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부부 동반 모임은 플라토닉 스와핑 모임 아닙니까? 부부동반은 부부 교환의 암어 아닙니까? 솔직히 다들 상상하셨잖습니까. 저이가 내 남편이라면, 저이가 내 와이프라면, 상상했잖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부부 교환의 설렘을 품고 모임에 나왔습니다. 그 환상 없이, 그 상상 속 재배치 없이, 어떤 부부가 토요일 밤마다 안락한 소파를 등지고 종교 모임에 나올까요?" - P253

예전부터 내 소설을 시간 내어 읽어준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어아껴둔 말이 있다. 단편소설의 핵심을 설명하는 조지 손더스의 ‘압축은 예의이자 친밀감의 한 형태이다"라는 말이다. 이 책에 담긴 여덟 편의 소설을 쓰며 단편소설이란 미술시간의 접이식 물통 같다고 생각했다. 쓰는 사람은 마음에 품은 긴 이야기를 짜부라뜨려 압축한 소설로 건네고, 읽는 사람은 그 소설을 펼쳐 가려져 있던 주름의 이야기를 읽는다. 아니, 주름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는다. 함께 아코디언을 접고 펼치며 노래하는 친근한 공간을 상상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하다.


2022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이미상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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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니, 사람이 응? 너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잖아? 그것도꼴사납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가 좋아 죽겠는 짓거리거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다. 그러니우리는 손 씻고 저녁이나 먹자."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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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무덤이 장차 내가 누구를 죽일 것인가에 관한 글이라면, [라스트 코요테]는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인가에 관한 글이잖아. 앞의 질문이 미래를 향해 있다면, 뒤의 질문은 과거를 보고 있지. 고향에서 조용히 낚시하며 은퇴 생활을 즐기는 전직 형사 매키트릭은 망망대해를 보며 끝없이 자문했어.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인가. 그건 죄를 묻는 질문이지. 내가 누구 손에 죽을지 상상하는 건, 내가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지 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아."
사장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상상해본 적 없어? 일요일 밤에 재활용쓰레기를 잘 분류해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뒤도는데 앞에 그 사람이 있는 상상. 보는 순간 아, 왔구나, 묘한 안도감이 드는 그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나를 죽인다면 나도 인정, 쌉인정, 하며 편해지는 마음." - P209

그래, 네가 나를 죽이면 나도 인정, 쌉인정.....…
"자긴 자긴 누구야?"
사장이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일요일 저녁, 나는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수거한다. 페트병을 밟자 ‘직‘ 소리가 난다. 인간이란 참 이상도 하지. 왜 내가 내는 ‘콰직‘ 소리는 상쾌한데 남이 내는 ‘콰직‘ 소리는 짜증날까? 어이없어 하면서도 손발은 부지런히 캔은 여기, 종이는 저기. 분리수거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케아 가방을 메고 돌아서는데 그가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과거, 내 잘못, 내 인생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망치를 들고. - P211

샌드위치는 바다에 던져졌다. 남편은 아내의 샌드위치를 배 밖으로 던지며 말한다. 누구든 저 샌드위치처럼 바다에 던져버릴 생각이었다고. 나는 그런 구절을 읽을 때, 샌드위치가 된다. 보이와 사장은 참회하고, 보슈와 매키트릭은 추리하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된다. 구남 O는 선언하고, 사장은 전두환을 발견하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된다. - P212

하드보일드 레이디가 뛰기 시작한다. 거대한 샌드위치가 그녀를 쫓고 있다. 바다 이끼에 뒤덮인 샌드위치. 무엇도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그녀는 점점 더 빨라진다. 무감해진다. 잔인해진다. 자유로워진다. 휙, 아내가 공들여 싸준 샌드위치를 바다로 던질 수있는 사람이 된다. 휙, 잘린 머리를 구덩이에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머리 위에선 물방울이 영원히 똑똑똑 하드보일드 레이디가 달리면서 고개를 든다. 천장이 길게 찢어져 있다. 터진 하늘에서 고개를 내민 여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물을 흘린다. 그 너머로 뒤집힌 무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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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했다. 나는 남자를 죽일 것이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지 못한 남자를 죽일 것이다. 그 남자를 죽인 사람은 B구역의 가장 넓고 양지바른 곳에 묻히게 될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 남자 중의 남자가 될 것이며, 감옥으로도 무덤으로도 팬레터가 날아들 것이며, 옥중 결혼뿐 아니라 옥중 재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의 야심과 추진력과 철두철미함이었다면 여자 스물 둘, ‘주변에서 바로 찾지는 않는 여자‘라면 서른 명쯤은 일도 아니게 죽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도 여자를 죽이지 않고 남자를 죽였으니, 대략 서른 명의 여자가 그의 손에 살아남아 오늘도 크고 작은 일상을 꾸리고 있는 거라고. 그는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않음을 베풂으로써, 결국 해버린 자들을 우습게 만들었다고. 이것이 진정한 살인의 마스칸이 아닐지. 신실한 벗으로서 당신께 요청하나니, 이 말을 기억할 것.

적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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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은 한 자 차이가 사람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그의 병원에는 두 명의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있었는데 수진과 수미가 그들이었다. 자매인 양 이름의 끝 자만 다른 둘은 개원 멤버로 병원을 처음 열었을 때부터 일하기 시작해 병원에서 이십대를 다 보냈다. 월급은 수미가 십만원 더 받았고 월차는 수진이 하루더 썼으며 원장은 수진을 티나게 편애했다.
그는 매일 아침 안내데스크에 서서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두사람을 보며 체 보고 옷 짓고 꼴 보고 이름 짓는다, 라는 속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부모는 아이들이 갓 태어났을 때 각자에게서 어떤 꼴을 보았기에 이름을 그리 지은 걸까. 분명한 건 수미의 부모가 수진의 부모보다 딸에게 더 큰 기대를 있다는 것이고 처음부터 완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55

수진은 남자와 자기 사이에 무언의 셈법이 있다고 믿었다. 내놓고 말하진 않았어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정교한 셈법에 의해 서로 찬 것도 결한 것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제 짝이라 여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규칙을 몰랐다. 신발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수진은 연인 관계가 끝났음을 알았다. 남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 P167

다 거짓말일 수 있었다. 증거도 없었고 수진도 요구하지 않았다. 수진이 아는 것이라곤 실제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만이 알고 있는 영화가 하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늘 그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무엇을 보든 자신의 것과 비교했다. "적어도 내 작업이 저것보단 더 나아갔어. 알아? 저것보단 더 갔다고!" 그는 늘 더 갔다고 했고 더 갈 수 있었다고 했고 수진은 더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역시 묻지 않았다. 가끔 남자는 펑펑 울었다. 그에게는 만들지 못한 영화가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해 좌절하고 아무도 보지못해 안도하는 그 영화가 내면에서 걷잡을 수 없이 위대해지다가 추락하곤 했다. - P168

밤에 베란다에서 쓰기.
밤, 베란다, 쓰기.
수진은 세 조건을 과장하지 않았다. 행갈이를 통한 고조의 비열함. 그것에 기대어 지루한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전으로서의 창조행위, 내가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밤만 돼봐라 같은 생각, 클라크 켄트의 비밀. 명사로 끝내기의 낯간지러움. 그럼에도 밤과 베란다와 쓰기는 그녀에게 중요했다. 하루중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겨우 밤뿐이었다.
어떤 루틴을 축 삼아 밤을 보낼 것인가,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한땐 수영이 축이었다. 이제 그녀는 일 년에 두 편의 소설을 쓰고 두 번의 반려 통지서를 받았다. 그것을 축 삼아 그녀의 일부는살아갔다. 그 시간대의 그녀는 다른 시간대의 그녀와 비슷하지만 달랐을 것이다. 남자가 침범한 건 바로 그 시간대였다. - P170

둘은 헤어졌다. 남자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의 집에서 나가야했다. 그는 한 달을 보챘다. 헤어지는 건 헤어지는 건데 이유나 알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녀는 말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하려는 순간,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생략이 노출보다 나은 법입니다. 그녀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그녀는 신비로운 이야기, 신비로운 여자가 되기로 했다. 수진에게도 그 정도의 허영심은 있었다. - P171

"……인간들 뭐 좀 안 하면 안 되나. 뭘 할 줄 안다고 그렇게들 뭘 해." - P171

"저도 뭐 해요."
수진이 회전하는 젓가락 끝을 보며 심상히 말했다.
"뭐 하는데?"
수미가 청경채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소설 써요.""
"소설?"
"네, 밤에요."
원장이 고개를 확 꺾었다. 그는 정말 싫어하는 건 아예 볼 수가없었다. 시야에서 사라지게 해 눈으로라도 죽여야 했다. 이제 그의 시야에서 수진이 죽었다. - P172

여름이 끝나고 월세 계약도 끝났다. 밤의 베란다는 사라졌다. 수진은 베란다가 없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제 파 화분은 냉장고 위에 올라가 있고 수진은 소설을 쓰지 않는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소설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을 이기는 위대한 소설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랬다. 한 계절은커녕 첫자부터 끝 자까지 읽을 삼사십 분도 이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의 소설을 잃었다고 한들 그것은 세계의 손실도, 누구 하나의 손실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사정일 뿐이었다. 그녀만의 사정. 수진은 한때 그걸가졌었다. 자신만의 사정을 조용한 기쁨이 있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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