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은 한 자 차이가 사람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그의 병원에는 두 명의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있었는데 수진과 수미가 그들이었다. 자매인 양 이름의 끝 자만 다른 둘은 개원 멤버로 병원을 처음 열었을 때부터 일하기 시작해 병원에서 이십대를 다 보냈다. 월급은 수미가 십만원 더 받았고 월차는 수진이 하루더 썼으며 원장은 수진을 티나게 편애했다.
그는 매일 아침 안내데스크에 서서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두사람을 보며 체 보고 옷 짓고 꼴 보고 이름 짓는다, 라는 속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부모는 아이들이 갓 태어났을 때 각자에게서 어떤 꼴을 보았기에 이름을 그리 지은 걸까. 분명한 건 수미의 부모가 수진의 부모보다 딸에게 더 큰 기대를 있다는 것이고 처음부터 완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55

수진은 남자와 자기 사이에 무언의 셈법이 있다고 믿었다. 내놓고 말하진 않았어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정교한 셈법에 의해 서로 찬 것도 결한 것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제 짝이라 여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규칙을 몰랐다. 신발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수진은 연인 관계가 끝났음을 알았다. 남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 P167

다 거짓말일 수 있었다. 증거도 없었고 수진도 요구하지 않았다. 수진이 아는 것이라곤 실제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만이 알고 있는 영화가 하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늘 그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무엇을 보든 자신의 것과 비교했다. "적어도 내 작업이 저것보단 더 나아갔어. 알아? 저것보단 더 갔다고!" 그는 늘 더 갔다고 했고 더 갈 수 있었다고 했고 수진은 더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역시 묻지 않았다. 가끔 남자는 펑펑 울었다. 그에게는 만들지 못한 영화가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해 좌절하고 아무도 보지못해 안도하는 그 영화가 내면에서 걷잡을 수 없이 위대해지다가 추락하곤 했다. - P168

밤에 베란다에서 쓰기.
밤, 베란다, 쓰기.
수진은 세 조건을 과장하지 않았다. 행갈이를 통한 고조의 비열함. 그것에 기대어 지루한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전으로서의 창조행위, 내가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밤만 돼봐라 같은 생각, 클라크 켄트의 비밀. 명사로 끝내기의 낯간지러움. 그럼에도 밤과 베란다와 쓰기는 그녀에게 중요했다. 하루중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겨우 밤뿐이었다.
어떤 루틴을 축 삼아 밤을 보낼 것인가,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한땐 수영이 축이었다. 이제 그녀는 일 년에 두 편의 소설을 쓰고 두 번의 반려 통지서를 받았다. 그것을 축 삼아 그녀의 일부는살아갔다. 그 시간대의 그녀는 다른 시간대의 그녀와 비슷하지만 달랐을 것이다. 남자가 침범한 건 바로 그 시간대였다. - P170

둘은 헤어졌다. 남자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의 집에서 나가야했다. 그는 한 달을 보챘다. 헤어지는 건 헤어지는 건데 이유나 알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녀는 말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하려는 순간,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생략이 노출보다 나은 법입니다. 그녀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그녀는 신비로운 이야기, 신비로운 여자가 되기로 했다. 수진에게도 그 정도의 허영심은 있었다. - P171

"……인간들 뭐 좀 안 하면 안 되나. 뭘 할 줄 안다고 그렇게들 뭘 해." - P171

"저도 뭐 해요."
수진이 회전하는 젓가락 끝을 보며 심상히 말했다.
"뭐 하는데?"
수미가 청경채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소설 써요.""
"소설?"
"네, 밤에요."
원장이 고개를 확 꺾었다. 그는 정말 싫어하는 건 아예 볼 수가없었다. 시야에서 사라지게 해 눈으로라도 죽여야 했다. 이제 그의 시야에서 수진이 죽었다. - P172

여름이 끝나고 월세 계약도 끝났다. 밤의 베란다는 사라졌다. 수진은 베란다가 없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제 파 화분은 냉장고 위에 올라가 있고 수진은 소설을 쓰지 않는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소설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을 이기는 위대한 소설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랬다. 한 계절은커녕 첫자부터 끝 자까지 읽을 삼사십 분도 이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의 소설을 잃었다고 한들 그것은 세계의 손실도, 누구 하나의 손실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사정일 뿐이었다. 그녀만의 사정. 수진은 한때 그걸가졌었다. 자신만의 사정을 조용한 기쁨이 있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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