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뒤 드디어 에피소드 ‘해 뜨는 집(House of the Rising Sun)‘의 대본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빨리 대본을 넘겨보았다. 하지만 대사는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방송사에서 당연히 반대했겠지.
미국 사람들은 특히 자막 읽는 걸 싫어하는데………….
그때 굵은 글씨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한국어로 말하는 선‘
순간 모든 게 멈췄다. 거실에 켜져 있는 TV 소리가 귓등에서 멀어지면서내 눈에는 오로지 대본만 들어왔다. 나는 다시 확인했다.
‘신넘버 24. 한국의 아파트, 욕실, 플래시백, 한국어로 말하는 선 ‘
분명히 서울에서 벌어지는 회상 신이었다. 내 눈으로 읽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대본이 들어 있던 봉투를 다시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한국어 번역 대본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믿기지가 않아 잭 벤더(Jack Bender)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웃으면서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다니!!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소리도 못 질렀다. 미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전체 대사의 50퍼센트를 다른 나라 말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한국말이!
나는 데이먼을 포함한 <로스트> 프로듀서들의 실험정신에 감탄했다.
ABC 사장 스티븐 맥퍼슨(Steven McPherson)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무심코 던진 나의 질문 한마디가 이런 자랑스러운 일을 이뤄냈는지, 데이먼이미리 염두에 두었던 아이디어를 내가 정확히 짚어낸 것인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성공이건 그 시초는 우연한 발견과 기본에 충실한 생각이 아니던가! 확실한 것은 나로 인해 한국인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말을 하고 영어 자막처리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 P181

"선이 들고 있어야 하는 여권!"
소품팀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 여권은 빨간색이 아니라 진한 녹색이라고요! 빨리 바꿔다줘요."
"이런…………."
이번에는 소품팀이 나보다 더 놀라며 당황스러워했다. 조감독과 소품팀은 서로 상의를 했지만 당장 한국 여권을 구해올 수는 없었다. 조감독은 스케줄 때문에 촬영을 지체할 수 없으니 여권을 가방 속에 넣고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그 정도도 구별을 못하다니! 여권을 준비할 때는 당연히 국적부터 확인해야 할 게 아닌가. 속상하고 답답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감정 신이 연달아 있어 눈물 흘리는 컷을 몰아서 찍어야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달리샷(dolly shot, 레일 위에서 카메라를 이동하며 찍는 장면)이 많아 NG가 잦았다. 펑펑 우는 장면만 해도 열다섯 번을 넘게 찍었다. 얼굴은 점점 푸석하게 부어올랐다. 잠시 진수 단독 신을 찍는 참에 얼음찜질을 하며 마음을달랬다.
"액션!"
이번에는 선이 진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고 울면서 다가가는 장면이었다. 바로 그때 진의 손에 들려 있는 빨간 여권이 눈에 들어왔다.
"스톱! 여권을 보이게 찍으면 안 돼. 그건 중국 여권이야, 댄"
나도 모르게 촬영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제야 "컷!"이 떨어졌다. 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많이 찍혔을 텐데………. 어떡하지?" - P187

또다른 거대한 숙제가 펼쳐졌다. <로스트>에서 내 생명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 〈로스트〉의 생존자로 살아남는 것. 드라마가 현실이 되어 우리 안에서도 서바이벌이 시작된 것이다.
"<로스트>에 관한 기사에서 프로듀서들이 자꾸 48명의 생존자 얘기라고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13명인데 말이야. 이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우리는 내 트레일러 안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건 엑스트라를 포함해서 48명이라는 얘기 아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안은 내 말을 단호히 잘랐다.
"아냐, 프로듀서들이 말해줬어. 생존자를 한 명씩 죽일 거래. 그러고는다른 인물들을 캐스팅해 배우들을 서서히 교체해 갈 거야. 이해는 돼. 스토리를 봐서는 우리가 다 안전하게 살아남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재미를 위해서라도 극적인 장치를 두어야겠지. 하지만 솔직히 해고당하는 건 너무 싫어.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도 너무 슬퍼!" - P205

아까와는 다르게 슬퍼하는 이안을 보자 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불과 1년 전, 7년짜리 출연계약서를 두고 계약연수를 줄일 수는 없냐고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지금은 내 역할이 빨리 죽을까봐 걱정하고 있다.
과연 선이란 인물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풀 수 있는 숙제도 아닌데 벌써부터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만약꼭 정리를 해야 한다면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늘 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한다.
그날 촬영장은 발칵 뒤집혔다. 이안이 모두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마침 다 함께 나오는 장면을 찍는 날이라 출연 배우들이 다들 모여 있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모여 수군거렸다. 왜 이안이 첫 희생자인지에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처음부터 이런 내용이었으면 <로스트>에 출연하지 않았을 거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오며 더러는 화를 내기도 하고 또 더러는 자신이 이안의 뒤를잇게 될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촬영장은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어색했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들은 다음은 누가 죽을까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거야. 그러면 이야기 구조도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만 집중되겠지."
경험이 없는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모르는 편이 속편했다.
"대단한 제작자들이야. 배우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천재적인 기법이네. 칼자루는 이제 그들 손에 쥐어져 있어. 이러면 우리가 재계약을 할 때도 문제가 될 수 있어." - P203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말하는데 다 맞는 이야기 같았다. 드라마가 히트하면 배우들의 힘이 세지는 게 현실이다. 미국 드라마의 특성상 시즌제를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배우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문제 때문에 방송사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말도 있었다. 시청률이안정권에 들어가는 드라마는 대부분 3년 후 배우들이 재계약을 하면서 출연료를 올린다. 그 배우들이 필요한 방송사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어쩌다 있는 연장방송에서나생기는 일이지만, 미국은 한 번 시작한 드라마는 3~5년씩 계속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프렌즈> 배우들은 끝날 무렵 편당10억 원을 받았다. <로스트>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주요인물들이 하나씩죽어가야 한다면, <로스트>에서 생존하기 위해 배우들은 방송사에 많은 금액을 요구할 수 없다. 돈을 떠나서, <로스트>가 아직 방송되고 있는데 자기역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시즌마다 한 명씩 잘리는 거야?"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모두들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들 <로스트>전에도 활발하게 활동해 온 배우들이고 <로스트> 이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배우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들 불안해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릴 스트립 같은 대배우도 영화를 찍을 때마다 ‘이게 내 마지막 영화야 라고 생각하면서 촬영한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캐스팅이 되어야 연기를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
"아냐, 다음 시즌에는 더 많이 죽을 거야."
뒤에 서 있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 P204

"내년 초반에 한 명이 더 희생되고 후반에도 몇 명 더 죽는대. 나도 거기까지밖에 몰라."
우리는 드라마 안의 캐릭터들처럼 내일의 생존을 걱정하면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시즌2가 시작되면서 나는 집을 구입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전에는 렌트를 해서 살았지만 이젠 집을 사서 장기전에 돌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내 마음에 쏙 들 만한 집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기분 좋게 촬영장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촬영장이 다시 술렁이고 있었다. 또다른 희생자가 나온 것이었다. 두 번째 희생자는 새넌 역할의 메기 그레이스였다. 메기는 시즌2 초반에 총을 맞고 죽는다고 했다. 우리는 〈로스트>의 현실을 분명하게 깨달아갔다.
그리고 이안의 말처럼, 새로운 배우 세 명이 캐스팅되었다. 아나 역할에미셀 로드리게즈(Michelle Rodriguez), 리비 역할에 신시아 와트로스(Cynthia M. Watros) 그리고 미스터 에코 역할에는 아데왈리 아키뉴오예악바제(Adewale Akinnuoye-Agbaje)가 새로 들어왔다. 이 캐릭터들은 추락한 비행기 뒷부분에 앉아 있던 생존자로 설정되었다.
촬영하러 나올 때마다 드라마와 관계없는 루머에 골치가 아팠고, 다음 희생자를 추측하느라 도저히 촬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화를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도 늘 수군거리는 배우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때로는 제작진을 욕하고, 때로는 드라마 내용을 비난하고, 서로를의심하기도 했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상처가 덧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엔 지독한 고름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나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라 서성여야 했다. - P206

‘오늘은 무슨 얘기를 들어도 꿈쩍 안 할 거야!‘
집을 나설 때마다 마음을 다졌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뉴욕에서 같이 연극을 했던 작가에게 이메일이 날아왔다. 연극 <야치오의 발라드>를 함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미국 연극계에 동양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표현하는 필립 칸 고탄다(Philip Kan Gotanda, 일본계 미국인 극작가)처럼 연극을 해보자며 대본을 보내주었다.
"최근에 쓴 연극(Play) 대본이야."
‘Play‘ 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연극은 영어로 ‘Play‘ 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플레이는 ‘놀다, 장난하다‘는 뜻도 있다. 연극 연습을 할때나 공연을 코앞에 둔 배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리고 대본 속의 세계에 빠져 목숨을 걸고 혼신을 다한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료 배우들이 농담 삼아 하던 말이 떠올랐다.
"It‘s only a Play, so let‘s play! (이건 연극일 뿐이야. 그러니까 놀자고!)"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로스트>가 더 이상 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나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작품을 통해 더 좋은 기회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날 나는 하와이에 집을 구입하고 발코니에 앉아 아름다운 일몰을 즐겼다. - P207

촬영 8일째, 상대역 칼 펜과 함께 나오는 장면을 찍던 이날, 마거릿은 감독으로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산드라는 커피 파는 커트를 보자마자 좋은 느낌을 받는다. 칼과 대사를 맞추고 있을 때 마거릿이 다가왔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알아? 내가 캐스팅을 너무 잘한 것 같아. 둘이 진짜로 사귀면 너무 예쁜 커플이 될 거야!"
멀쩡히 연습하던 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들어놓고 갔다. 칼과 나는 어색한 순간을 웃음으로 넘기고 곧 촬영에 들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눈을 쳐다보자마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산드라하고 커트가 아니라 윤진과 칼이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컷!" 소리를 듣고 둘 다다시 한 번 가자고 부탁했다.
"왜? 나는 너무 좋았는데!"
마거릿은 정말 만족한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이 고비를 넘겼다. 쉬는 동안에도 아무 말 못하고 어색하게 주변만 맴돌았다.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서로 눈을 피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진짜로 좋아하는 사이처럼! 다음 장면을 찍으려고 준비를 하는데 마거릿이다시 와서 한마디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동공이 커진대. 신기하지 않아? 눈동자가 커지는걸 화면에서 보고 싶어."
황당한 주문에 우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액션!"
내가 칼에게 다가가 대사를 해야 했다.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칼과 눈이 마주치자 감당이 안 되어 피하기까지 했다. - P263

겨우 장면을 끝내고 나는 응석을 피웠다.
"이건 아니잖아!"
칼도 참고 있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너무 좋았어!"
마거릿은 완벽했다며 박수까지 쳤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했다.
"칼 너무 귀엽지 않아? 널 좋아하는 거 같아!"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바로 그때 우리 귀여운 감독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마거릿은 마치 내가 연기를 공부하는 학생인 듯 지도해 주었다. 초보 연기자들에게서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고 진짜 상황을 만들어주는 연기 선생님처럼.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적당한 테크닉을 쓰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던 내게 다시 접하는 이 방법은 오히려 신선하고 새롭게 다가왔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산드라가 되어 커트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마거릿하고 나는 오랫동안 서로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품은 따뜻했다. 나처럼 그녀 안에도 열정이 담겨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만나서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도록 서로 열심히 일하고 할리우드에서 힘을 키워나가자고 약속했다. 그녀는 분명히좋은 감독이 될 것이다. 아니, 좋은 감독이 되든 못 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그 모습 자체가 소중한 것이니까! 그녀는 나의 영원한 우상, 올 아메리칸 걸! - P265

"Be the man you want to marry!"
일순간 스튜디오가 정적에 잠기는가 싶더니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볼펜을 찾아 들고 이 말을 적어두었다.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되라!" 정말 멋진 말이다. 나도 남자가 나를 ‘구해주길 바라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스스로를 구할 생각은 왜 못했을까?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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