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에서는 부끄러울 만큼 과장된 연기를 해야 한다. 왠지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연습실에서 내내 움츠러든 나의 태도 정도다. 하지만 거기서 부끄럽다고 그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좋은 연극을 만들어서 관객을 기쁘게 하려는, 출연 배우들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의 열의를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다. - P128
평소에 인터뷰 자리 같은 데서 이런저런 질문 끝에 "고바야시씨는 맡으신 배역의 성격을 그때그때 실생활에도 반영하는 타입이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니요, 그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럴 리가요." 같은 건방진 대답을 하곤 한다. 그야 말할 것도없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하며 맡았던 간호사라거나 선생님, 점술사, 카메라맨, 검사, 오이시 구라노스케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살다가 복수를 이루고 죽은 무사로, 그 아내는 조용히 내조하는 전형적인 일본 여성상으로 그려짐)의 아내 같은 배역을 실생활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는, 피차 모를 노릇이니까. 집에다 점집을 차릴 수도 없는 거고, 다른 사람도 아난 오이시 구라 노스케의 아내로 지내는 것도 어째 좀 이상하지않느냔 말이다. 실제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한 가지 역할로 지내는 시간이 비교적 짧기 때문에, 맡은 역에 정이 샘솟을지언정 집에서까지 그 역할로 지내는 일은 좀처럼 없다. 하지만 연극은! 아, 뭐 사실 지금 맡은 역할도 집까지 끌고 들어가기는 좀 그렇지만, 준비시간이 긴만큼(연습 기간은 약 한 달정도) 미션, 숙제, 좌절, 반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보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 역할과 나눈 이야기가 깊어지고 깊어지는 작업인 것이다. 하아, 이게연극의 참맛이겠지, 분명 드라마라면 그날 촬영한 장면은 그날로 끝, 일단 찍은 다음에는 아무리 반성해도 뒷북일 뿐이다. 그런데 연극은 그날 연습한 걸 다음 날 또 하게 된다. 집에 돌아와서헤매던 대사를 다시 확인하기도 하고, 대본을 뒤적이며 아아, 이건 그런 의미였구나 하고 깨닫기도 하며, 무슨 무슨 영화를 참고삼아 조금 봐볼까 같은 생각도 한다. 유난 떠는 듯 보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종일 연극에 대해 생각 안 하는 때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래봐야 고작 이 정도의 연기라니! 한심해, 한심하다. - P129
언제던가, 연극 무대를 기본으로 활동하는 대선배격의 여배우와 함께 영화를 찍고 있을 때였다. "아, 영화는 정말 긴장되네. 연극이라면 말이야, 뭐 이제는 생활의 일부 나 마찬가지로 양치질을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을 텐데." (중략) 양치질을 경지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멀지만….. 오긴 오는 걸까? 그런 날이? 어떨까, 양치질이라니. 그러니까 양치질 같은 거란 말이지 그것 참. - P131
이그런, 약간 모자란 선배 포지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배 기질의 소심한 내가 진땀을 흘릴 만한 일이 최근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명. 확실히 텔레비전과 영화 현장에서 조명 효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조명 스태프의 기분을 건드리면 촬영이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건방진 배우 바로 옆으로 조명 기구가 떨어졌다‘든가 하는(물론 그런 무서운 사태는 현실에서는 본 적 없지만) 조명 스태프의무용담도 가끔 주워듣는다. 카메라가 없으면 영상을 볼 수 없을테고, 녹음 스태프가 없다면 대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없다면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의상 스태프나 소품 스태프를 비롯해 누구 하나 없어서는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기에하나같이 다 소중하다. 하지만 스튜디오에 모인 모든 것(배우를포함해)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일은 조명 스태프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배우가 이야기 속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조명 스태프에 의해 절반 이상좌우된다. 실제로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때는 촬영 전에 장면 분할이나조명의 적정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배우를 대신해 조감독들을제자리에 세워놓고 모니터로 체크하곤 하는데, 수면 부족이 드러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조감독도 - P149
조명 스태프의 도움을 받으면 ‘엄청난 드라마를 짊어진 영웅‘으로 보이게 된다. 눈에 반짝반짝 별이 박힌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조명 스태프는 조명을 비추는 각도, 빛의 세기 등다양한 기술을 구사해 배우들을 매력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야기속에 담기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눈 밑 다크 서클이나 턱에살짝 올라온 뾰루지, 또는 기미나 주근깨 같은 잡티도 조명만으로 감출 수 있다. 정말이지 놀랄 일이다. 일반적으로는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한테 조명을 더 많이 비추는 것 같은데, 그건스스로 빛을 내는 젊은이보다 겉보기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은연장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뭐 그런 거겠지. 확실히 여러 모로 손이 더 가는 만큼 실제 내 모습의 몇 배로 아름답게 촬영된 적이여러 번이라,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이 더 가게만드는 탓에 주눅이 들어버리는 건 역시, 선배 배우로서 경력을쌓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감정이겠지. 벌써부터도 때로는 집중적으로 내게 조명이 쏟아지는지라, 반사판을 양손에 든 스태프들한테 둘러싸이곤 한다. 그것도, 얼굴바로 옆에서 그러고 있다. 다시 말해 스태프들의 시선이 모두 내얼굴에 쏟아지게 된다는 얘기다. 반사판을 든 스태프는 "아, 좀더 가까이 가봐." 하는 지시를 조명 감독한테 받는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배우 중에는 ‘자기한테 조명이 많이 비춰져서 행복하다‘라거나 - P150
‘더 비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런 기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보다는 ‘손이 가게해서 미안하다‘는 심정이 더 크다. 하긴 뭐 조명 스태프 입장에서도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매단 인간이 화면 속에 있는 것보다는말끔한 얼굴을 내보내는 쪽이 작품을 위해서도 분명 더 낫다고판단해서 그렇게 해준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죄송합니다! 그런 소극적인 기분을 촬영 중간에 메이크업 담당에게 털어놓으니 "좋잖아요, 예쁘게 찍히면. 게다가 반사판 차원을 넘어서- 기술도 있다고요. 이제 ‘선생님‘ 레벨이 되면 바닥에 아예 하얀 천을 깔아버리거든요." 하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잿빛 아스팔트나 갈색 마루보다는, 바닥이 하얀 쪽이 훨씬 아름답게 찍힐것이다. 아, 스키장에서 만났을 때는 멋있었는데, 또는 예뻤는데, 뭐 이런 것도 바닥의 눈이 반사판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어쨌든 그 자리에서는 반사판을 넘어서 그렇게까지 손이 가게 하다니 더욱 미안한 일이라느니, 그 지경이면 은퇴해야겠다느니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며칠 뒤 충격적인 현장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는 와중에 광고를 찍을 일이 있었다. 봄에 내보낼 광고라 그런지, 선풍기 바람으로 소품으로 가져다둔나무가 살랑이는 장면을 연출하고, 조명으로 살짝 눈부신 봄 햇 - P151
살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상큼한 인상의 세트였다. 그리고 모든준비를 마치고 내가 세트에 들어서자・・・・・… 내가 설 바로 그 자리에 무려 ‘선생님‘ 전용인 눈부시게 하얀 천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거듭, 죄송합니다. 손이 가게 해서, 죄송합니다. 은퇴 같은 말을 떠벌이기는 했지만, 하얀 천 덕분에 상큼한광고가 완성되었습니다. 어쨌든, 부디, 나에게 빛을 비춰주세요. 비춰주시는 대로 다 받겠습니다. 보채지 않고 주시는 만큼만 받을게요. 빛을 비춰주시고자 하는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앞으로도 손발을 맞춰서 좋은작품을 만들어갑시다. 모자란 선배지만 노력할게요.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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