 신선하고 새롭게 다가왔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산드라가 되어 커트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마거릿하고 나는 오랫동안 서로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품은 따뜻했다. 나처럼 그녀 안에도 열정이 담겨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만나서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도록 서로 열심히 일하고 할리우드에서 힘을 키워나가자고 약속했다. 그녀는 분명히좋은 감독이 될 것이다. 아니, 좋은 감독이 되든 못 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그 모습 자체가 소중한 것이니까! 그녀는 나의 영원한 우상, 올 아메리칸 걸! - P265

"Be the man you want to marry!"
일순간 스튜디오가 정적에 잠기는가 싶더니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볼펜을 찾아 들고 이 말을 적어두었다.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되라!" 정말 멋진 말이다. 나도 남자가 나를 ‘구해주길 바라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스스로를 구할 생각은 왜 못했을까?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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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자기가 컨트롤하는 게 아니야. 마음을 열고 있으면 일이 알아서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 P79

"뭐가?"
의아한 듯한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수족관 세트 장면이오."
"그게 왜? 난 좋았는데…………."
"아니…………. 그날 눈물이 제대로 안 나와서요."
"난 네가 고함 지른 게 이방희 감정에 더 맞는다고 생각해서 OK 했는데?"
예상 밖의 답이었다.
"그것 때문에 여태껏 기분이 별로니? 윤진아, 특히 주인공은 영화 전체에 나오는 캐릭터의 흐름을 봐야지 한 신, 한 신만 보고 힘을 주다보면 오히려 관객들이 부담스러워 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작은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 그 일에 연연해서 오늘까지 기분을 망치면 오늘 연기는 어떻게 할래? 기억해라. 큰 배우는 전체를 본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네 자신을 못 믿겠으면 감독이라도 믿어. 하하하!"
큰 배우는 전체를 본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전체를 봐라! 강제규감독의 말은 <쉬리>라는 영화의 흐름, 이명현이라는 인물의 흐름을 다시 보게 했고 내가 영화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야 하는지 깨닫게 했다. 비로소 한 신 한 신에 최선을 다해 연기하되 작은 실수에 오래도록 마음을 뺏기지 않으며 연기할 수 있었고, 무사히 이명현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습관처럼 강제규 감독의 모습을 관찰하게 됐다. 그는 어려운 일을 앞두고 오히려 침착해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침착해질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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