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아빠는 마주 앉아 꿈을 꾸고 있었다. 그건 꿈을 보는 아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꿈이 꼭 미래시제일 필요는 없구나. 과거의 기억이 꿈이 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미래의 바람이든 과거의 기억이든, 꿈은 꿈이라는 사실만으로 퍽 아름다웠다. - P130

"맥베스가 누군데요? 왜 잠을 죽였는데요?"
"죄책감에 시달리던 어른. 잠들면 꿈에서 자기 죄책감과 마주하니까, 그게 두려워서 잠을 죽여 버려."
"꿈꾸지 않으면 편하거든. 그러니까 한여름 밤의 꿈을 포기하고 맥베스가 되길 자처하는 거야. 코앞에서 손 흔드는 죄책감도 못 본 척하면서."
"선생님도 꿈이 무서울 때가 있어요?"
그렇게 묻는 설이도 사실 알고 있었다. 설이도 때때로 꿈이 무서워 잠을 토막 내곤 했으니까. 영재원, 시험, 엄마의 기대….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들이 질량을 지닌 듯 설이의 머리를 짓누르고 잠을 찔렀다.
"가끔은 꿈을 꾸는 데는 품이 드니까." - P133

"설아, 이번엔 정말 안 되겠다. 도망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에 있는 애들은요? 선생님은요?"
"꿈을 먹혀도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는 문제 없어. 애들은 자기 꿈이 먹혔는지 알지도 못할 거야. 밤에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고, 열도 나고, 학교에서 좀 먹었이 다니겠지만, 급식에 문제가 있었거나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겠지. 어차피 요즘에 꿈을 가진 애들은얼마 되지도 않아. 이 세상이야말로 거대한 두억시니야. 꿈이 보이면 족족 잡아먹으려 들지. 그러니 저놈들도 저렇게 설치는 거야. 낮에 나타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뭐겠어. 꿈이 씨가 말랐으니까. 굶어죽겠으니까. 저놈들이나 우리나 더 물러설 데가 없어.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 수밖에. 하지만..… 넌 꿈을지키는 전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네 꿈만큼은 죽어선 안 돼. 그러니 도망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지켜."
"말도 안 돼요. 꿈을 지키는 전사가 될 건데 꿈을 지키는 싸움에서 도망치라고요?"
"말했지? 이건 진짜야.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싫어요." - P146

"너, 맥 주변에 왜 하얀 나비가 맴돌고 있는지 아니?"
"왜요?"
"하얀 나비는 살면서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한이고 혼이야."
"말도 안 돼. 꿈꾸는 데 누구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설이의 말에 화식조는 쓰게 웃었다.
"한때 꿈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지. 그들이 떠난 곳엔 하얀 나비가 남았어. 나비는 바람과 희망을 전하는 전령이야. 다른 말로-"
"-꿈"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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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복사한 오늘, 오늘을 붙여넣기 한 내일은 지루해. 수학 문제를 풀어 뭐 해, 꿈을 보는데. 작문숙제를 할 때가 아니야, 두억시니랑 싸워야지. 지금 사회 교과서가 눈에 들어오겠냐고. 아니, 도대체 두억시니는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밥도 안 먹나? - P127

"얘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단 말이야."
엄마가 구시렁거렸다.
"내가 기분 좋으면 엄마는 싫어?"
설이의 말에 엄마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검은자위가 요동친 쪽은 엄마였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근데 왜 내가 기분 좋은 걸 걱정해?"
"엄마야 항상 걱정이지. 좋아도 걱정, 안 좋아도 걱정. 엄마니까, 그게 엄마 일이야." - P128

"왜, 아빠 얼굴에 뭐 묻었냐?"
기타를 치던 젊은 아빠의 꿈이, 이제는 머리가 희해지고 주름이 잡혀 가는 아빠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꿈 보존의 법칙- 꿈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피부에, 속눈썹 아래에, 입술 사이에 남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혹은 백 가지의 얼굴을 갖는 건 아닐까. 그걸 밤의 어둠과 무의식 아래 숨겨 놓고, 아침이면 시치미를 떼며 식탁 앞에 앉는 건 아닐까. - P128

맛도 모른 채 씹던 밥알에서 희미하게 꿈의 감각이 느껴지면 누가 눈치라도 챌까 화들짝 놀라 얼른 삼켜 버리는 건 아닐까.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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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전히 그게 뭔지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어. 꿈은..… 그냥 꿈이야. 무의식이자, 뇌가 걸러 내는 찌꺼기이고 정화 작용이지. 그런데 꿈을 먹히면 이러한 무의식도, 기억의 찌꺼기와 정화 작용도 사라져 버려"
"사라지면 좋은 거 아니에요? 찌꺼기 같은 건."
"뭔가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전하량 보존의 법칙… 알지? 사라지는 것들은 죄다 형태를 바꿔서 다시 나타나." - P104

"당장 꿈을 먹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지는 않아. 사람은 꿈을 먹고 살지 않으니까. 잠을 자지 않는 낮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 낮에 사람을 움직이는 건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거든. 하지만 꿈을 먹힌 사람은 미래를 희망할 수 없어. 기억에 감정을 담지도 못하지. 오직 현재만 살게 되는 거야. 그게 어른이라면 좋을 수도 있어. 어른들은 현재에 집중해야 하잖아. 하지만 아이들이라면…."
"아이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설이 입에서 사회비판적인 불만이 튀어나왔다.
"학교에서는 딴생각하면 안 되고, 수업시간엔 집중해야 하고, 속상한 건 잊어버리라고 하고, 재밌는 건 언제까지 할 거냐고 하고. 어른들은 다 그렇게 말하는데요."
편의점 앞에서 술판을 벌이는 아저씨들이나 라디오 뉴스에 딴죽 거는 택시기사님이 그러는 것처럼,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어른들은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하면서딴생각하고, 딴짓하고, 잊어버리지도 그만두지도 않는게 애들이잖아."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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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부끄러워 해]

[우리 사이는 증명됐는데] - P53

레드 벨벳의 부자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블랙 포레스트에서는 꿈이나 엔터테인먼트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작동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스위치를 끄고 싶었다. 아마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블랙 포레스트 사람중 절반 정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나머지 절반에 해당했다. 메모리 없는 오토마톤처럼 무의미하게 계속 작동만 하고 있었다. - P49

스위치를 끄고 싶은 기분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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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설이가 "세상엔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여기, 나한테요."라고 하면 엄마는 이럴 거다.
"잘라. 교과서에 맞춰." - P81

"지각할 이유가 있는 사람만 나와."
이유야... 다들 있지. 이유랑 변명의 경계가 애매해서 문제지. 여기까지가 이유, 여기서부터는 변명, 국경을 정하듯 딱 잘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 P86

엄마는 노력의 결실이 달콤할 거라고 하지만- 엄마도 알잖아요, 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요.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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