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안데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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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와 은은 남자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흉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전망경 쪽의 구경꾼들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시체가 흰 천에 덮이고 있다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남자들이 삶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도망가는 타이밍은 어찌나 절묘한지." 혜주가 말했다.
"싸우느니 속 편하게 죽겠다는 거잖아." 은이 맞장구를 쳤다.
은은 왜 싸우려고 들지 않느냐고 했지만, 최가 보기에 만약 자살한 남자가 싸우겠다고 나서면 은의 가족은 좋을 게 없었다. 제일 먼저 이곳 타운하우스로 달려올 테니까. - P62

"난 가난한 연애는 싫어. 가난하게는 못 살아." 이제 혜주의 다섯 식구는 방 두 개에, 욕실이 하나뿐인 전셋집으로 옮겨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식구들의 방귀 냄새를 맡으며 욕실 앞에 줄을 서봤다.
"널 좋아하지만, 내 감정은 사랑이 아니야." 혜주는 또 한참이나 울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네가 날 위해 해주는 일엔 굳이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푼돈이면 누굴 시켜도 다되는 일들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담배 심부름은 천원주고 길 가는어린애를 시키면 되었고, 밤길 동행은 얼마 전까지 경호원이 하고 있었고, 세상에 널린 것이 외롭지 않게 같이 술을 마셔줄 친구였다. 굳이 최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혜주를 붙들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전공을 살릴 아르바이트 일감 하나 얻을 수가 없었다. 은을 단념했던 순간을 다시 한번 겪고 있는 것만 같았다. - P67

최와 혜주는 혜주의 신랑이 죽고 첫 번째 기일이 지나서야 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정규직 직장이 있었고, 혜주 역시 가난한 사랑을 더 이상 멸시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가난을 겪어봤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사랑의 배후에는 은과 은의 가족이 있었다. 둘다 은의 가족을 위해 일했고 은의 가족으로부터 사랑의 현실적인 동력을 구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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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였느냐 아이야 어찌하였느냐 아이야 왜 눈물 같은 것을 아주 씻지 못하느냐?
내 입술이 저절로 내 몸 위에서 부르짖는다.
하나 무거운 무거운 내 마음속 맨 밑은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아아 내 입술은 탄식한다.
-너는 봄을 모르는구나, 불쌍한 아이야. 너는 지금까지 봄을 못 보았구나.
-울음을 그쳐라. 엊저녁에 네 운명의 신이 꿈 가운데에서는 바뀌지 않았더냐. 너는 지금부터 천천한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지 않으냐.
-봄이다 봄이다 아직 늙지 않은 아이야, 뛰고 놀아라.
네 눈은 아직 빛나고 네 뺨은 아직 붉지 않으냐. 지나는 일초………… 일 분…………… 들이다. 네게 빛이 보이는 듯싶지 않으냐. - P12

가볍게 들뜨려던 마음과 무섭게 가라앉으려던 마음이 엉클어져서 운다. 세상에는 봄이 왔으되 네게는 깨일 줄 모르는 겨울이다. 세상은 봄옷을 입되 너는 겨울의 누더기를 벗지 못한다.
긴- 겨울 무거운 누더기는 얼마나 지루한 것이랴. 하물며 세상이 다 - 화려한 장식을 한 봄 네거리에 서서야 얼마나 쓰라릴 것이냐.
화려할 소녀의 시대를 능욕과 학대에 빼앗기고 너는난 십 년간 얼마나 아프게 울어왔더냐. 길을 지나는 낯익은얼굴들이 다 네게 무엇을 말하느냐.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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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찰칵, 하고 셔터 버튼을 몇 번 누르고 나니 최는 자신이 만 가족 타운하우스에 난파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느껴졌다. 무인도에 난파한 로빈슨 크루소만큼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만 가족 타운하우스는 무인도가 아니었다. 반대로, 담장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몇 년이고 살 수 있는 자족적인 낙원이었다. 원하는 것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놓여있었다. 요리사, 의사, 심리상담사, 전자 제품 수리기술자, 헤어 디자이너, 회계사에 총기를 소지한 경호원들도 있었다. 필요한 게 있는데 마침 배달이 되지 않는다면 퍼스널 쇼퍼에게 밖에 나가 사 오게 하면 되었다. 타운하우스에 있다가 외출을 하면 오히려 세상이라는 값싼 무인도에 난파된 기분이 들 수도 있었다. - P25

"선생님이나 저한테 사과하세요."
"허허, 이년이 미쳤나."
"미쳐…………." 은이 노여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최의 귀에도 들렸다.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사과 안 하시면, 아마 내일 점심때쯤이면 밥이 그 잘난 목구멍으로 안 넘어갈 거고, 네 시쯤 돼서는 미치도록 제가 보고 싶어질 거예요."
최는 학생주임의 손바닥이 거의 은의 턱밑에까지 올라온 것을 봤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날 그녀의 행동은 어린애가 가질 수 있는 순진한 울분 같은 것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 그 순간, 그의 가슴은 사랑의 감정으로 콩닥거렸다. 그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녀 이마의 빛은 더욱 고상하게 빛났다.
그녀는 매 순간 예뻤지만 그때가 가장 예뻤다. - P40

그는 유치하게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면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어깨 너머로 꽃다발을 던진다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었지만,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부케를 들려주고 싶었다. - P41

그녀는 중학교 마지막 방학 때 네덜란드로 공부를 하러 갔다. 그는 유학은커녕 비행기탈 일도 없었다. 메일을 주고 받았지만 갈수록 뜸해졌고, 해가 지나면서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줄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부자의 삶이란 여전히 추상적인 것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사실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런던은 스케줄에 넣지 않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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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남자는 혼자서 웃었다. 또다시 처리해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자신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침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올 때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에는 모두 공포가 서려있었다. 이제 그 공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공포.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에게 공포를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강한 힘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남자에게 공포란 그런 의미였다. 다른 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힘. 그러기 위해서는 전시가 필요했다. 자신의 업적을 내보여야 했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꼬리가 밟힐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그래도 공포를 전시할 때의 짜릿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자가 훤한 대낮에 작품을 내다 버리는 것도 바로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더 큰 자극, 더 깊은 희열, 그리고 더 강렬한 쾌감.….
남자의 이런 내밀한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당연히 그뿐이었다. 남자가 공포를 즐긴다면 그는 혼란에 기쁨을 얻는 쪽이었다. 누군가를 혼란에 빠트릴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며 그는 슬쩍 웃었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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