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찰칵, 하고 셔터 버튼을 몇 번 누르고 나니 최는 자신이 만 가족 타운하우스에 난파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느껴졌다. 무인도에 난파한 로빈슨 크루소만큼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만 가족 타운하우스는 무인도가 아니었다. 반대로, 담장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몇 년이고 살 수 있는 자족적인 낙원이었다. 원하는 것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놓여있었다. 요리사, 의사, 심리상담사, 전자 제품 수리기술자, 헤어 디자이너, 회계사에 총기를 소지한 경호원들도 있었다. 필요한 게 있는데 마침 배달이 되지 않는다면 퍼스널 쇼퍼에게 밖에 나가 사 오게 하면 되었다. 타운하우스에 있다가 외출을 하면 오히려 세상이라는 값싼 무인도에 난파된 기분이 들 수도 있었다. - P25

"선생님이나 저한테 사과하세요."
"허허, 이년이 미쳤나."
"미쳐…………." 은이 노여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최의 귀에도 들렸다.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사과 안 하시면, 아마 내일 점심때쯤이면 밥이 그 잘난 목구멍으로 안 넘어갈 거고, 네 시쯤 돼서는 미치도록 제가 보고 싶어질 거예요."
최는 학생주임의 손바닥이 거의 은의 턱밑에까지 올라온 것을 봤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날 그녀의 행동은 어린애가 가질 수 있는 순진한 울분 같은 것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 그 순간, 그의 가슴은 사랑의 감정으로 콩닥거렸다. 그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녀 이마의 빛은 더욱 고상하게 빛났다.
그녀는 매 순간 예뻤지만 그때가 가장 예뻤다. - P40

그는 유치하게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면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어깨 너머로 꽃다발을 던진다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었지만,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부케를 들려주고 싶었다. - P41

그녀는 중학교 마지막 방학 때 네덜란드로 공부를 하러 갔다. 그는 유학은커녕 비행기탈 일도 없었다. 메일을 주고 받았지만 갈수록 뜸해졌고, 해가 지나면서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줄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부자의 삶이란 여전히 추상적인 것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사실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런던은 스케줄에 넣지 않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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